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책 <독서 만담>을 낸 계기로 라디오 방송에 출연했다. 섭외를 받고 출연료가 나오는지 방송 출연이 잦은 지인에게 확인했다. 이미 몇 권의 책을 낸 나는 프로작가이니까 당연한 순서다. 작가님이 미리 준 질문지에 답안을 작성했다. 온종일 연구를 해서 내 책의 콘셉트에 맞게 유머코드를 대폭 장착했다. 예행연습도 했다. 교사를 하면서 공개수업을 해본 경험도 많으니 방송쯤이야 잘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완벽한 방송을 위해서 서울에 일찍 도착한 다음 아지트인 출판사 사무실에서 리허설을 하기로 했다. 나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출판사 사무실에서 직원들과 만담을 주고받느라 모범 답안지를 확인할 틈도 없이 방송국으로 출발해야 했다.

출판평론가 김성신 선생님과<독서만담>의 편집자 오효영님이 고맙게도 로드매니저 역할을 해주었다. 어린 시절 숫기가 없어서 동네 이발관에도 혼자 가지 못한 나를 데리고 가주고 기다려 주신 아버지가 생각났다.

나는 촌놈이 아니니까 방송국에서 만난 연기자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나도 엄연히 방송 출연자니까 말이다. 라디오 스튜디오이지만 규모가 제법 웅장해서 놀랐다. 피디님과 작가님이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편안하게 맞아주어서 낯선 곳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사회를 보는 분과 인사를 주고받은 다음 착석을 했다. 피디와 작가분은 나를 프로 출연자라고 인정을 했는지 특별히 사전 교육이 없었다.

그분들의 기대에 걸맞게 나는 고정 출연자처럼 여유 있게 커피를 들고 마이크 앞에 앉았다. 사회자분은 대본을 충실히 읽는 것으로 방송을 시작했다. 나도 작성해온 모범답안을 말하면 될 일이었다. 방송이란 거 별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참에 고정 출연 프로그램을 알아봐야 하는 것은 아닌지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실전은 달랐다. 예상된 질문인데도 나의 발음은 새기 시작했고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헛갈리기 시작했다. 내 옆에 누군가 다른 사람이 대신 말을 하는 기분이다. 간신히 첫 질문에 대한 답변을 마쳤는데 진행자분이 예상 질문 순서를 지키지 않고 질문을 던진다.

나는 피의자가 되었고 진행자분은 검사가 되었다. 피의자는 모른다,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하면 되는데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질문 순서가 뒤죽박죽으로 쏟아지기 시작했고 '진행자분 살려주세요'라고 외치고 있었다.

예정된 질문을 할 때는 원고만 보고 읽으시던 진행자분이 즉흥적인 질문은 나를 또렷이 응시하면서 진술을 요구하셨다. 밖에서는 큰소리치다가 검사실에 끌려가면 술술 불게 된다고 하던데 예상치 못한 질문에 머리가 공백이 되었다. 차라리 내가 지은 죄가 있어서 범죄의 진상이라도 술술 불었으면 좋았겠다.

<독서 만담>은 웃기는 책이다. 웃기고 싶은데 진행자분은 웃길 틈을 주지 않는다. 간신히 아내와의 '예송 논쟁'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아내가 차례상을 차릴 때 큰 대접 한 곳에 송편을 차례상에 올리자고 하던데 그러면 조상님들이 우르르 둘러앉아서 회식을 하라는 말이냐'고 했다는 말로 진행자분을 웃기는 데 성공한 것이 위안거리였다.

기쁨도 잠시 진행자분은 <독서 만담>에 언급된 많은 책 중에서 하필이면 '존엄사'에 관한 책을 집중 공략하지 시작했다. 난 웃기러 왔는데 '죽음'에 대한 토론이 시작되었다. 아버님의 별세에 관해서 이야기 해야 했고, 어머니의 병환에 대해서 의견을 제시해야 했다.

급기야 노인과 의료 복지에 관한 사회 비평에 대해서 의견을 개진해야 했다. 웃기고 싶었다. 나의 소망에도 불구하고 죽음과 노인의 복지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니 내가 쓴 책이 '현대사회와 노인의 문제'에 관한 것은 아닌지 착각하게 되었다.

진행자분이 교수님이라더니 내가 공부를 하지 않은 부분을 정확히 파악하셔서 질문하셨다. 그 질문에 대해서는 또 다른 내가 나타나서 무슨 말인지도 모를 답변했고 나는 방청객이 되었다. 불굴의 의지로 '재미'를 추구한 나의 노력이 얼마나 발휘가 되었는지는 방송을 들어 봐야 하겠다.

방송은 끝났다. 골프 라운딩을 갔는데 티샷이 연못으로 빠졌고 다시 한번 기회를 달라고 캐디에게 애원하는 심정이 되었다. 아쉽게도 '그만하면 충분하다'고 하셨다. 워낙 노련한 분들이니 그 분들의 말을 위로 삼았다. '편집의 힘'도 의지가 되었다.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 커피잔을 들고 스튜디오 밖으로 나왔다. 발음에 대한 걱정을 말씀드렸는데 '시청자 모두가 내가 경상도 사람임을 충분히 인식했을 테니' 그만하면 충분하단다.

스튜디오에서 마시지 못한 커피를 냉수 마시듯이 원샷을 하고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출연료를 지급 받기 위한 인적사항을 기재하는데 계좌번호는 특별히 심혈을 기울여서 또박또박 적었다. 다음 차례의 작가 한 분이 스튜디오로 입장했다. 그분에게 부디 신의 가호가 있었기를 바란다.


태그:#독서만담, #박균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