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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소설을 읽고 싶어질 때가 있다. 보다 익숙한 소재들로 들려주는, 내게 친숙하면서도 와닫는 이야기를 듣고 싶을 때 그렇다. 그럴때면 나는 흔히 큰 출판사들에서 수상하여 출간된 작품들을 집어들곤 한다.

대회 출품을 위해 쓰인 글들이어서 그런지, 아직 영글어지지 않은 작가들의 열정과 참신함이 깊게 농축되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 책은 늘 투박하지만 너무나 매력적이다. 작가 이유의 <소각의 여왕> 역시 그런 기대에서 집어들게 된 책이다.

<소각의 여왕>, 이유
 <소각의 여왕>, 이유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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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신한 소재는 아니었다. 고물상 운영과 그 안에서의 발명이라는 주제는 유명한 웹툰 <무한동력>을 바로 상기시켰고, 유품 정리사라는 직업 역시 일본 드라마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존재였다.

서술방식 역시 전반적으로 밋밋한 편에 가깝다. 다만 그 '흔한' 소재들을 가지고 '흔한' 이야기를 펼쳐 놓음에도 독자들이 '새롭게'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들었다는 점, 거기에 이 이야기만의 매력이 존재한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 한쪽밖에는 보이지가 않아서 한쪽으로밖에 갈 수 없는 사람들. 죽음이 아니면 달리 편안해지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가업인 고물상을 맡아 운영하면서도 갑자기 할아버지 시절부터 이어져온 '허파에 바람이 드는 병'에 걸려 이상한 기계의 제작에 몰두하는 아버지, 그리고 그런 아버지의 바람병과 시대의 변화 때문에 먹고 살기 위해 유품 정리사의 길을 걷게 된 딸.

작품을 이끌어가는 이 두 존재는 모두 한 방향의 삶밖에 허락되지 못한 존재이다. 그리고 그 방향 끝에는 죽음, 혹은 파탄만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을 자각하지 못한 채 그들은 그저 그 방향으로 나아갈 뿐이고, <소각의 여왕>은 그 과정의 파편들을 엮어내 보인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가지만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요소들에 의해 점차 무너져내리는 삶의 양상은 이 땅에 발딛고 있는 우리, 그리고 우리 부모의 자화상이다. 한때는 노력을 통해 자신이 걸을 삶의 방향을 정하고 그 길을 닦아나가는 것이 허용되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급격해진 변화의 물결에 적응한, 그래서 살아남은 소수만을 제외하고는 그저 지나온 길을 추억으로 삼으며 그 흔적을 지우는 '소각'의 행위에서만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안타까움을 작중 두 부녀는 단면화시켜 보여주고 있다. 

은은하게, 별 사건 없이 흘러가는 듯 했던 소설은 최종장에 들어서 큰 폭발을 던지며 마무리된다. 아버지가 죽어가면서까지 만들고자 했던 도면 속 기계 - 그녀는 아버지가 떠나간 이후 그것을 모조리 분해해 팔아버렸으나 사실 그 죽음의 순간에 기계가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다.

그리고 결국 이로인해 폭주해 버린다. 삶을 바꾸어줄 희망이 아른거리다 끝내 자신에게 허락되지 못한다는 것을 인지할 때의 충격, 그것을 강렬하게 그려내며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진동없이 고요한 전개 끝에 등장하는 이런 결말은 독자들에게 상당한 충격을 안긴다.

<소각의 여왕>에서 그려지는 이야기는 암울하지만 담담하다. 그리고 그 그늘을 걷어낼 어떤 답도 희망도 보여주지 않는다. 아마 그것이 바로 실제로 그런 삶을 살고 있는 '현실'에서의 모습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방향을 돌아볼 여유도, 가능성도 허락되지 못한 이들의 이야기 말이다. 그렇기에 작가는 그런 결말을 넣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현실에서는 그런 최후의 발버둥마저 쉽사리 허락되지 않으므로.

한 권의 소설은 내가 알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하나 보여준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똑같은 하늘 아래에서 개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없게 된 이들의 이야기, 지금의 사회 초년 세대와 생생하게 호흡하는 인물들의 세계를 작가 이유는 담담하게 그려내었고 펼쳐보인다.

이 작품이 수많은 글들 속에서 최고의 작품으로 선정되고 수상할 수 있었던 이유는 거기에 있을 것이다.


소각의 여왕 - 제21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이유 지음, 문학동네(2015)


태그:#이유, #소각의 여왕, #문학의 동네 , #서평 , #북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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