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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문제가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16일 오후 법무부 장관 후보에서 사퇴한 안경환 서울대 교수가 저서에 쓴 문장이라는 글귀들을 트위터에서 처음 봤을 때요. '술과 여자는 분리할 수 없는 보완재', '폭력을 동원해서도 목적을 달성하고 싶은 게 사내 생리' 등등, 진보적 법학자로 잘 알려져 있고 노무현 정부에서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을 하신 분이 쓴 글이라고 보기에는 참 저렴하다는 생각부터 들었습니다.

그래서 책을 직접 봐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아무리 사회 문제에서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더라도 성 의식 만큼은 후진 경우를 숱하게 봐 왔으니까요. 청와대 행정관으로 재직 중인 탁현민씨의 책 <남자 마음 설명서> 같은 경우도 그랬죠. 여성을 끊임없이 성적 대상화 하면서 '남자란 원래 그런 거니 우리 까놓고 얘기 보자'는 투의, 참으로 동물스러운 글이지 않았습니까?

<남자란 무엇인가>의 표지.
 <남자란 무엇인가>의 표지.
ⓒ 홍익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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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문제의 <남자란 무엇인가>를 바로 전자책으로 구매해서 읽어 보았습니다. 전체 구성은 4부로 나뉘어져 있고, 총 18장의 글이 실려 있습니다.

1부는 '남자의 본성'입니다. 먼저 남자와 여자의 차이점을 뇌과학 연구 결과 등을 인용하며 정리합니다. 그런 다음 남자들 사이의 경쟁 심리와 권력에 목매는 속성, 남자들만 사람 취급하는 한국의 뿌리깊은 종중(宗中) 문화 등을 비판적으로 고찰하지요.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는 남자도 화장하고 꾸미는 세태를 예로 들며, 남녀의 젠더 구분이 사회학적으로 주어진 것이라는 주장을 소개하기도 합니다.

여기까지 읽고 났을 때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크게 문제가 있다거나 하는 부분은 없었습니다. 저자는 법과 사회 문제에 대한 평소 지론이나 잘 아는 분야가 아니면, 대부분 다른 사람의 의견을 인용하면서 논란을 피하려 합니다. 논의 전개 방식 또한 남자의 본성에 대한 이러저러한 주장과 연구 결과가 있지만, 이제는 남자에게도 변화가 필요하다는 식이어서 문제될 것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된 구절들이 있는 부분에는 아직 다다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계속 읽어 나갔습니다. 2부는 '남자와 결혼'입니다. 여기서는 역사적으로 남성이 섹스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품어 왔고, 그로 인해 벌어진 성매수와 강간 등을 저질러 왔음을 명시한 후 대안을 제시합니다. 인용은 여전히 많아서 부드럽게 잘 읽히지가 않습니다.

2부에 들어서면 문제의 구절 중 하나인 '젊은 여성의 몸에는 생명의 샘이 솟는다. 그 샘물에 몸을 담아 거듭 탄생하고자 하는 것이 사내의 염원이다'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전체 논지를 전개하는 와중에 그것이 남자의 일반적인 욕망임을 서술하는 문장에 가깝습니다. 딱히 저자의 주장이 이러하다고 한 것은 아닙니다.

저자는 2부 전체에서 남성의 동물적 욕망이 존재함을 인정하되, '남성은 원래 그런 존재니 이해를 좀 해 주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으니 남자들이 더이상 동물의 수준에 머무르지 말고 고매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주장을 펼칩니다. 이런 점에서 '동물적 본능을 살려 다같이 동물처럼 놀자'는 식으로 얘기를 풀어 놓은 탁현민씨의 책과는 완전히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2부 5장에서 성소수자 문제를 적극적으로 거론하고, 박원순 시장이 일부 기독교계의 반대에 눌려, 소수자 차별 금지를 명시한 '서울시민인권헌장'을 채택하지 않은 사실을 강하게 질타한 것은 여러모로 눈에 띄는 부분이었습니다.

여기까지 읽었을 때 저는 어쩌면 안경환 교수에 대한 논란이 전체 문맥을 무시하고 문장만 떼어낸 데서 나온 것일 수 있다는 의심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문제가 된 구절들은 더 남아 있기 때문에 끝까지 읽어 보기로 했습니다.

3부 '남자와 사회'는 굳이 남자와 연관지을 필요가 없어 보이는 장들로 이뤄져 있습니다.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에 대한 고찰, 징병제 대신 모병제를 고려할 때라는 주장, 편협하게 변질될 수 있는 종교적 광신에 대한 경계, 사이버시대에 바람직한 삶의 모습 등에 대한 저자 자신의 주장을 펼쳐 나갑니다. 책 전체에서 그나마 가장 읽기 편하고 집중이 잘 되는 부분이었습니다.

마지막 4부 '남자의 눈물'에 이르자 드디어 논란이 될 만한 부분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실린 글들은 삶의 여러 측면에서 괴로움을 겪고 있는 남자라는 동류에 대한 연민을 다소 두서없이 표출합니다. 여러 번 읽어 봐도 각 장마다 주장하는 바는 뚜렷하지 않고, 인용과 저자의 의견이 혼재된 상태입니다.

