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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30일 성남고령친화종합체험관에서 한국리빙랩네트워크(KNoLL, Korean Network of Living Lab)가 첫 모임을 가졌다. 2006년에 창립, 유럽 전역에 흩어진 400여 개의 사회혁신 기관들이 참여하고 있는 유럽리빙랩네트워크((ENoLL, European Network of Living Lab)에 견주려면 아직 가야할 길이 멀지만, 언젠가 어깨를 나란히 하겠다는 포부로 첫발을 내딛은 것.

앞으로 한국리빙랩네트워크는 사회혁신(Social Innovation)이라는 새로운 길을 가고 있는 한국의 혁신가들에게 든든한 울타리이자 동반자, 또 길라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한국리빙랩네트워크 출범을 계기로 오늘날 한국의 사회혁신이 어디쯤 와있는지를 돌아보려 한다. 첫 번째 순서로 1회 한국리빙랩네트워크 발표자로 나선 이화여자대학교 안과학 김윤택 교수를 이날(3월 30일) 발표가 끝난 뒤 만나 보았다. - 기자의 말

'안저카메라'라는 의료장비가 있다. 안저(眼底), 즉 눈알(안구)의 안을 찍을 수 있는 카메라다. 동공으로 눈알의 안을 들여다보았을 때 보이는 유리체, 망막과 혈관, 시신경유두 등을 찍어 이상이 있는지를 확인하는 데 쓰인다. 정밀한 사진을 얻어야 하는 만큼 가격이 매우 비싸 보건소를 비롯한 공공의료기관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게다가 소아나 장애인, 움직임이 불편한 노인의 눈을 찍으려면 고정돼있지 않은 휴대용 카메라가 필요한데 이런 장비는 더 비싸다.

이화여자대학교 안과학 김윤택 교수는 '값도 싸고 휴대도 가능한' 안저카메라 개발에 뛰어들었다. 가격은 기존 제품의 10% 밑으로 떨어뜨리면서도 진단에 어려움이 없을 만큼 선명한 사진을 얻는 게 목표다. 여기에 누구나 들고 다니며 사진을 찍을 수 있을 만큼 작고 가벼우면서 사용법도 간단해야 한다.

'한국형 적정기술'의 새로운 가능성

 안저카메라 1~3차 시제품
 안저카메라 1~3차 시제품
ⓒ 김윤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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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에서 온 의사에게 안저카메라 촬영·판독법을 가르쳐준 일이 있었는데, 그가 자기 나라에 돌아가서도 쓸 수 있을 만큼 값싸고 좋은 안저카메라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떠올렸다고 한다. 때마침 미래창조과학부에서 내건 '사회문제해결형 기술개발 사업(2014)' 공모를 접하게 되었고, 다행히 뜻있는 업체를 만나 응모에 나섰다.

나이지리아 의사를 만나 떠올린 생각이었지만 그런 장비가 필요한 건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다. 보건소와 보건지소에까지 널리 보급할 수 있을 만큼 값이 싸면서도 누구나 쉽게 촬영할 수 있는 안저카메라가 있다면 녹내장과 같은 안질환을 초기에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증상이 거의 없어 빠른 발견이 쉽지 않은 녹내장은 어느 순간 갑자기 시력을 앗아가는 병이다.

"녹내장은 안저카메라로 검진을 하면 약 1~2%, 그러니까 1만 명 중 100~200명에게서 이상이 발견된다. 적은 숫자가 아니다. 게다가 정기 검진이 필요한 당뇨의 유병율이 10%가 넘는다. 이 정도의 이상을 조기에 발견할 수 있다면 사회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노인과 장애를 가진 이들에게도 이 휴대용 안저카메라는 절실하다. 휠체어를 타고 병원을 찾는 이들이 안저카메라를 찍으려다 넘어져 다치는 일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휠체어에 앉은 채로, 또는 누워서도 찍을 수 있는 안저카메라는 그래서 필요하다.

"우리 사회 소외계층의 삶의 질 향상을 목표로 개발되는 '맞춤형' 기술로 사회적 약자가 이용하기에 적합한 기술."(정기철, 2010)  「적정기술의 동향과 시사점」

과학기술정책연구원의 정기철 연구원은 '한국형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을 이렇게 정의했다. 김윤택 교수가 만들려는 '안저카메라'는 '한국형 적정기술'의 좋은 본보기인 셈이다.

더 나은 해법을 찾아 나선 험난한 여정

이번 프로젝트의 목표는 값싸고 성능 좋은 '안저카메라'를 개발하는 일이다. 제품 개발이라는 구체적 목표가 있는 만큼 다양한 이해관계자를 포함한 많은 사용자들이 프로토타입(시제품)을 써보도록 하면서 이를 꾸준히 개선해나가는 게 실험의 큰 줄기다. 따라서 어떤 이해관계자들을 불러 모을 것인가, 또 이들의 의견을 어떻게 이끌어내고 제품 개발에 반영할 것인가 하는 점이 실험의 성패를 가를 주요 과제다.

