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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뚝은 독특한 우리문화의 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굴뚝은 오래된 마을의 가치와 문화,  집주인의 철학, 성품 그리고 그들 간의 상호 관계 속에 전화(轉化)되어 모양과 표정이 달라진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오래된 마을 옛집굴뚝을 찾아 모양과 표정에 함축되어 있는 철학과 이야기를 담아 연재하고자 한다. - 기자 말

 방촌마을 오헌고택 널굴뚝  오헌고택은 천관산 바로 아래에 있다. 집 앞 널굴뚝이 별나다. 연기 나는 널굴뚝을 기대하는 것은 나의 욕심이겠지. 그래도 통나무 널굴뚝은 마음을 순하게 한다.
▲ 방촌마을 오헌고택 널굴뚝 오헌고택은 천관산 바로 아래에 있다. 집 앞 널굴뚝이 별나다. 연기 나는 널굴뚝을 기대하는 것은 나의 욕심이겠지. 그래도 통나무 널굴뚝은 마음을 순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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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굴뚝에 피는 연기는 붉은 느릅나무 삶는 것이네 
촌사람의 생활은 정말 개탄스럽고
지금 나라의 곡식은 떨어졌건만
고기 먹어 배부른 벼슬아치들은 아무 생각이 없네 

누구 시 이기에 이렇게 적나라할까? 존재 위백규(1727-1798)가 지은 <유근(楡根)>이다. 유근은 예전에 가난한 집에서 구황식물로 끓여먹던 느릅나무 뿌리를 말한다. 존재는 평생 장흥 방촌마을에 살면서 백성들과 늘 가까이하며 당시 현실을 세세하고 적나라하게 비판하였다.

조선 호남 3천재 실학자, 존재 위백규

광화문에서 동으로 곧바로 가면 정동진이요, 남으로 곧장 내려가면 정남진(正南津), 장흥이다. 위백규는 남쪽 후미진 땅에서 나고 자라 평생 장흥 땅을 거의 벗어나지 않았으면서 천문(天文), 지리, 율력(律曆), 복서(卜筮), 산수는 물론 온갖 장인의 재주까지 익혀 농촌계몽활동을 하였고 사회개혁을 주창하였다. 모두 그를 순창의 여암 신경준(1712-1781), 고창의 이재 황윤석(1729-1791)과 더불어 호남 3천재 실학자로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존재고택 서재 존재고택 마당 오른쪽에 있는 서재로 존재가 이용하였다. 사랑채에 딸려있지 않고 독립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다. ‘존재’와 ‘영이재’ 편액은  존재의 스승 윤봉구가 썼다.
▲ 존재고택 서재 존재고택 마당 오른쪽에 있는 서재로 존재가 이용하였다. 사랑채에 딸려있지 않고 독립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다. ‘존재’와 ‘영이재’ 편액은 존재의 스승 윤봉구가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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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세에 이르러 정조께 낡은 제도를 개혁하고 정치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6가지 정책을 건의한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지어 올리기도 하였다. 이에 앞서 65세에 존재는 사회모순을 비판하고 개혁방안을 제시한 <정현신보>를 선보였다. 33세에 초안을 잡아 65세에 완성하였으니  필생의 역작인 셈이다.

<정현신보>에서 존재는 '우리나라 전답은 몹시 좁은데도 전택의 소유제한이 없어 세력 있는 부자는 더 많이 소유하니 부유할수록 사치하고 가난할수록 더욱 곤궁해지는 형세'라 비판하고 '부자에게는 토지소유를 제한하고 세금을 제대로 걷을 것이며 가난한 사람에게는 잡다한 세금을 부과하지 말고 자력으로 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자'고 주장하였다. 현대 여느 진보론자보다 더 진보적인 생각을 하였다. 

존재집 1875년 존재의 후손 위병석, 위영복에 의해 간행된 존재의 시문집이다.(리 박물관, 방촌유물전시관에서 촬영)
▲ 존재집 1875년 존재의 후손 위병석, 위영복에 의해 간행된 존재의 시문집이다.(리 박물관, 방촌유물전시관에서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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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는 장흥을 두고 삼벽(三僻)의 땅이라 하였다. 반도 제일 남쪽에 있어 궁벽하다 했고 윗대에 문과 급제자가 거의 나오지 않아 자신의 가문이 비천하다 했으며 자신 또한 비루하다 했다. 땅과 가문과 자신(사람)이 궁벽하다 하여 삼벽이라 했다.

