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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18일 오후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뇌물공여, 횡령, 국회증언감정등에관한법률위반 혐의 등으로 구속영장실질심사를 받은 뒤 대기장소인 서울구치소로 가기 위해 법원을 나오고 있다.
▲ 구속영장실질심사 마친 삼성 이재용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18일 오후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뇌물공여, 횡령, 국회증언감정등에관한법률위반 혐의 등으로 구속영장실질심사를 받은 뒤 대기장소인 서울구치소로 가기 위해 법원을 나오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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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법률을 제정하는 데 있어 각 정권은 자기 이익을 목적으로 합니다. 일단 법 제정을 마친 다음에는 이 법을 정의로운 것인 듯 공표하고서는 위반하는 자들을 정당하지 못한 일을 한 자들로 취급하고 처벌하는 것이죠. 정의는 참으로 순진하고 올바른 신민들을 조종해서 강한 자들에게 편익이 되는 것을 행하게 할 뿐이에요. 그들은 강자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일을 할 뿐, 결코 자신들을 행복하게 만들지는 못하는 게 현실이란 말입니다."

플라톤의 <국가> 1권에서 소크라테스와 '정의 논쟁'을 벌인 트라시마코스가 한 말이다. 그에게 법이란 '강자들이 자기 이익을 정의란 이름으로 포장해 놓은 기만적인 산물'일 뿐이다. 그래서 사회적 약자들이 법을 지키면 이익을 얻는 것은 강자들이다.

지난 13일 작고한 중도보수계의 거목 박세일 교수는 이런 식의 법의 운용을 두고 '법치주의'와 구분해 '법률주의'라고 불렀다. 박 교수는 "법의 집행이 엄정하고 공평하고 투명해야 한다. 법의 집행과 절차에 예외, 차별, 표적, 자의가 있어서는 아무리 법의 내용이 옳아도 이는 법치주의가 아니다"고 소리 높여 말했다.

너무나도 우연히, 롯데-옥시-삼성으로 이어진 구속 기각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의 구속 여부를 결정한 서울중앙지법 조의연 영장전담 부장판사.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의 구속 여부를 결정한 서울중앙지법 조의연 영장전담 부장판사.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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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 19일 새벽 5시, 조의연 판사는 박영수 특검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연루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해 신청한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누가 봐도 경영 승계를 둘러싸고 430억여 원에 이르는 뇌물을 주고받은 정황이 분명한데도, 지금 단계에선 법리 다툼이 예상된다며 영장을 기각했다.

조 판사가 제시한 영장 기각 사유가 곧이곧대로 보이지 않는 것엔 이유가 있다. 조 판사는 지난해 1750억 횡령 배임 혐의를 받은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의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과실치사상 혐의를 받은 존 리 전 옥시레킷벤키저 대표의 구속영장도 기각했다. 공통된 이유는 "소명이 부족하다"였고, 너무나도 우연히 각각 새벽 5시, 새벽 4시, 새벽 3시, 다시 말해 '모두가 잠든 시간'에 기각결정이 내려졌다.

대통령의 강압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삼성의 주장이 누군가에는 진실로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을 보자. 삼성은 우리나라 GDP의 대략 10% 이상, 수출액의 20% 가량을 책임지고 있다.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거둬들이는 법인세의 15% 정도를 내고 있다. 이런 거대 기업이 대통령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다고? 만약 그렇다면 이재용 부회장은 장차 삼성이란 그룹 자체를 끌고 갈 배짱이 없는 새가슴이거나, 글로벌 시대에 뒤바뀐 시장과 국가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멍청이일 것이다.

글로벌 시대의 가장 큰 특징이 바로 정치권력을 시장권력이 대체했다는 점이다. 이런 추세 아래 삼성이 최순실 같은 이에게 돈을 댔다면 '경영권 승계 보장' 같은 대가가 따를 때뿐이란 건 누구에게나 명백한 사실이다. 정말 이런 대가성이 보이지 않는다면, '벌거벗은 임금님'을 둘러싸고 아첨하는 간신들의 거짓말과 다름없을 것이다.

법의 이름으로 정경유착을 포장하는 포스트 민주주의

앞에 제시한 대략적 통계를 보고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저렇게 큰 기업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을 구속시켜서야 되겠는가?" 실제 제법 많은 사람들이 재벌들을 구속시키면 나라가 망하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혹여 구속이라도 되고 나면 경제를 살리기 위해 이들을 사면해야 한다고 말한다. 소위 가진 자들에겐 정당한 법의 절차를 통해 법에 대한 예외가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예외"를 옹호하는 것은 우리가 지켜내고자 하는 법치주의의 정신을 무너뜨린다. 더하여 우리를 이런 기업이 주는 돈에 기생해 먹고 사는 수동적인 '개돼지'로 만든다. 그런 '개돼지의 나라'에서 정경유착은 끊을 수 없는 고리일 수밖에 없다. 개돼지들의 나라에 민주주의라는 진주 목걸이가 어울리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다.

삼성과 같은 글로벌 기업이 정치 및 법 엘리트들과 결탁해 소수에게 권력이 집중된 체제를 만드는 현상을 '포스트 민주주의'라고 부른다. '포스트 민주주의'에서 정경유착 세력들은 언제나 자신의 이익을 법의 이름으로 포장한다. 이를 통해 자신들이 취하는 모든 이득은 정당한 법의 산물이라고 강조한다.

모두에게 공명정대한 '법치주의'가 아닌, 법률의 조항만을 문제 삼는 '법률주의'를 법의 중심으로 만들어 법을 만드는 자, 운용하는 자, 판단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마음대로 실현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을 뒤에서 마리오네트처럼 부릴 수 있는 돈을 가진 자의 이익 역시 마찬가지다.

트라시마코스가 결국 법이란 강자들이 이익을 실현하는 수단에 불과하다고 했을 때, 소크라테스의 방어 수단은 '진정한 전문가'였다. '영혼 있는 전문가라면 법을 그렇게 운용할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포스트 민주주의'의 전문가들은 그야말로 '영혼 없는 전문가'로 전락해 버렸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의 특검을 통해 법률주의에 맞서 법치주의를 지키려는 마지막 몸부림을 목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근대가 법치를 열었을 때, 법치가 법률주의란 이름으로 또다시 야만적인 통치로 돌아가는 것을 두려워했던 몽테스키외는 <법의 정신>에서 이렇게 썼다.

"법의 방어막 아래 그리고 정의의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악행보다 더 잔혹한 독재는 없다."

법률주의로 법치주의를 지우고 있는 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다.



태그:#이재용, #조의연, #법치주의, #법률주의 , #구속영장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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