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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 멱을 따는 울부짖음

1980년대 전후로 나는 학교(이대부고)에서 교직원 친목회 총무를 맡고 있었다. 총무가 하는 일은 교직원들의 상호 친목을 도모하는 일로, 퇴임 교사들의 송별회, 신임교사들의 환영회 그리고 회원들의 애경사에 조의금 또는 축의금을 모아 전달하는 일이었다.

한함윤 선생님이 1980년 그해 여름 사회정화 대상자로 부당하게 학교를 떠나게 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여러 동료 교사들이 아무튼 불행한 일이지만 그래도 송별회를 해드려야 한다는 견해였다.

그래서 그해 초가을 어느 날 퇴근 시간 무렵, 학교에서 가까운 신촌의 한 밥집에서 한함윤 선생님 송별회가 열렸다. 그날은 여느 송별회와는 달리 분위기가 매우 침울했다. 그날 주인공 함함윤 선생님은 그새 무척 수척한 얼굴인 데다가 수염도 제대로 깎지 못한 비통한 얼굴이었다. 그분은 시종 자신의 감정을 자제했지만 끝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울분을 터뜨렸다.

그 울분은 곧 비명이었다. 마치 잔칫날을 앞두고 돼지를 잡을 때 멱을 따는 피울음이었다. 청춘을 다 바친 학교에서 그것도 부패, 무능, 사상 관련으로 쫓겨났으니 그 비통함은 어찌 말로 할 수 있었을까? 더욱이 아이들이 한창 대학에 다니는 때에.

지금 이 글을 쓰는 나는 그때 그분의 그 비명 소리가 37년이 지난 오늘에도 쟁쟁히 들려오는 듯하다. 그분은 숱한 한을 품은 채 몇 해 전에 작고하셨다.

나는 지금이라도 이화학당과 이대부고 측에서는 그분의 원한을 풀어드리고 그에 따른 적절한 보상을 유족들에게 하는 게 공적 기관으로서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한다. 더욱이 예수를 믿고, "낮은 데로 임하라"는 그 예수의 거룩한 정신을 가르치는 학교라면.

그때 그 시절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계로 적당히 넘어가는 것은 130년 전통을 자랑하는 이화학당 답지 못한 처사일 것이다. 그때 다른 학교에서는 그런 사람이 없다고 보고치 않았기에 불행한 일이 없었다.

그분이 유능하고 사상이 건전한 교육자였다는 것은 지금도 숱한 지인과 제자들이 증언하고 있다.

정초에 집으로 찾아온 이대부고 제자들과 구기동 집 뒷산에 올라(1983. 1.)
 정초에 집으로 찾아온 이대부고 제자들과 구기동 집 뒷산에 올라(1983. 1.)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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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투

내가 1972학년도 오산중학교에 부임해 중학교 1학년 12반 학급 담임을 맡은 지 일주일이 지날 무렵이었다. 그날 2교시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 내 자리로 돌아오자 한 귀부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저 OO엄마예요."

나는 무척 당황했다. 그때는 학급당 학생수가 70명으로 학기 초라 그 학생의 얼굴이 얼른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혹시 내가 학생에게 무슨 언행을 잘못이라도 해 학부모가 찾아 왔는지?

"수고 많으시죠?"
"아닙니다. 처음으로 담임을 맡은 데다 학생들이 귀엽습니다."

어머니는 내 옆 자리에 앉아 주로 아이의 초등학교 때 얘기를 했고, 나는 듣기만 했다. 곧 수업 시작종이 울렸다.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은데 선생님이 바쁘실 것 같아…."

어머니는 핸드백에서 하얀 봉투를 꺼내 재빠르게 내 책상 서랍에 넣고 일어섰다. 나는 순간 너무 당황해 그 봉투를 꺼내 어머니에게 돌려드렸다.

그 봉투가 나와 어머니 사이를 몇 차례 오갔다. 그 어머니는 그 봉투를 끝내 내 책상 위에 던진 채 줄달음을 치며 교무실을 벗어났다. 내가 그걸 주워 복도로 나갔을 때는 그 어머니는 이미 교사(校舍)를 한참 벗어나고 있었다.

내가 무안한, 난처한 얼굴로 돌아오자 줄곧 건너편에서 나의 행동을 지켜보던 주임(현 부장) 선생님이 당신 자리로 불렀다.

