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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발표만 시키면 울어서 6년 동안 구연동화를 배웠다. 커서는 뮤지컬 대본 쓰는 일을 했다. 그랬는데 아이를 셋이나 낳아 키우면서도 그림책은 잘 읽어주지 않았다. 어쩌다 그림책을 읽어주면 아이들에게 정신을 쏙 빼놓는 재미를 선물했지만 그렇게 읽고 나면 내 기운이 쏙 빠졌다. 6년 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먹이던 젖을 끊고 막내가 기저귀를 떼면서 한 숨 돌렸다. 둘째가 어린이집에 가고 나니 두 숨 돌렸다. 그리고 나서야 그림책이 눈에 들어왔다. 그림책 속에서 나를 만났다. - 기자말

맞춤법 틀린 건 알고 있을까?
▲ 아홉살 딸아이가 따라 그린 표지 맞춤법 틀린 건 알고 있을까?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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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둘째가 눈을 위로 치켜 뜬 채 이마에 주름살 몇 줄을 겨우 잡고는 나를 급히 불렀다.

"엄마, 나도 이제 엄마처럼 이마에 주름살 생긴다. 나 멋지지?"

셋 중에 제일 외모에 관심이 많은 둘째가 거울 앞에 한참을 서서 뭔가 애를 쓰더니 마침내 잡힌 주름살 자랑을 해왔다. 외할아버지를 많이 닮은 둘째 얼굴 위로 돌아가신 친정아빠가 겹쳐졌다.

지금의 둘째보다는 내가 더 컸을 때, 아마도 중학생 그 어디쯤인 듯하다. 세상에 대한 궁금증과 동경이 생겨나던 무렵, 나는 아빠의 미간에 잡힌 주름살을 멋있다고 생각했다. 햇살이 길게 스미는 늦은 오후, 맥주 한 잔을 오래 나눠 드시며 식탁 앞에 앉아계시는 아빠의 모습.

그 옆엔 오래된 낡은 거울이 걸려 있었다. 나는 그 거울 속에 비친 아빠의 옆모습을 보는 걸 좋아했다. 늦은 오후의 햇살과 김이 톡톡 빠지는 황금빛 맥주 그리고 아빠의 미간에 굵게 잡힌 주름. 그 풍경은 내가 아직 모르는, 빨리 알고 싶은 세상과 시간처럼 느껴졌다.

의 기억은 할머니의 어떤 주름에 담겨있을까?
▲ "수수께끼를 풀었던 이른 봄 그 아침" 의 기억은 할머니의 어떤 주름에 담겨있을까?
ⓒ 미디어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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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주름살이 멋있었던 어린 시절

그때부터다. 눈썹에 힘을 잔뜩 주고 미간에 억지로 주름을 잡는 연습을 했던 건. 부단한 연습 끝에 나는 말하는 눈썹을 갖게 되었다. 기쁠 땐 눈썹이 기지개를 펴듯 하늘로 올라가고 생각이 필요할 땐 눈썹이 미간으로 차전놀이를 하듯 몰려왔다. 덕분에 미간은 물론 이마에도 어려서부터 주름이 잡혔다. 그땐 그런 내가 멋있다고 생각했다.

주름 잡는 버릇은 20대에 당장 후회가 되었다. 그러나 글 쓰는 직업을 갖게 되면서 그 주름도 나름 어울린다며 허세처럼 붙이고 살았다. 30대, 아이 셋을 낳아 기르느라 제대로 거울도 보지 못한 채 살았다.

막내의 어린이집 입소와 함께 맞은 마흔,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선 누이"처럼 오랜만에 거울 앞에 섰다. 머리를 쓸어 넘기지 않아도 군데군데 보이는 흰머리 아래로 주름살과 기미가 타고난 동안을 밀어낸 지 오래다.

오래 가꾸지 않은 얼굴 위로 지난 시간들이 지나갔다. 언제 어떻게 이 주름들이 생겼을까? 요즘 동네 엄마들 사이에서 이슈가 되는 각종 미용 시술의 세계에 나도 들어가야 하는 걸까? 처음으로 '안티에이징'을 검색해 보았다. 주름살을 감추고 싶은 40대 진입의 신호탄이다.

오래오래 축하드리고 싶어요
▲ 할머니 생신 축하드려요 오래오래 축하드리고 싶어요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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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차 이탈리아 그림책작가 시모나 치라올라의 <할머니 주름살이 좋아요>를 만났다. 백발의 긴 생머리에 작은 머리핀 두 개를 꽂고 있는 할머니와 세 살 정도 되는 손녀가 꽃과 함께 그려진 분홍색 표지는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난다. 이탈리아 할머니는 한국 할머니처럼 파마를 하지 않는구나 하며 책장을 넘겼다.

손녀의 시점에서 풀어내는 할머니의 이야기다. 할머니 생일을 맞아 가족들이 모두 모였다. 할머니는 가족이 함께 하는 날을 좋아하지만 아이의 눈에 비친 할머니는 "어쩐지 좀 슬퍼 보이고, 놀란 것도 같고, 어딘가 걱정스러워 보"인다. 할머니는 "얼굴에 주름이 많아서 그럴 거야"라고 말씀하신다. 아이는 주름살이 걱정되시냐 묻지만 할머니는 전혀 아니라 답한다.

