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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됐습니다. 이제는 '새로운 나라'에 대해 이야기할 때입니다. <오마이뉴스>는 '내가 살고 싶은 나라, 내가 꿈꾸는 국가'에 대한 각계각층의 목소리를 대선 기획 '100인의 편지'를 통해 전하고자 합니다.

이번 기획은 '열린 기획'으로 시민기자 누구나 참여할 수 있습니다. 차기 정권에 하고 싶은 말, 바라는 바에 대해 적어 기사로 보내주세요. '이게 나라냐'는 탄식을 넘어 '이게 나라다'라는 새로운 지향점을 여러분과 함께 열어나가겠습니다. [편집자말]

* 시각장애인 조현대씨의 주장을 그의 활동보조인 이지연씨가 옮겨 적은 글입니다.
 

갓 태어난 아기는 누군가의 보호없이 살 수 없다. 혼자 걷지 못함은 물론 음식도 먹을 수 없다. 형체와 소리도 쉽게 분간해내지 못한다. 부모의 도움을 받아 청장년기에 접어들어서야 독립이 가능하다.

그러다가 노화가 시작된다. 서서히 귀가 어두워지고 시야가 흐려진다. 다시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밥도 먹을 수 없다. 갓난아기의 상태로 되돌아가면서 서서히 죽음에 이른다. 우리는 신체 기관이 미성숙하거나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을 '장애'라고 말한다. 이에 따르면 우리는 장애인으로 태어났다가 장애인으로 생을 마감하는 셈이다. 세상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이치다.

필자는 시각장애인이다. 현재 서울의 한 장애인자립센터에서 중증장애인 독려상담을 한다. 내가 장애인 복지에 관심이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독려상담에서 복지제도에 대한 문의가 많아서다. 무엇보다 장애인 복지는 내 삶의 질과 연관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는 내가 장애인 권리 개선에 대한 관심을 넘어 직접 행동으로까지 나서게 했다.

나는 국가인권위원회에서 4년 동안 '장애인차별예방 모니터링단'으로 활동했다. 기업이 주주총회 소집 때 시각장애인에게 점자 자료를 제공해야 한다는 소송을 내 승소한 적도 있다. 그러나 장애인이 인간다운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여전히 개선돼야 할 점이 많다. 장애인 복지와 관련해 차기 정부가 해결해야 할 의제를 두 가지 제시하려 한다.

공약(公約)과 공약(空約)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광화문공동행동'의 서울 광화문역 농성장. 이들의 요구사항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었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그 사이 복지 사각지대 놓인 장애인의 사망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광화문공동행동'의 서울 광화문역 농성장. 이들의 요구사항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었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그 사이 복지 사각지대 놓인 장애인의 사망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 손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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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빈곤 문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부양의무제'가 폐지돼야 한다. 장애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 문제다. 그러나 현재 부양의무제로 수많은 장애인이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가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수급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다. 가족구성원이 연락을 끊고 외면해도 주민등록등본상 존재한다는 이유로 수급대상에서 제외된다.

이는 장애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2014년 복지욕구 실태조사에 따르면, 부양의무자가 있다는 이유로 수급자에서 탈락한 빈곤층이 전국적으로 115만 명에 이른다. '송파 세모녀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은 비참한 하루를 보낸다. 한국에서 돈이 없으면 모든 생활은 정지되기 때문이다.

필자도 2010·2012·2014년에 기초 생활 수급을 신청한 적이 있다. 그러나 부양의무자에 저촉돼 수급받지 못했다. 당시 주민 센터와 구청 소속 관계자와 여러 차례 상담했다. 사회복지과장을 비롯한 여덟 명의 공무원과 두 시간 동안 난상 토론도 해봤다. 하지만 뾰족한 방법은 나오지 않았다. 끝내 빈곤 문제 연구소를 찾아가 구제를 요청했으나 마찬가지였다. 장애인, 노인을 포함한 사회소외계층이 주민 센터에서 복지 혜택을 신청할 때 공무원들이 불친절하게 응대하는 경우가 많다. 이 과정에서 받은 모멸감은 아직도 잊기 힘들다. 