먼저, 만들려는 안저카메라가 어느 정도의 기능을 갖추도록 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다. 김윤택 교수는 꼭 필요한 기능 말고는 다 빼기로 했다. 다행히 IT와 광학기술의 눈부신 발전 덕에 꼭 필요한 정도의 기술과 부품을 쓰면 비용을 크게 낮출 수 있을 것 같다는 결론을 얻었다.

"10억 원을 호가하는 최첨단의 안저카메라는 99.9%의 망막 관련 질환과 녹내장을 검진할 수 있다. 대개 임상에서 쓰는 안저카메라는 가격이 5천만 원에서 1억 원 정도인데 이런 장비로도 희귀병을 뺀 대다수의 질환, 그러니까 약 95%의 망막관련 질환과 녹내장을 검진할 수 있다. 우리가 만들려는 1000만 원대 카메라도 이 정도의 성능을 목표로 한다. 4~5%의 희귀병이 있다고 해도 단순 검진을 위한 모든 카메라에 100배나 많은 비용을 써야하는지에 대해서는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

 안저카메라 4차 시제품
 안저카메라 4차 시제품
ⓒ 김윤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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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한 기능을 결정하기 위해서 전문가 집단인 '한국망막학회'에 의견을 구했다. 이들이 안저 영상에 가장 익숙한 집단이자 기존 거치형 안저카메라를 사용해본 경험이 풍부한 집단이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실물 크기로 만든 모형을 보여주면서 의견을 들었고, 이를 반영해 CCD(전하결합소자) 크기를 1인치로 키우는 등 목표로 했던 기능을 손봤다. 그리고 이번엔 모형이 아닌 첫 시제품을 개발했다. 모형과 달리 일반 디지털 카메라의 비슷한 형태로 디자인해 사용자들이 더 익숙하게 받아들이도록 했고, 모형에 있던 디스플레이도 없앴다.

이 시제품을 검증하기 위해 3개 대학병원(일산동국대병원, 구리한양대병원, 이대목동병원)과 2개 안과의원(밝은안과21, 수원이안과) 그리고 1개의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원주의료사협)을 모았다. 카메라가 개발되면 보건소와 보건지소에까지 널리 보급을 하는 것이 목표인 만큼 이들 기관을 참여시키려 했으나 절차가 까다로워 실패했다. 다행히 원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이 참여함으로써 큰 힘이 되었다.

"다양한 이해관계자를 모으는 데 있어서는 결국 객관성과 보편성을 동시에 확보하는 게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의료 기관을 포괄하는 게 중요하다."

대학병원은 여러 안저 촬영 장비를 보유하고 있어 다른 장비와의 비교가 가능하고, 안과의원은 많은 환자를 상대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숙련도가 높아 촬영 경험을 공유할 수 있고 시장성을 평가하기에도 좋다.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은 대부분의 보건소·보건지소처럼 안과 전문의가 없다는 점에서 비숙련자의 사용 경험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각 의료기관마다 시제품이 사용하기에 적합한지, 영상의 질은 진단하기에 충분한지, 사용하는 데 어려움은 없는지, 쉽게 익힐 수 있는지, 또 기존의 카메라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 등을 검증했다. 기관별로 50회 정도씩 사용하도록 한 뒤 웹사이트에 촬영한 영상을 올리도록 했다.

'사용자와 함께 만들기', 리빙랩의 가치를 깨닫다

"처음엔 '리빙랩'이 뭔지도 몰랐지만, 미래부에서 이게 꼭 필요하다고 해서 그냥 요식행위로 넣을 생각이었다. 안저카메라에 대해서 내가 제일 잘 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내 생각이 틀렸다."

김윤택 교수도 처음엔 리빙랩을 '사용후 평가' 정도로 생각했다. 자기 전문성에 대한 자신감도 있었다. 그런데 이번 리빙랩 프로젝트로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정보들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같은 카메라로 찍더라도 숙련도에 따라 촬영한 영상의 질에 큰 차이가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숙련자가 찍은 영상은 약 82%가 판독 가능했으나, 비숙련자가 찍은 영상은 겨우 절반인 52%만이 가능했다. 이는 카메라의 성능을 개선하는 일만으로는 해결할 없는 문제이자 숙련자가 없는 보건소·보건지소에 카메라를 보급하려면 꼭 넘어야 할 벽이었다.

"당뇨 환자는 증상이 없더라도 매년 망막 검사를 해야 하지만 10%만 검사를 받는 게 현실이다. 소득이 낮은 지역일수록 이미 치료가 힘들 정도로 당뇨 합병증이 진행된 환자가 많다. 보건소나 의료사협에 이 카메라를 구비하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차 검증이 끝난 뒤 비숙련자를 위한 별도의 매뉴얼과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고, 판독이 가능한지 여부를 가릴 수 있는 지표도 개발하기로 했다. 리빙랩이 없었다면 생각하지 못했을 것들이다.