"박 선생, 오랜만에 참 즐거운 구경을 했소. 학부모가 성의로 준 봉투는 받아도 돼요. 앞으로 달라고 보채지는 말고."

사실 나는 그때까지 봉투라는 걸 몰랐다. 내가 학교 다닐 때 부모님이 담임선생님을 찾아뵙더라도 봉투를 드리는 것을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햇곡식을 추수하면 고구마 한 자루, 햇밤 한두 되를 인사로 드리는 것을 알았지만 돈이 든 봉투를 건넨다는 것은 정말 몰랐다.

왜 일부 시골 교사들이 대도시 교사를 선망하고, 같은 교사들 가운데도 졸업반 담임이 되기를 바라는지를 교사가 된 이후로 알았다.

미국 메릴랜드주 럭빌에서 만난 제자(이미진, 가운데) 가족들(2007. 3.)
 미국 메릴랜드주 럭빌에서 만난 제자(이미진, 가운데) 가족들(2007. 3.)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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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받으면 뇌물, 나중에 받으면 미담

스승에 대한 대접은 옛날에도 있었다. 서당 아이가 책 한 권 뗄 때면 그 어머니는 '책떨이'라 해 정성스레 시루떡을 만들어 시루채로 머리에 이고 서당으로 찾아갔다. 어머니는 그 시루떡으로 서당 훈장에게 그동안의 노고에 대한 답례를 했다.

그 미풍양속이 현대에 와서는 봉투라는 듣기 민망한 얘기로 크게 잘못 변질됐다.

교사는 모름지기 학생들의 소질과 적성을 계발해 그들이 바른 길로 갈 수 있게 도와주는 길 안내자다. 이것은 교사의 마땅한 책무다. 학부모의 처지에서는 자기들도 할 수 없는 일을 교사가 해준데 대해 감사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 감사한 마음의 표시로 '촌지(寸志)'를 전달했을 것이다.

내 교단 경험으로는 이것을 학생 재학 중에 받으면 그걸로 끝나버린다. 또 그걸 교사가 강요해서 받거나 또는 과다하게 자주 받는 경우는 뇌물로 마냥 비난을 받게 된다.

하지만 스승에 대한 그 감사한 마음을 학생이 어른이 돼 먼 후일 갚게 되면 그 얘기는 세상을 밝게 하는 미담으로 학생도, 교사도 모두 칭송을 받게 된다.

내가 현직을 떠난 뒤 미국 메릴랜드에서 만난 제자도, 뉴욕에서 만난 제자도, 재학시절 그 부모로부터 봉투를 받은 적이 없었다. 지난날 대통령의 영부인으로 20여 년째 해마다 성탄카드를 보내준 학부모도 학생 재학시절이나 그후로도 나에게 볼펜 한 자루 건넨 적이 없었다. 지금도 날이 추우면, 더우면, 비가 오면 안부를 전하면서 나와 같이 해외여행을 하는 게 소원이라고 그날을 학수고대하는 제자가 있다.

학생 재학 시절 교언영색으로 학부모를 불러 향응을 받았다면 그때 일회성으로 끝남과 아울러 그 비난이 두고두고 전해지기 마련이다.

교사들의 불만과 용감한 학생

한 국립대학 총장은 그 자리에서 물러난 뒤 한 방송에서 회고담을 내놨다. 당신은 "총장 재임 중, 어떻게 하면 학생들을 잘 가르치느냐의 문제로 고민하기보다는 거의 날마다 학생처벌 문제로 회의하고 고민하다가 물러났다"라는 자조적인 얘기를 들려줬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으로 그 말씀에 공감이 갔다.

내가 현직에 있을 때 동료 교사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눌 때 자주 듣는 역겨운 얘기다. 일부 교사들의 불만은 교장 선생님이 교육위원회에 로비를 하지 않아 우리 학교에는 가난한 동네의 학생들이 많다는 불만을 노골적으로, 거의 상습적으로 했다. 그러면서 말끝마다 강남 학교를 얘기하는데, 그 골자는 그곳의 봉투는 두께가 두껍다는 그런 얘기들이었다.

또 다른 일부 교사는 고교 평준화정책에 대한 노골적인 반대 입장을 표했다. 그들은 평준화 전 단계로 교내에서 우열반을 편성하자는 주장을 폈다. 이는 당시 고교 평준화정책에 대한 역행으로 대단히 이기적인 발상이었다.