벽(僻)이란 말 그대로 사람(人)이 거처하기에(居) 고생스럽고 맵다(辛)라는 뜻이다. 장흥 출신  소설가 이청준 또한 '장흥은 변변한 들판 없이 산과 바다로 이루어져 궁핍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재주라고는 글밖에 없다'고 토로하였다. 실제로 관서별곡을 지은 기봉 백광홍, 존재 위백규를 필두로 현대문학을 이끈 이청준, 김녹촌, 송기숙, 한승원, 김영남, 이승우 등 수많은 문학인들이 이 땅에서 나고 자랐다. 장흥이 '문림의 고장'이라 불리는 것을 보면 '삼벽의 땅 덕'을 보긴 본 모양이다.  

장흥 위씨 집성촌, 방촌마을

장흥 문인들이 들려준 삼벽의 땅에 대한 묵직한 이야기 들으며 찾아간 곳은 방촌마을. 500여년 장흥 위씨가 터를 잡고 살아온 위씨 집성촌이다. 존재는 이곳에서 나서 한평생을 보냈다. 마을 길목에서 돌장승이 퉁명스러운 듯 옅은 미소를 띠며 반긴다.

 방촌마을 돌장승 마을 길목에서 옅은 미소를 띠며 오는 이를 반긴다. 남장승, 여장승, 두 기의 돌장승 중 동쪽에 있는 여장승이다. 마을사람들은 미륵, 돌부처라 부른다.
▲ 방촌마을 돌장승 마을 길목에서 옅은 미소를 띠며 오는 이를 반긴다. 남장승, 여장승, 두 기의 돌장승 중 동쪽에 있는 여장승이다. 마을사람들은 미륵, 돌부처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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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서쪽)에 있는 것이 남장승(벅수), 왼쪽 돌장승이 여장승이다. 남장승 가슴에는 '진서대장군(鎭西大將軍)'이라는 명문이 있다. 마을 어귀 소나무 밭 안에 고인돌이 있고 그 맞은편에 우리나라 최초의 리(里) 박물관, '방촌유물전시관'이 마련되어 있다. 방촌마을 연혁과 존재의 사상이 담긴 서적이 전시되어 있다.

방촌마을은 천관산을 멀찌감치 바라보고 있다. 호남의 명산으로 불리는 천관산은 산꼭대기에 비죽비죽 솟은 바위들을 천자의 면류관으로 보아 천관산이라 했다고 한다. 존재 위백규는 천관산을 집 드나들 듯 드나들며 천관산에 자취를 남겼다.

태고송과 장천재 존재가 유학자와 수학하던 곳. 500 묵은 태고송은 터를 지키다 지쳤는지 잎이 말라버렸다. 도화 돌다리(도화교)
▲ 태고송과 장천재 존재가 유학자와 수학하던 곳. 500 묵은 태고송은 터를 지키다 지쳤는지 잎이 말라버렸다. 도화 돌다리(도화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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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제지>를 지어 천관산의 지리와 역사를 빼곡히 기록하였고 천관산 허리에 장천재를 짓고 많은 유학자와 수학하였다. 장천재 길섶에서 내뿜는 편백의 짙은 향에 몸이 개운해지고 계곡 물소리는 세상을 향해 쏟아낸 존재의 꾸짖음으로 들려 마음속이 다 후련해진다.

방촌유물전시관 전망대에 올랐다. 야트막한 마을뒷산, 다산(茶山)아래 신와고택(위봉환가옥, 중요민속문화재 269호)을 시작으로 위성룡가옥(전남민속자료), 존재고택(위계환가옥, 중요민속문화재 161호), 위성렬가옥사당(판서공파종택, 전남민속자료)까지 묵은 기와집이 나란하고 마을길 건너 서쪽, 오헌고택(위성탁가옥, 중요민속문화재 270호)이 천관산에 포근히 안겼다. 

다양한 방촌마을 굴뚝

여러 파종가로 이루어진 마을이라 굴뚝모양이 제각각이다. 신와고택 굴뚝은 안채와 사랑채 모두 집채와 떨어져 있는 독립형 굴뚝이다. 겉치장하지 않은 앞마당이나 후미진 후원언덕에서 장식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사랑채 굴뚝은 잘 빠져 의젓하고 안채 굴뚝은 살집이 두툼하여 보기 좋다.

