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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아침! 또 새롭게 시작된 한 주도 힘차게 보내.'

월요일 아침 힘내라며 친구가 보내준 문자메시지에 답장을 해 주려는데 갑자기 걸려온 전화로 화면이 넘어가 버립니다. 그리곤 저편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목소리. 우리 엄마십니다.

"야, 너 전화 받을 수 있어? 나 일 났는데.."

70세가 넘은 울 엄마는 왠만해선 아침에 다른 사람에게 전화를 하지 않으십니다. 아침 일찍 전화하는 그건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라서 그런다고 다 남을 배려해서 그런다고는 하십니다. 실은 본인이 가장 행복한 시간인 조반 먹고 커피 한 잔 옆에 두고 즐기는 아침 연속극 시간을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 만드신 자기만의 규칙인듯 싶습니다. 그런 엄마가 급하게 전화를 한 건 정말 급한 일이 생긴 것입니다. 

"응. 받을 수 있어요.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야, 글쎄 거실에 있는 테레비가 안나온다."
"엄마, 안방에도 하나 있잖아요?"
"아니, 그건 니 아부지가 뉴스 봐야 하고."

아, 큰일이 난 겁니다. 그것도 채널을 바꿔가며 아침드라마를 연이어 봐야 할 이 피크시간대에 고장이라니.

"그 TV 오래 돼서 그런가 보다. 내가 한 번 알아보고 빨리 주문할 수 있음 해 볼게요."

일단 전화를 끊고, 아침에 회의가 있다며 일찍 나간 남편에게 카톡으로 연락하고 간단하게 인터넷으로 TV를 찾아봅니다. TV 산 지가 한참돼서 뭐가 좋은지도 모르겠고, 무슨 종류가 이리도 많나 싶어 헤매는 사이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응? 거실 거래? 그럼 그냥 어른들 보실 거라도 조금 커야 되잖아. 40인치면 될래나? 사서 주말에 내려간다고 전화 드려."
"40인치? 그게 얼만데?"
"한 사십에서 오십만 원 정도로 맞추지 뭐."
"뭐? 아이구 아저씨, 사오십이 무슨 누구네집 과자값이야?"
"으이구, 뭐 그러냐? 맨날 사드리는것도 아니구."

월요일 아침 댓바람부터 TV 사야 한다고 연락했는데 즉각 사서 내려가자고 흔쾌히 알아보는 남편이 기특하고 고맙기는 하지만, 늘 그렇듯이 가격부문에서 주춤거리는 사이 다시 엄마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야, 됐다. 됐어. 니 아부지가 자전거 타고 시내 가서 알아본다고 하더니. 지금 와서 연결시켰는데 아주 잘 나온다."
"우와, 벌써? 근데 얼마래요?"
"응? 6만원. 아주 싸게 사왔네."

몸통이 뚱뚱한 구형 텔레비전
 몸통이 뚱뚱한 구형 텔레비전
ⓒ pixabay(Tomasz Mikołajczy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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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울아버지 왠일이십니까?

울 엄마가 TV 고장을 자식들에게 알리며 SOS를 요청하시는 사이, 아버지는 중고를 알아보겠다고 재빨리 자전거 타고 나가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잠시후, 그냥 알아보고 오나 싶었는데 이건 왠걸 아버지가 가게 주인이 직접 모는 용달차에 자전거와 TV를 싣고 조수석에 편히 앉아 오셨다고 합니다.

그리곤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들어오셔서 앞으로 나온 아버지 배 만큼이나 멋들어지게 뒤로 나온 배를 자랑하는 '브라운관 TV'를 거실에 턱하니 내려놓고 연결까지 말끔하게 해 놓으셨다고 합니다.

"엥? 6만 원? 혹시 엄마, 그 TV 뒤에 뚱뚱하게 배 나온 거야? 옛날 것처럼?"
"그래, 너 어떻게 알았어? 뒤에 뽈록하게 나온 거 그거야. 니네 쓰는 컴퓨터 화면보다 좀 작겠네. 근데 어떠냐. 곧잘 나오네."

연속극 시청의 황금시간대를 놓쳐 목이 말랐던 울엄마는 TV가 다시 나오기 시작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쁘신지 좀 전과는 다른 흥겨운 목소리로 대답하셨습니다. 뚱뚱한 거면 옛날 브라운관 TV인데, 아무리 싸도 그건 좀 그렇다. 그리고 크기도 작지 않냐 등 여러가지로 여쭤보자 그제야 아버지께,

"여보, 근데 이거 몇 인치냐구 하는데?"

라고 물으십니다. 순간 의기양양하시던 울아버지 목소리 급 변하시며,

"에이, 몰라. 기껏 사왔더니, 에이."

하고 소리지르며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전화기를 통해서 목소리로만 듣는데도 그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집니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엄마는 웃으시며 당분간 새 TV는 아예 사올 생각도 말라며 엄포를 놓으셨습니다.

"그래도 니 아부지 나 보라구 잽싸게 올라가서 사다놨는데, 니들이 작으니 뚱뚱하니 뭐라고 하니까 기분 나빠져서 요 앞에 나갔잖아. 다들 주말에 암 소리도 하지 마. 그냥 좋다구 하구 와서 테레비 봐야 한다. 알았지?"

월요일 아침의 뜬금없는 TV소동은 이것으로 종료되었습니다. 다급한 목소리만큼이나 분초를 다퉜던 TV사건 때문에 월요일 아침이 조금 정신 없었지만 저의 한 주는 다른 어느 월요일보다 기분 좋고 신나게 출발했습니다. 그리고, 엄마도 내일 아침부터는 달달하게 탄 믹스커피 한 잔을 손에 들고 그 조그맣고 뚱뚱한 TV 앞에서 연속극을 보시며 즐겁게 한주를 지내실 겁니다.

그런데 딱 한 가지가 남았습니다. 

중고 명품TV를 사서 배송에 설치까지 깔끔하게 해 놨는데도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다며 삐지신 울아버지 기분 말입니다. 그래서, 이번 주말 그 조그맣고 뚱뚱한 TV를 보러 갑니다. 

울아버지가 오직 엄마만을 위해 준비한 명품 중고 브라운관 TV가 어떤 건지 잘 나오는지도 보고, 삐치신 울 아버지 기분도 풀어드릴겸 말입니다. 추억을 더듬으며 작은 화면 앞에 아이들과 함께 모두 모여 주말연속극 즐겁게 보고 오겠습니다.


태그:#브라운관 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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