 안저카메라 시제품으로 안저를 촬영하는 모습
 안저카메라 시제품으로 안저를 촬영하는 모습
ⓒ 김윤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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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어려웠던 일은 사용자들이 의지를 가지고 참여하도록 만드는 일이었다고 한다. 그는 무엇보다 신뢰를 쌓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신뢰를 쌓기 위해 그는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관계자들이 안과 질환에 대해 문의를 해올 때마다 성심성의껏 답을 해주었고, 이런 과정을 거쳐 서로 신뢰가 쌓여가자 그들도 단순 참여자를 넘어 함께 개발을 해나가는 동반자로서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 서로에 대한 믿음이 상호작용을 일으켜 서로가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2015년 11월에 시작한 프로젝트는 벌써 네 번째 시제품을 만들어냈다. 이번 포럼에 들고온 시제품은 첫 번째 것과 견줘 겉보기부터 많이 다르다. 그만큼 많이 손을 봤다는 뜻이다. 하지만 김 교수는 아직 더 손을 봐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리빙랩이라는 게 계속 의견을 들어 개선해가는 과정이다. 제품의 연구 개발 취지와 방법을 이해하는 특정 집단을 대상으로 '클로즈드 베타테스트(Closed Beta test)'를 계속 돌리는 거다. 외형은 물론 소프트웨어도 계속 개선해갈 것이다. 아직 완성되려면 멀었다."

리빙랩 실험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김윤택 교수는 '팀워크'를 꼽았다. 여러 팀이 같이 하는 일인 만큼 갈등은 필연적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제조사 입장에서는 '목업(mock-up, 실물크기의 모형)'을 최소한으로 만들어서 하루라도 빨리 상업화를 시키는 게 중요하다면, 의사인 자신의 입장에서는 더 많은 요구를 계속 반영하고 싶어 할 수밖에 없다는 것.

"모두가 같은 길을 가고 있다는 생각이 아니면 쉽지 않은 일이다. 또 이익을 내야 하는 기업과 필요를 실제로 충족시키고 싶어 하는 의료계 사이에서 그 차이를 어떻게 조율할 것인가가 관건이다."

그는 참여해준 기업에게 고마움을 전하기도 했다. 완성된 안저카메라 한 대의 가격을 1,000만 원으로 잡아도 한국에서는 많이 팔아야 100~200대를 팔 수 있을 정도로 시장이 작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러니까 한국에서 거둘 수 있는 총매출은 최대 20억 원인데 2년이 넘는 개발기간과 비용을 생각하면 기업이 선뜻 참여하기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부개발원조(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 참여도 추진해볼 생각이다. 앞서 만났던 아프리카 나이지리아 같은 나라에 안저카메라를 지원하고 판독도 해주는 체계를 만들어 보는 게 궁극적 목표다.

사회혁신을 위해 먼저 혁신해야 할 것들

안저카메라를 보건소에까지 보급하려면 사진을 판독할 수 있는 안과 전문의도 필요하다. 하지만 현재의 의사 수나 예산으로는 모든 보건소에 안과 전문의를 배치할 수 없다. 따라서 다른 곳의 안과 전문의가 대신 판독을 해주고 어느 정도의 비용을 받도록 하는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문제는 제도다. 현재로서는 장비를 들여오는 것 말고 판독을 하는 데 쓸 예산은 항목조차 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 발 더 나아가, 그는 사회복지사도 안저카메라를 쓸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이 역시 현재는 법으로 막혀있다. 의료행위로 간주돼 의사와 간호사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사회복지사가 저소득층 노인을 비롯해 의료 사각지대에 놓인 계층을 직접 찾아다니며 촬영을 할 수 있게 되면 사회적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사회복지사들이 촬영한 영상을 판독하는 일은 공중보건의사들에게 맡겨야 하는데, 그러려면 보상이 이뤄질 수 있도록 역시 제도를 손 봐야 한다.

"사용자의 필요를 잘 반영해 좋은 제품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제품이 더 잘 쓰이도록 하려면 실험 단계에서 법과 제도에 대한 컨설팅도 필요하다. 행정과 법에 대해 도움을 줄 수 있는 전문인력이 있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김윤택 교수는 여러 분야의 전문가와 엔지니어를 잇는 '기술거간꾼'이 필요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는 자신이 "안과의사이면서 '기술 거간꾼'이기도 하다"며, "양쪽을 잇는 다리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엔지니어들이 의사에게 새로운 기술을 소개하면 의사들은 대개 '신기한 기술이긴 한데 이걸 어디다 쓰냐'고 묻고, 반대로 의사들이 엔지니어에게 필요한 기술을 물으면 엔지니어들은 '이렇게 간단한 걸 왜 아직도 안 만들었냐'고 되묻는다. 만날 일이 없다보니 그만큼 서로의 일에 대한 이해가 떨어지는 거다."

의사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기술의 발전은 어디쯤 와있는지를 서로가 알면 얼마든지 세상이 필요로 하는 새로운 것들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모든 실패가 다 소중하다"고 말하는 사회혁신가 김윤택의 안저카메라는 2017년 10월쯤 세상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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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장지혜 기자 입니다.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기보다는 세상으로 바람을 날려보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