다행히도 최근 대선주자 거의 대부분이 '부양의무제 폐지'를 공약화했다. 이재명 시장, 심상정 정의당 대표, 유승민 바른정당 의원은 일찌감치 부양의무제 폐지를 선언했다. 그동안 말을 아껴왔던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22일 부양의무제 폐지를 약속했다. 안희정 충남지사는 '단계적 폐지'를 약속했고 안철수 국민의당 전 대표도 폐지를 공약했다.

반가운 소식이지만 우려되는 부분이 없지 않다.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대통령도 '부양의무제 폐지'를 약속했지만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둘째, 자립 문제다. '개인예산제'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 2011년 10월부터 우리나라에 '장애인 활동지원 제도'가 도입됐다. 혼자서 일상생활을 하기 어려운 중증 장애인에게 활동지원인력을 제공함으로써 자립생활을 돕는다. 이때 지역구별 장애인자립센터가 장애인과 그의 생활을 지원하는 활동보조인을 연결해준다. 자립센터를 통해 활동지원 금액이 활동보조인에게 제공된다.

그런데 활동지원금에서 중개기관이 가져가는 수수료가 많다. 이렇게 되면 제공인력에게 합당한 금액을 지불하지 못하기 때문에 장애인이 충분한 서비스를 요구하기 어렵다. 가급적이면 개인예산제를 통해 장애인이 활동지원금을 제공인력에게 직접 지급할 필요가 있다.

개인예산제는 개인의 욕구충족을 위한 예산범위가 정해지면 장애인이 예산에 대한 통제권을 갖는 제도다. 이는 지원항목이 미리 정해진 기존 시스템과 대비된다. 장애인이 능동적으로 자신의 삶을 설계할 수 있도록 보장하기 때문이다. 장애인은 지급받은 예산으로 학원수강, 취미활동 등 자신이 원하는 서비스를 직접 구매할 수 있다. 이는 현실성 없는 이야기가 아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영국과 미국은 개인예산제를 도입해 실행하고 있다.

장애인 정책은 내수 경제 활성화 공약이다

지난해 12월 대구시가 2017년 예산을 책정하면서 장애인 복지예산을 동결하거나 축소하자, 장애인단체가 대구시청 앞에서 규탄 집회를 열었다.
 지난해 12월 대구시가 2017년 예산을 책정하면서 장애인 복지예산을 동결하거나 축소하자, 장애인단체가 대구시청 앞에서 규탄 집회를 열었다.
ⓒ 조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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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양의무제를 폐지하고 개인예산제를 도입하는 것은 장애인에게만 이로운 포퓰리즘 정책이 아니다. 사회적 활력을 되살리는 성장 정책이 될 수 있다. 일부에서는 부양의무제를 폐지하면 연간 10조의 추가예산이 들어간다며 반대한다.

그러나 생각을 바꿔보자. 부양의무제 폐지는 서민경제를 살리는 방안이 될 수 있다. 저소득층의 증가된 소득은 자산투자 등이 아닌 민간소비로 곧장 이어지기 때문이다. 기초생활수급자가 생필품 구매에 지출을 늘리는 자체가 동네 골목상권을 살리는 길이다. 저소득층의 소득상태가 개선되면 내수를 기반으로 한 지속적인 성장이 가능해진다. 저성장 시대에 유럽선진국이 소득 주도 성장에 주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장애인의 빈곤과 자립 문제에 대해 차기 대통령이 더 많은 관심을 갖고 개선해주길 기대해본다.


태그:#부양의무제 폐지, #개인예산제, #기초생활수급, #장애인 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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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둠 속에서도 색채있는 삶을 살아온 시각장애인이다.

'좋은 사람'이 '좋은 기자'가 된다고 믿습니다. 오마이뉴스 정치부에디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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