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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년에 태어나 1551년에 숨을 거둔 사람이 있습니다. 이이는 이동안 일곱 아이를 낳았다고 하는데, 어릴 적부터 무척 똑똑하여 둘레에서 널리 사랑받으면서 여러 가지를 즐겁게 익혔다고 해요. 글씨를 잘 쓰고 그림을 잘 그릴 뿐 아니라 바느질 솜씨도 빼어났다고 해요. 어쩌면 밥짓는 솜씨도 훌륭하지 않았을까요. 안팎으로 두루 알뜰한 살림꾼이면서 정갈하며 어진 분이었지 싶습니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5만 원짜리 종이돈에 이분 얼굴이 깃듭니다. 이분이 걸어온 발자취를 다루는 연속극이 나오기도 합니다. 이분 아들이 남긴 글을 빼고는 이분 발자취가 그리 널리 남지 않았다고 하지요. 이분이 그린 숱한 그림 가운데 오늘날까지 남은 그림은 몇 가지 안 된다고 해요. 그림도 글도 뛰어났다면 옛사람으로서 시도 제법 썼을 텐데 딱 세 작품만 남고 다른 작품은 알 길이 없다고 해요.

겉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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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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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화가들은 조금 볼품없게 생긴 수박이라도 자신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더 보기 좋게 그립니다. 그런데 이 그림은 보이는 그대로 그렸습니다. 그러니까 오히려 더 재미나고 생생하게 느껴지지요? 아마도 꾸밈없는 마음이 느껴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7쪽)

조용진 님이 글을 쓴 <풀과 벌레를 즐겨 그린 화가 신사임당>(나무숲, 2000)이라는 그림책을 새삼스레 읽어 봅니다. 신사임당 연속극이 나오는 2017년에 헤아리자면 열여덟 해 묵은 그림책입니다.

그러나 이 그림책은 스무 해 가까운 나날에도 빛이 바래지 않는 고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현모양처'라든지 '율곡 이이 어머니'라는 신사임당이 아니라, 한국 그림 문화를 새롭게 일구었을 뿐 아니라 아름답게 이끌어 낸 손꼽히는 그림지기(화가)라는 테두리에서 신사임당을 찬찬히 짚습니다.

인선이 나고 자란 강릉의 집은 마치 작은 숲과 같았습니다. 마당에는 철따라 원추리, 봉숭아 등 갖가지 꽃이 피었고 나비와 벌이 찾아들었습니다. 뒤뜰에는 포돋덩굴이 무성하여 다람쥐들이 넘나들고 여름에는 포도가 주렁주렁 열렸습니다. 또 줅기가 검은 대나무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10쪽)

신사임당은 꽃과 풀과 벌레를 소재로 많은 그림을 그렸습니다. 작고 보잘것없는 생물에 불과하지만 신사임당은 이런 것들이 좋았습니다. (17쪽)

속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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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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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신사임당>은 지난 2000년 언저리에 살펴보았을 적에도 돋보이는 어린이 인문책이라고 할 수 있었어요.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가서만 보는 옛 그림이 아니라 집에서 어버이 무릎에 앉아서 '아름다운 그림결'을 늘 헤아리면서 이 그림이 어떻게 기나긴 해를 흘러올 수 있었나를 북돋아 주어요.

글쓴이 조용진 님은 신사임당 그림을 두고 "꾸밈없는 마음에서 비롯한 꾸밈없는 그림"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작은 숲을 이룬 집에서 작은 숲을 고스란히 담은 그림"이라고 이야기하지요. "사회와 사내들이 작고 보잘것없다고 여기는 것이 작지도 않고 보잘것없지도 않다는 대목을 오롯이 그림으로 보여주"기도 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신사임당은 달랐습니다. 중국의 그림본을 그대로 옮겨 그리기보다는 우리의 모습을 대신 그리기도 하고, 검은색만으로 표현되는 수묵화 대신에 색을 칠하여 그리고, 작은 풀과 벌레를 그림에 담기도 했습니다. (21쪽)

이른바 '시대를 앞서간 화가'로 손꼽을 수 있는 신사임당이라는 분은 '따라쟁이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따라하거나 베끼는 그림'이 아니라 '신사임당 눈으로 본 삶을 신사임당 손으로 담은 그림'을 펼쳐 보였다고 해요. 사회도 사내들도 그저 '중국을 섬기거나 따르거나 베끼는 흐름'이었다지만, 이를 좇지 않고서 '작고 수수한 이 땅 이 살림'을 고이 담아냈다고 합니다.

풀을 그리고 벌레를 그립니다. 쥐가 갉아먹은 수박을 그리고 포도넝쿨을 그립니다. 이러면서 언제나 스스로 정갈하고 곧은 몸짓을 건사합니다. 이녁 아이들이 삶으로 살림으로 몸으로 마음으로 물려받아서 배울 만한 숨결을 시나브로 가르칩니다.

책이나 지식으로 아이를 가르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어요. 너그러운 마음과 따사로운 사랑과 정갈한 손길을 온몸으로 물려주듯이 가르쳤다고 할 수 있어요.

속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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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들에게도 신사임당의 이러한 생활은 훌륭한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언제나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자란 자녀들도 부지런함이 몸에 배었습니다. 글공부는 물론 신사임당에게서 물려받은 예술적 재능을 맘껏 발휘하기도 하였습니다. (33쪽)

한 걸음 앞서간 '풀벌레 화가' 신사임당이라고 느낍니다. '풀벌레'를 즐겨 그렸기에 '풀벌레 화가'라 할 만하고, 풀벌레처럼 작고 수수한 것에서 삶과 사랑을 깨달아 그림을 그릴 수 있기에 풀벌레 화가라 할 만해요.

풀 한 포기처럼 벌레 한 마리처럼 아주 조그마하고 흔한 데에서 아름다움을 길어올립니다. 겉으로는 커다랗거나 대단해 보이는 것에 얽매이지 않기에 제 길을 곧게 걸을 수 있습니다. 풀잎에 서린 마음을 읽고, 뭇벌레가 들려주는 노래에 귀를 기울입니다. 아름다운 그림은 마음하고 마음이 만나는 자리에서 그릴 수 있겠지요. 고운 그림은 활짝 연 마음으로 귀기울여듣는 손놀림으로 그릴 수 있겠지요.

덧붙이는 글 | <풀과 벌레를 즐겨 그린 화가 신사임당>(조용진 글 / 나무숲 펴냄 / 2000.10.20. / 10500원)



신사임당 - 풀과 벌레를 즐겨 그린 화가

조용진 지음, 나무숲(2017)


태그:#신사임당, #조용진, #그림책, #풀벌레화가, #풀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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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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