신와고택 안채 굴뚝  후미진 후원 언덕에 있다. 암키와 조각으로 줄무늬를 내고 지붕은 기와를 얹었다. 살집이 두툼하여 보기 좋다.
▲ 신와고택 안채 굴뚝 후미진 후원 언덕에 있다. 암키와 조각으로 줄무늬를 내고 지붕은 기와를 얹었다. 살집이 두툼하여 보기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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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눈길을 모으는 굴뚝은 위성룡가옥 굴뚝이다. 사랑채와 안채 굴뚝 모두 붉은 벽돌로 크게 만들어 위용을 드러냈다. 탑 모양으로 만든 연가(煙家) 몸체는 부조를 끼워 재주를 부렸다. 세 면은 떨어져 나가고 학이 조각된 한 면만 남았다. 안채 기단에 살짝 숨긴 기단굴뚝은 권위만 내세우지 않겠다는 주인의 마음이다.

위성룡가옥 굴뚝 붉은 벽돌로 크게 만들어 위용을 드러냈고 연가(煙家)에 부조를 끼워 재주를 부렸다.
▲ 위성룡가옥 굴뚝 붉은 벽돌로 크게 만들어 위용을 드러냈고 연가(煙家)에 부조를 끼워 재주를 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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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중심 집은 존재고택이다. 여느 집에서 구경하기 어려운 서재 건물이 마당 남쪽에 마련되어 있다. 서재 남쪽 마루 밑에 가래굴(연도 煙道)이 불룩 돋아있으나 굴뚝 구멍은 없다. 주인 말로, 서재 옆에 낮은 굴뚝이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지고 가래굴만 남았다고 하였다. 굴뚝으로는 안채 굴뚝이 볼 만하다. 깔끔한 후원, 돌이끼가 싱싱한 축대위에 있다. 그럴싸한 인공 구조물이 없는 후원에서 단연 돋보이는 장식물이다. 

존재고택 서재 가래굴(연도)  서재 남쪽 마루 밑에 가래굴이 불룩하게 돋아 있으나 굴뚝 구멍은 없다.
▲ 존재고택 서재 가래굴(연도) 서재 남쪽 마루 밑에 가래굴이 불룩하게 돋아 있으나 굴뚝 구멍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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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고택 안채 굴뚝 돌이끼가 싱싱한 후원 축대 위에 서있다. 정갈한 후원에서 단연 돋보이는 인공 장식물이다.
▲ 존재고택 안채 굴뚝 돌이끼가 싱싱한 후원 축대 위에 서있다. 정갈한 후원에서 단연 돋보이는 인공 장식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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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헌고택은 장흥 위씨 반계공파 종가로 천관산 바로 아래에 자리 잡았다. 널빤지를 이어 붙여 만든 대문 앞 널굴뚝이 별나다. 주인할아버지 말로 예전에 널굴뚝이 많았으나 이제 겨우 하나 남았다고 하였다. 산 아랫마을이어서 널굴뚝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집 후원이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서너 평 채마밭 위에 동백과 대나무가 빼곡하고 한 가족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장독대는 윤이 나 빛났다. 우윳빛 때깔 고운 굴뚝은 장독대 옆에서 맵시를 드러내고 있는데 그 자태가 제법 고고해 보였다.

오헌고택 굴뚝 동백과 대나무, 굴뚝과 장독대가 한데 어우러진 오헌고택 후원 풍경은 조선 선비가 그린 한 폭 그림. 동백 잎과 장독은 윤이 나 빛나고 꼿꼿한 대나무와 점잖은 굴뚝은 그 자태가 제법 고고하다.
▲ 오헌고택 굴뚝 동백과 대나무, 굴뚝과 장독대가 한데 어우러진 오헌고택 후원 풍경은 조선 선비가 그린 한 폭 그림. 동백 잎과 장독은 윤이 나 빛나고 꼿꼿한 대나무와 점잖은 굴뚝은 그 자태가 제법 고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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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촌마을 굴뚝은 집 주인 닮아 개성 있고 표정이 다 다른데 이 집 굴뚝도 집 주인 닮은 거겠지? 방문을 반쯤 열고 손에 책을 쥔 채 손 인사 하는 주인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덧붙이는 글 | 2016년 10월3일-5일에 나주, 장흥, 보성, 화순에 다녀와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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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