좀 더 적극적으로 저자의 의도를 짐작해 보자면 아마 이런 얘기를 하려고 한 것 같습니다. 요즘은 시대가 바뀌어 남자들이 여러모로 힘들다, 세상이 이전 세대와는 바뀌었다는 걸 인정하고 자기 욕망과 스트레스를 적절하게 해소해야 한다는 거죠. 젊은 세대와 중년층에게는 인생 선배로서 하는 충고, 그리고 같이 늙어가는 노년층의 남자들에게는 약간의 신세한탄이 섞인 조언을 하려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남자들에 대한 연민,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된 주된 원인으로 남성과 여성 간의 권력 관계가 변화되었다는 사실과, 남성의 변치 않는 성욕을 드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저자의 논리대로라면 요즘 남자들이 불행하고 힘든 이유는 예전처럼 여자들이 찍소리 못하고 순종하던 시대에 태어나지 못했기 때문이 되는 거니까요.

특히 언론에 의해 문제 제기된 구절들이 많이 포함된 4부 3장과 4장은 문제가 많습니다. 술에 관한 이야기를 줄줄이 늘어 놓는 3장은 왜 썼나 싶을 정도로 논지 파악이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런 가운데 술과 여자에 관한 얘기를 불필요하게 늘어 놓으며 마무리됩니다. 논란이 된 구절 중 술과 여자를 얘기한 문장들이 나오는 부분도 여기입니다.

4장은 주로 중년과 노년 남자의 성욕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성욕을 주체할 수 없지만 제대로 해소할 수 없는 중년 남자들을 시종일관 측은하게 바라보는 서술이 여러 쪽에 걸쳐 나와서 남자인 제가 봐도 거슬립니다.

안경환 법무부장관 후보자가 16일 오전 서울 서초구 법률구조공단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최근 불거진 여성비하와 허위 혼인신고, 아들 퇴학 무마 의혹에 대해 해명했다.
▲ 해명 나선 안경환 “청문회에서 총체적으로 평가해 달라” 안경환 법무부장관 후보자가 16일 오전 서울 서초구 법률구조공단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최근 불거진 여성비하와 허위 혼인신고, 아들 퇴학 무마 의혹에 대해 해명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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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남자란 무엇인가>라는 책 전체를 놓고 보면 안경환 교수는 또래 남성들과 비교해서는 훨씬 진보적이고, 전 연령대를 통틀어 평균적인 한국 남자들과 비교했을 때도 더 나은 의식 수준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앞서 말했던 것처럼 탁현민씨 같은 부류와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부분도 분명히 있기 때문에, 지금처럼 전체 맥락상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는 식의 해명에 그쳐서는 안됐다고 봅니다. 16일 낮에 있었던 기자회견에서도 '책과 글의 전체 맥락을 유념하여 읽어 주실 것을 간곡히 당부 드린다', '남성의 본질과 욕망을 드러냄으로써 같은 남성들에게 성찰과 반성의 계기를 제공하고자 했다'며 당초의 입장을 반복했을 뿐이었죠.

오해의 소지가 있는 일부 책 내용에 대해 더 적극적으로 해명했어야 했습니다. 어떤 지지자들은 저자의 논지를 잘못 받아들여 '남자는 원래 본능적으로 성욕을 주체할 수 없는 게 자연스러운 거다'라고 하면서 후보자를 옹호했습니다. 이에 대해 후보자 본인이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남자의 그런 욕망을 성찰해서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는 뜻이었다고 직접 교정을 하는 노력을 보여 줬더라면 좋았을 겁니다.

또한 중장년층 남성 독자를 겨냥해서 쓴 글이었다고는 하지만, 책이란 건 남녀노소 누구나 사서 읽어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견해가 어떤 독자들에게 불쾌감과 상처를 줄 수 있었다는 점 역시 인지해야 했습니다.

결국 안경환 교수는 16일 오후 법무부 장관 후보자 사퇴를 공식 발표했습니다. '문재인 정부의 개혁 추진에 자신이 걸림돌이 되지 않겠다'는 것이 사퇴의 변이었죠.

문재인 대통령의 장관 인사 발표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정치적 반대 세력들은 자질에 대한 갖가지 의혹을 쏟아 내고, 열성 지지자들은 장관 후보자들을 열심히 방어하는데 힘을 쓰고 있지요. 언뜻 생각하기엔 소모적인 논쟁인 것 같지만, 국민의 정치 참여라는 관점에서 보면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봅니다.

또 이런 과정을 통해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널 수 있습니다. 사퇴한 안경환 교수의 경우도 그의 사회적 경력 뒤에 가려진 성 의식을 점검하고, 과거의 알려지지 않은 개인사를 통해 자질을 검증할 수 있는 기회였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공직 후보자에 대한 다양한 차원의 문제제기와 정당한 검증이 지속적으로 이뤄지길 바랍니다.

덧붙이는 글 | 권오윤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 http://cinekwon.wordpress.com/에도 게재된 글입니다.

<남자란 무엇인가>, 안경환 지음, 홍익출판사 펴냄 (2016. 11. 30.)



남자란 무엇인가

안경환 지음, 홍익출판사(2016)


태그:#남자란 무엇인가, #안경환, #홍익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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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책에 관심 많은 영화인. 두 아이의 아빠. 주말 핫케익 담당.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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