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겨울은 추워야 제맛이라지만 쉼터를 이용하는 이주노동자들에게 올 겨울은 추워도 너무 춥다. 연일 최저 기온을 갱신하는 최강 한파에 눈까지 내린 일요일 아침, 이주노동자 쉼터 베란다에 걸린 빨랫줄 아래 바닥이 꽁꽁 얼어 있었다. 지난 밤 빨래에서 흘러내린 물이 밤새 얼었던 것이다. 빨랫줄에는 담요와 요 홑청, 츄리닝, 잠바, 속옷과 양말과 아기 이불로 써도 될 법한 큰 수건 등이 촘촘하게 걸려 있었다. 만져보니 지난 금요일에 누군가 빨아 널었던 담요만 빼고 모두 단단하게 얼려서 구부려지지도 않았다. 그나마 담요는 밑단과 모서리를 빼고는 말라 있었다.

이 엄동설한에 빨래를 한 사람이 궁금했다. 필리핀에서 온 리차드였다. 그는 한국에 온 지 8년째인 이주노동자다. 처음 4년 10개월 동안 일했던 회사에서 성실함을 인정받아 재입국한 지 3년이 다 되고 있다. 그는 경기 침체로 다니던 회사를 나오고 지난 수요일부터 몇 년간 한국어 공부를 했던 쉼터에서 지내고 있다. 지금까지 여덟 번의 한국 겨울을 경험했던 그가 영하 날씨에 빨래를 하면 안 된다는 걸 몰랐다는 게 의아했다.

"베란다 봤죠? 미끄러워요."
"겨울에 일 없어요. 회사 찾기 힘들어요. 눈 올 때 밖에 나가기 힘들어요. 그래서 빨래했어요."
"이렇게 추운 날 빨래하면 잘 안 마르는데…"
"아, 그거 제가 미스테이크(실수)예요. 죄송해요. 담요 있어요. 다른 옷도 많아요. 그래서 했어요."

리차드는 요즘 회사를 알아보느라 바쁘다. 그런데 일자리를 찾는 게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겨울이라 일자리가 많지 않고 추운 날씨는 상상을 초월했다. 그는 여태 한국에 있으면서 공장에서만 일하느라 눈이 쌓이고 찬바람이 불 때 어디 돌아다닐 이유가 없었다. 이렇게 추운 겨울은 처음이라고 하는 이유다.

처음 실직을 경험해서 두렵긴 하지만, 서두르지 않기로 한 리차드는 지난 토요일에 밀렸던 빨래를 했다. 영하 날씨이긴 해도 빨랫줄에 담요를 비롯한 많은 옷들이 걸린 걸 보고 아무 문제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잠바와 츄리닝, 속옥과 양말 외에 요 홑청에 큰 수건까지 과감하게 세탁기에 넣고 돌렸다.

담요는 지난 금요일 눈 내리던 날부터 걸려 있었다. 누군가 담요에 구토를 하고 흔적을 지우려고 세탁기를 돌린 것이었다. 반면 그 밖의 옷들은 빨래가 아니었다. 개인 옷장이 없는 쉼터에선 종종 사용자들이 베란다 빨랫줄에 옷을 걸어놓는다. 리차드는 그런 사정을 모르고 있었다. 나중에 베란다 바닥이 얼린 걸 보고 다른 이주노동자들이 한마디씩 하자, 그는 자신이 실수한 것을 알았다.

공장에서 일할 때는 세탁기에 돌린 빨래를 컨테이너 숙소에서 말려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라디에이터가 있었기 때문에 방 안 공기는 훈훈했고, 빨래는 가습기 역할을 해 줬다. 반면, 쉼터에선 라디에이터도 없고 어떤 종류의 전기 히터도 사용하지 못한다.
중절모에 목도리, 두툼한 잠바까지 완전무장한 줄 알았는데, 아뿔싸! 슬리퍼. 보기만 해도 발이 시리다.
▲ 눈 쌓인 옥상에 빨래를 널었다. 중절모에 목도리, 두툼한 잠바까지 완전무장한 줄 알았는데, 아뿔싸! 슬리퍼. 보기만 해도 발이 시리다.
ⓒ 고기복

관련사진보기


볕이 제대로 들지 않는 베란다에 빨래를 놔뒀다간 언제 마를지 모를 일이었다. 대한민국 겨울을 너무 만만하게 봤던 리차드와 다른 이주노동자들을 다독여 옥상으로 올라갔다. 간밤에 내린 눈이 발목까지 푹푹 빠졌지만, 볕은 눈에 반사된 탓도 있었겠지만, 눈부실 정도로 좋았다. 그렇게 최강 한파에 얼린 빨래는 옥상에서 추위를 녹여야 했고, 슬리퍼를 신고 옥상에 오른 이주노동자들은 눈을 말아보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녹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 눈은 눈사람을 만들기엔 적당하지 않았다.

빨래를 널고 방으로 들어간 리차드는 머리까지 담요를 뒤집어쓰고 '추워요' 하며 하하 웃었다. 담요 아래로 손을 넣어 보았다. 전기 패널을 사용하는 바닥은 장판이 눌어붙을 정도였다. 뜨끈한 아랫목이 부러울 이유가 없었다. 그에게 지난 금요일, 누군가 담요를 빨았던 날, 낮에 전해 준 소설책을 다 읽었는지 물었다.

"저는 다 읽지 못했어요. 윌리는 다 읽었어요. 제 책이 조금 두꺼워요."
"그래요. 다 읽으면 말해요. 다른 책도 있으니까."
"추울 땐 책만 읽으면 좋겠어요. 나가기 싫어요."

대개 쉼터를 이용하는 이주노동자들은 긴긴 겨울밤을 핸드폰만 들여다보며 지낸다. 그들에게 얼마 전 한 후원자가 보내온 책을 권했다. 파울로 코엘료의 '흐르는 강물처럼'을 비롯하여 '죽은 시인의 사회', '레미제라블', '오만과 편견',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등 다양한 장르의 소설들이었다. 다 읽은 사람도 있고, 리차드가 반 이상을 읽은 걸로 봐서 금요일에 읽기 시작한 것치고는 속도가 빠른 편이었다. 다들 독서삼매경인 모양이다.
영어 소설에 빠진 이주노동자들
▲ 독서삼매경 영어 소설에 빠진 이주노동자들
ⓒ 고기복

관련사진보기


이러저러한 이야기 중간에 리차드가 갑자기 자리를 털고 일어나더니, 부엌에서 먹을 것을 가져왔다. 쌀로 만든 술빵으로 촉촉하고 단맛이 일품인 푸또와 바나나잎에 코코넛 가루와 설탕을 넣어 찐 찹쌀떡, 수만이었다.

영하 몇 도니, 체감온도가 몇 도니 하는 날에 맛본 필리핀 전통음식. 어릴 적 시골에서 먹던 빼떼기 죽이 떠올랐다. 얇게 썰어 말린 고구마에 당원이라고 불리던 사카린을 넣어 단맛을 더한 빼떼기죽을 먹던 겨울은 언제나 마음마저 따뜻했다. 구들장을 덥힐 땔감을 마련하고, 김장 김치를 꺼내먹던 시절은 옛날이야기다. 그래도 그 시절을 추억할 만한 일들은 요즘도 일어난다. 언 손을 호호 불면서도 눈싸움을 해야 겨울임을 실감했던 시절은 다 지났지만, 언 빨래를 널며 그 시절을 떠올렸으니 말이다.



태그:#이주노동자, #빨래, #한파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