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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대와 60년대에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한 에드워드 올비는 미국을 대표하는 희곡 작가 중 한 명이다. 불우하고 방황하는 유년기를 보냈으나 뛰어난 재능 덕분에 주변의 추천으로 희곡 작가로 데뷔하게 되었고, 이후 수차례 퓰리처상을 수상하며 브로드웨이를 화제로 물들였다. 그는 유럽과 다른 미국만의 부조리극을 쓰고자 하는 욕구가 있었고,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는 그런 의지의 결과물로 탄생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민음사, 2010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민음사, 2010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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퓰리처상 수상이 결정되었으나 그 내용 때문에 위원회에서 상의 수여를 거부, 심사위원 과반 이상이 항의 사퇴하는 파란을 불러 일으켰을 정도로 이 작품의 화제성과 문제의식은 당시 60년대 미국 사회에 있어 대단한 것이었다.

극의 구성은 매우 간단하다. 한 시골의 작은 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가르치는 조지와 총장의 딸 마사 부부는 새로 대학에 부임한 젊은 생물학 교수 닉과 그의 아내를 늦은 밤 파티가 끝난 뒤 자신들의 집으로 초청한다. 다음날 새벽 동이 틀 때까지 그들 네 사람이 펼치는 다양한 대화와 '게임'들이 바로 극의 내용 전부이다.

이처럼 간단한 틀 아래에서 에드워드는 당시 미국 사회가 정치, 사회, 문화 등 전 영역에 걸쳐 가장 굳건하고 중요한 가치로 수호하고 있던 '건강한 가족'의 신화를 산산조각 내버렸다.

열심히 일하는 아버지와 현모양처인 어머니, 그리고 그들 사이의 자식과 함께 만들어지는 화목한 분위기. 당장 오늘날에도 미국은 비록 여러 베리에이션이 존재할지언정 여전히 할리우드영화들과 TV 예능프로, 그리고 정치인의 입을 통해 이같은 이상적 가족관을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그만큼 이 '건강한 가족'은 미국이라는 나라의 상징과도 같은 가치이다. 그런데 지금보다도 2, 3세대 이전에 이 같은 가치에 대한 정면도전이 나타났고 그것이 대중들에게서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에드워드가 작중에서 미국식 가족주의를 해체하는 방식은 다분히 은유적이고 폭력적이다. 극의 전개 내내 분위기는 긴장감을 극도로 조여오고, 매 순간이 눈을 찌푸릴 만큼 폭력적이거나 무의미하게 단절되어 있다. 처음 네 사람이 술잔을 들어올릴 때부터 이들 사이에는 무언가 알 수 없는 긴장감이 조성되는데, 두 쌍의 부부가 각기 서로 감추는 비밀이 있는 것 같은 분위기가 감지된다. 하지만 극의 결말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이에 대한 직접적 폭로는 제한된다.

대신 '주인장 욕보이기', '안주인 올라타기' 등의 언어적/성적 폭력이 '게임'의 형태로 이들 사이에서 구현된다. 그 과정을 통해 점차 각자의 내면에, 그리고 부부라는 관계 아래에 감춰지고 억눌려 있던 뒤틀림이 하나씩 관객들에게 폭로되는 것이다. 그 정점은 조지-마사 부부가 키워오고 있다고 '말해졌던' 스무살이 갓 넘는 외동아들이 허구의 존재였음이 밝혀지는 대목이다. 거기서 정점으로 치닫던 분위기는 급속히 무너져내리고, 배우들은 막을 마무리한다.

이들 각자는 출세에 대한 야망, 성(性)적인 것에 대한 두려움, 어릴적 부모와의 파괴적 경험, 그리고 유년기 때부터 이어져온 아버지의 억압 등 저마다 큰 어둠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이 어둠은 가족이라는 둥지 아래에서 치유되기는커녕 도리어 악화되고 뒤틀려버린다.
부부관계가 순수한 사랑이 아닌 '수단'으로서 이루어졌고 그것을 양자 모두 애써 외면한 채로 표면적 소통만을 시행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작가는 술과 폭력, 음란을 동원해 이들의 일상적 행위와 사고를 뒤흔들고 이를 통해 맨얼굴을 드러내 보이는 기법을 사용한다.  

태초부터 이민자들로 구성된 미국의 역사에서 유일하게 만들어내고 신봉할 수 있는 가치는 '소중한 가족'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현실이 어떠하든 그러한 가족의 신화를 만들어내고 확산시키는 것은 중요한 정치적 과제여야만 했다.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는 <세일즈맨의 죽음>, <달려라, 토끼> 등에 이어 이 같은 상황에 대한 대표적인 도전이었고, 대중들의 폭발적 반응은 그것에 대한 동의였던 것이다.

그로부터 약 60여 년이 지났지만 에드워드가 폭로한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오히려 스크린과 대형 미디어가 '가족'에 대한 목소리를 독점하며 다른 목소리들은 이전보다 더 묻히는 것처럼 보인다.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가 여전히 빛을 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현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 고전이라는 점, 그리고 이 같은 상황이 지속될 때 언젠가 등장할 제 2의 에드워드, 또 다른 이단아를 기다리는 재미를 품을 수 있다는 점 말이다. 미국의 해결되지 않은 현재가 또 어떤 모습의 문학적 거장을 탄생시킬지 기대된다.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에드워드 올비 지음, 강유나 옮김, 민음사(2010)


태그:#서평, #북리뷰, #버지니아울프, #에드워드올비, #희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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