"이 주름살 속에는 내 모든 기억이 담겨 있거든!"

할아버지와 만났던 날 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 할머니의 주름살이 주인공 할아버지와 만났던 날 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 미디어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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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름 하나 없는 포동포동한 세 살의 얼굴이 여든 즈음의 주름진 얼굴에 담긴 기억이 사실인지 물어보며 책장이 넘어간다. 할머니는 이마와 눈가 등에 잡힌 주름에 담긴 기억들을 들려주신다.

"수수께끼를 풀었던 이른 봄, 그 아침", "최고의 바닷가 소풍", "네 할아버지를 만났던 날 밤", "여동생한테 최고의 선물을 선사했던 때", "처음으로 작별 인사를 해야 했던 때", "손녀를 처음 보았던 때"

작가는 배경 그림 없이 아이의 작은 손가락과 할머니의 주름 잡힌 얼굴을 크게 그리고, 그 주름이 담긴 할머니 인생의 순간들은 다채로운 색깔로 화지 가득 채워 보여준다. 큰 판형의 그림책이라 할머니 얼굴에 내 얼굴을 맞대어 보니 얼추 실제 얼굴 크기와 같다. 할머니 주름살 위로 내 주름이 겹쳐진다.

책 속 할머니는 젊어서부터 바느질을 해왔다. 앞뒤 면지와 책 속 표지 제목 아래에 할머니의 바늘방석과 실패가 그려져 있다. 책장을 덮으니 뒷 표지에 할머니가 뜨다 만 손뜨개 작품이 있다.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하듯 주름 하나하나 얼굴 위에 새기며 한 생을 살아오신 할머니 얼굴을 보는 듯 했다.

한 올 한 올 시간을 뜬다.
▲ 할머니의 손뜨개 한 올 한 올 시간을 뜬다.
ⓒ 미디어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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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읽은 김중혁의 산문집 <뭐라도 되겠지>에 실린 '100년 살면 100살'이 뒤따라 왔다. 작가의 외할아버지가 100살 되시던 2010년에 쓴 산문의 한 구절을 옮겨본다.

"100년이라고 해도 사람들은 가슴에 와 닿지 않는 모양이다. (중략) 유관순 '언니'의 3·1 운동 때에는 아홉 살이었고, 해방이 될 때는 서른다섯 살이었으며 (서른다섯이 될 때까지 식민지 백성이라는 건 어떤 기분일까)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지금의 내 나이보다 어린 마흔이었고, 5·18 광주민주화운동 때는 이미 일흔이었다. (중략) 주름이 어찌나 깊은지 조각칼로 파놓은 것 같다. (중략) 100년 동안 웃으면서 생긴 얼굴의 근육과 100년 동안 찡그리고 울면서 생긴 얼굴의 근육이 맞부딪쳐 산맥을 이루고 굳으면서 주름이 되었다."

내 기억 속 엄마는 마흔 언저리 아직 젊은데, 어느새 엄마는 환갑을 넘어 할머니가 되셨다. 일흔 고개가 그리 멀지 않았다.
▲ 그림책을 보자마자 떠오른 5년 전 사진 내 기억 속 엄마는 마흔 언저리 아직 젊은데, 어느새 엄마는 환갑을 넘어 할머니가 되셨다. 일흔 고개가 그리 멀지 않았다.
ⓒ 정가람, 미디어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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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름 하나에 사랑과 주름 하나에 추억

지난 겨울, 친정엄마와 동갑인 대통령 얼굴을 보며 속상했던 날이 많았다. 주름 하나 없이 팽팽한 대통령의 얼굴과 어느새 할머니가 되어버린 엄마의 얼굴은 너무나 달랐다. 누군가의 풍성한 까만 올림머리와 누군가의 힘도 없고 흰머리 가득한 머리는 다른 세상이었다. 그러나 억지로 시간을 돌리려 억지 힘을 쓰는 얼굴보다는 정직하게 살아온 시간의 흔적이 깊게 패인 얼굴이 나는 더 자랑스러웠다.

날카롭던 20대의 얼굴은 30대에 젖어미로 살며 고단한 만큼 무뎌졌다. 어린이가 된 아이들을 보며 한 숨 돌리고 다시 시작하는 마흔의 얼굴은 이제 나의 시간을 기록하려 한다.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추억"을 헤아리는 밤처럼, "주름 하나에 사랑과 주름 하나에 추억"을 새겨본다. 살아온 날들과 살아갈 날들을 담아본다. 마흔 이후의 얼굴은 자신의 책임이라는 말을 지표삼아.

* 그래도 이제 베이비로션은 그만. 시술 대신 '안티에이징'이 깨알같이 적힌 에센스와 크림이라도 듬뿍 바르고 눈썹 정도는 그리고 집을 나서야지. 이왕 얼굴에 새기기로 한 주름, 곱게 새기고 싶은 게 여자 마음이다. 늙어도 여자는 여자!


[더책] 할머니 주름살이 좋아요

시모나 치라올로 글.그림, 엄혜숙 옮김, 미디어창비(2016)


태그:#할머니 주름살이 예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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