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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명이 죽고, 17명이 중상을 입었던 여수외국인보호소 화재 참사가 지난 2월 11일로 10년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보호소 시설은 변한 게 없고, 이주노동자들의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보는 사회의 시선 역시 변한 게 없다. 이런 현실 속에서 이주노동자와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그간 가까이서 지켜봤던 피해자들 이야기를 정리하고자 한다. 국내에서 사망한 이주노동자들과 그 친구들의 이야기다. - 기자 말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는 것조차 눈치를 봐야 하고, 가슴에 응어리진 것을 풀어내려고 소리 내어 우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 세상이 무섭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슬픔을 표현할 기회를 차단당한 채 동공이 풀린 사람들을 볼 때면 가슴이 미어지며 분노가 치민다. 슬퍼할 시간도, 여유도 허락하지 않는 사회에 대해 시인 노혜경은 '슬퍼할 권리'를 되찾고 싶다고 했다.

슬퍼할 권리를 되찾고 싶어
잔잔하게 눈물 흘릴 권리 하며,
많은 위로를 받으며 흐느껴 울 권리
핑핑 코를 풀어대며 통곡할 권리
지나친 욕심일까―그러나 울어 보지 못한 것이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다

-중략-

그러니 누가 나를 좀 안아 다오
그 가슴을 가리개 삼아 남의 눈물을 숨기고 죽은 듯이 좀 울어 보게
                                           <노혜경-슬퍼할 권리>

이 땅에서 죽은 동료를 보낼 때마다 이주노동자들은 '슬퍼할 권리'를 빼앗겼다. 가해자, 기업주, 정부와 공공기관 관계자들은 이주노동자의 권리와 편의를 위한 일에는 굼뜨기가 굼벵이 같았다. 반면, 사망사고가 나면 전광석화 같은 업무처리로 모두의 혀를 내두르게 했다. 논란이 될 만한 사건일수록 일처리는 빨랐다. 마치 아무런 사고가 없었던 듯이 가해자들이 일상으로 돌아가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와 달리 '이주노동자에게 슬퍼할 권리를 달라'는 호소는 별스런 요구로 치부되었다. 돈 벌러 온 사람에게 슬픔은 사치스런 감정이라는 듯이 말이다.

천안함 구조 활동 이주노동자 빈소, 영정사진도 없었다

2010년 4월 2일 오후 8시 30분, 천안함 수색을 마치고 귀항하던 금양 98호가 캄보디아 국적 '타이요(Taiyo)호'와 충돌해 침몰한다. 그 사고로 한국인 선원 7명과 인도네시아 선원 람방(Lambang, 1975년생), 유숩(Yusuf, 1975년생)이 사망했다.

사고 발생 후 일주일 조금 지난 4월 11일, 한 무리의 인도네시아 이주노동자들이 시신이 안치된 송도 가족사랑병원 장례식장을 찾았다. 빈소는 입구부터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정치인들이 보낸 근조 화환들로 가득 메워진 것과 달리 찾는 사람은 없이 썰렁했다. 바닷바람에 탄 구릿빛 얼굴 가득 자글자글한 주름으로 얼핏 보아도 뱃사람임을 알 수 있는 사람만 몇몇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인도네시아 출신 이주노동자들이 일요일을 맞아 조문을 갔다.
▲ 천안함 수색 중 침몰한 금양호 선원 조문 인도네시아 출신 이주노동자들이 일요일을 맞아 조문을 갔다.
ⓒ 고기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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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르르 몰려든 인도네시아인들이 조문을 왔다는 말에 빈소를 지키던 사람들은 예상도 못했다는 듯이 당황해 했다. 조문객들 역시 언론에서 떠드는 것과 달리 썰렁한 빈소에 쭈뼛쭈뼛 서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서로를 지켜보는 시간이 길게만 느껴졌다. 그때 누군가가 "아이고 어쩌나! 영정 사진도 없는데…그나저나 한국 사람도 찾지 않는데 어려운 발걸음 하셨네" 하며 들어오라고 권했다.

한국인 빈소는 영정 사진을 덮을 정도로 많은 근조 리본이 입구부터 벽면까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반면, 인도네시아 선원 희생자들의 영정이 치워진 자리는 전등마저 꺼져 있었다. 술잔을 기울이던 사람들은 고인을 찾아온 조문객들에게 미안해하며 자리에 앉을 것을 권했다. 반면, 건장한 체격의 남자들 몇이 분주히 움직이며 어딘가로 연락을 하더니, 관할 경찰이라며 동석을 요구했다. 책임자로 보이는 사람은 조문객들에게 고인과의 관계를 물은 후, 영정 사진이 없는 이유를 둘러댔다.

"대사관 도움을 받아 이틀 전에 시신을 인도네시아로 보냈습니다. 꽃도 시들고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해서 치웠습니다." 

유해 송환이 됐다는 이유로 영정 사진을 치워버렸다는 말에 인도네시아 이주노동자들은 허탈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은 출발하기 전에 대사관에 연락해서 어떻게 조문할 수 있는지를 확인한 상태였다. 하지만 고인에게 '잘 가라'는 말 한 마디 못하고 돌아서야 했다.

이주노동자들은 경찰이 '대사관 도움'을 받았다는 말에 너나없이 실소를 금치 못했다. "언제부터 대사관이 그렇게 빨리빨리 움직였어." 자조 섞인 푸념과 함께 조문객들은 유해 송환을 핑계로 영정 사진을 재빠르게 치워버린 경찰의 처사가 얄밉다고 했다.

"우리는 평일에 조문할 수 없잖아요. 경찰들도 그런 거 다 알잖아요. 아무도 찾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건가요? 대사관에서 아무 말 없었다니…." 

이주노동자들이 빈소를 찾았다가 허탈함만 더했던 날도 언론은 천안함 관련 뉴스를 쏟아냈다. 하지만 힘없고 가진 것 없는 두 이주노동자의 죽음은 조용하게 묻혔다. 하물며 고인들과 일면식도 없었던 이주노동자들이 슬픔을 같이 할 기회마저 차단당한 소식은 뉴스거리가 되지 않았다. 같은 나라 사람이고, 같은 처지의 이주노동자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슬픔을 나누려 했지만, 경찰과 대사관은 조문 기회를 빼앗아 버렸다. 힘 있는 사람들은 이주노동자들이 슬퍼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처럼 사고를 일사천리로 처리해 버렸다.

함께 하는 모든 사람, 이주노동자는 '빼고...'

2015년 5월 14일, 평택 포승공단에 위치한 P공장에서 폭발사고가 발생했다. 사고는 폐알루미늄을 녹이던 용광로가 폭발하면서 일어났다. 이 회사는 알루미늄이 포함된 고철을 분쇄해 소규모 용광로에서 녹인 뒤 순수 알루미늄을 추출하는 공장이었다.

이 사고로 당시 용광로 앞에서 작업을 하던 네팔 출신 이주노동자 두 명이 전신화상을 입었다. 둘은 응급처치 후 곧바로 서울한강성심병원으로 이송됐지만, 유명을 달리했다. 당시 둘의 나이는 26세와 39세였다.

용광로 폭발 현장에 경찰이 출입통제선을 설치했다.
▲ 폭발사고 현장 용광로 폭발 현장에 경찰이 출입통제선을 설치했다.
ⓒ 소방본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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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과 소방당국이 사고 경위를 조사하는 동안 회사는 곧바로 사고 수습에 들어갔다. 먼저 소방본부의 화재 사고 보도 이후 화재 원인 조사를 핑계로 사고 소식이 언론에 더 이상 노출되지 않도록 최대한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철저하게 사고 피해자들의 상태가 외부에 알려지지 않도록 신경 썼다.

그 결과 외부에서는 사망한 이주노동자들의 유해가 네팔로 송환되고 나서야 사망 사실을 겨우 알 수 있었다. 평택에서 공장 폭발로 네팔 출신 이주노동자들이 화상을 입었다는 소식에 귀를 기울이던 네팔 이주노동자들이 분통을 터트렸다. 이주노동자들은 단지 같은 나라 사람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심정적으로 동질감을 느끼며 아픔을 같이 하려는 경향이 있다. 특히, 죽음일 경우에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나 몰라라 하는 법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P공장의 처사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병문안은 못했지만 조문이라도 했을 텐데, 사망 사실조차 숨기고 유해를 송환시켜 버리다니, 그럴 수 있느냐! 우리가 장례식에 간다고 행패를 부릴 것도 아니지 않느냐!" 

관련단체들은 사고 이후 네팔 이주노동자들의 성화에 사고 피해자들의 상태에 촉각을 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유해 송환 전까지 회사나 경찰을 통해 알 수 있었던 사실은 사고 피해자들의 상황이 아니었다. 알루미늄 선별기가 파손되고 분쇄 장치 앞에서 기계 폭발음이 울린 후 사고가 났다는 정도의 사고 목격자 진술이 확보되었다는 사실이 전부였다.

P공장은 '사람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는 경영이념을 내세우고 있다. P공장을 관할하는 회사 대표는 '함께 하는 모든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기업, 함께 하는 사람들의 행복을 지켜주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기업'을 만들겠다고 밝혀왔다. 이 회사는 전국에 몇 개의 공장을 갖고 있는 건실한 중견기업으로 "인류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국내 제일의 친환경 리사이클링 전문기업'이라고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용광로 폭발로 두 명의 네팔 이주노동자가 죽었을 때 보여준 모습은 그들이 내세우는 것과 전혀 달랐다. P공장 관계자는 모든 일을 비밀스럽고 신속하게 처리해 버렸다. 유해 송환 전에 유가족을 초청했는지, 보상 절차는 어떻게 됐는지 등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지역 언론에서 단신으로 네팔 이주노동자들의 사망 소식을 전하자, '유해도 송환되어 마무리된 사건이니 홈페이지에서 기사를 내려 달라'고 노골적으로 요구할 정도였다. 회사 이미지를 포장하기 위해 무고한 이주노동자의 죽음을 감추려고 집요하게 노력했다.

그들은 '함께 하는 모든 사람'에서 '이주노동자는 빼고'라는 말을 감췄다. 이주노동자들도 '함께' 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똑같이 행복을 지켜줄 직원으로 보지 않았다는 점에서 P공장은 '함께'라는 말을 오용했다. '함께' 라는 말의 아름다움을 모독했다. 이주노동자 목숨도 귀한 목숨이요, 그 유가족의 슬픔도 함께 껴안아야 할 슬픔이라는 사실을 외면했다. 먼 이국땅에서 함께 슬퍼하고자 했던 이주노동자들의 동포애마저 짓밟아 버렸다.

유해 송환을 서두르지 않는다고 누구 하나 생떼를 쓴 것도 아닌데, 빨라도 너무 빨랐다. 쥐똥만큼의 눈물 흘릴 시간마저 허락하지 못할 만큼 이주노동자 목숨이 하찮은가? 이주노동자 목숨도 귀한 목숨이다. 죽은 자도 말하고, 산 자도 말한다. 통곡할 권리를 허락하라고, 아니 흐느낄 기회라도 달라고….

[죽음을 기억하는 방법 ⑥] 한국인과 이주노동자, 무엇이 그리 다르단 말입니까?



태그:#이주노동자, #죽음, #천안함, #차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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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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