하지만 이를 무시하고 교내에서 이를 시행하자고 선동해 그 준비로 시험을 치르는데 몇 학생들은 그런 낌새를 알고 백지를 내는 일까지 벌어졌다. 다행히 몇 양식 있는 교사들의 반대와 학교장의 방침으로 무산됐다.

하지만 교감을 비롯한 일부 교사들의 주도로 육성회 임원의 요구라 하여, 성적 우수자 10% 이내 학생의 이름을 시험 후 성적우수자 명단으로 꾸며 게시판에 올리기도 했다. 한창 사춘기의, 더더욱 남녀공학 학교에서 교과 성적으로 학생들의 가름하는 짓은 학생 인권은 전혀 돌보지 않은 대단히 비교육적 행위였다.

그런데 이런 주장에 동조하는 교사들이 더 많았다. 그들 가운데는 소신으로 그런 이도 있었겠지만 닳고 노회한 교감의 견해에 동조하는 게 인사상(담임 배정 등)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다는 좌고우면의 눈치파나 기회주의자들이었다.

기자가 편집지도교사로 만든 우리생활 교지들
 기자가 편집지도교사로 만든 우리생활 교지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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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생활>

<우리생활>은 이대부속중고등학교의 교지였다. 교지는 학생들의 문화와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는 종합 문예지 및 인문지다. 학생들은 이 교지를 통해 문인의 꿈을 꾸거나 평론가, 기자의 소망을 기르기도 한다.

나는 1978년 <우리생활> 14호부터 15, 17, 19, 20호 등의 편집지도 교사를 맡았다. 교지를 맡은 해는 특히 그해 겨울방학은 아예 반납해야 할 정도로 일이 많기 마련이었다. 사실은 국어과 교사들이 번갈아 지도해야 함에도 이 일을 서로 맡지 않겠다고 하여 심지어는 내가 교무부장을 하면서도 이 일을 맡기도 했다.

그러다가 1990년대 이른 후, 학년말 직원회에서 한 후배교사가 교지를 해마다 내는 것은 재정과 담당교사의 과도한 부담이라는 발의와 함께 2년에 한 번씩 내자는 의견을 냈다. 그때 내가 강력히 반대했음에도 사회를 맡은 교감선생님은 다수결에 부쳤다.

그 결과 '민주'라는 미명으로 교지는 2년에 한 번씩 발간됐다가 나중에는 주보로 대체한다는 명분으로 슬그머니 사라져 버렸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인문이 퇴보한 그 근본 원인은 학교에서부터 인문 홀대 교육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중앙일보 주최 전국고교 교지 콘테스트에 기획상 상패(1979. 5.)
 중앙일보 주최 전국고교 교지 콘테스트에 기획상 상패(1979. 5.)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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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교지 발간 중단을 끝까지 막지 못하고 교단을 떠나온 데 대한 나의 부끄러움은 상존하고 있다.

우리생활 14호 첫 편집지도 교사를 맡았을 때는 중학교 이동재 선생과 한 팀으로 '특집Ⅰ․ 자연과 인간' '특집Ⅱ․ 우리들의 문제(고)' '특집Ⅲ․ 우리들의 세계(중)' 등으로 그해 <중앙일보> 전국고교 교지 콘테스트에 '기획상'을 수상키도 했다.

나는 우리생활 17호부터는 '교내현상 문예' 제도를 만들어 학생 문사들을 탄생시켰다. 그해 시 부문에 김홍걸 군이 <여수>(旅愁) <가을>이라는 작품으로 최우수 작품상의 영예를 안아 그 무렵 청송교도소에 사형수로 수감 중인 그의 아버지(김대중 전 대통령)를 기쁘게 했다는 후문도 들었다.

그해 산문 부분 최우수상 이미진 수상자는 이후 25년 만에 미국 메릴랜드주 럭빌 만리타향에서 그 가족과 함께 다시 만나는 기쁨을 누리기도 했다.

남녀공학 학생들의 이야기 '우리는 친구' 연재기사
 남녀공학 학생들의 이야기 '우리는 친구' 연재기사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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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한신문>

1983년 12월 어느 날 퇴근길에 교장선생님과 복도에서 마주쳤다. 관례대로 인사를 하고 지나쳤는데 교장 선생님이 되돌아 나를 불렀다.

"<새한신문>(당시 교총발행 주간지)에서 신년호 벽두부터 특색학교 교단수기에 추천 의뢰가 와서 이아무개 선생을 추천했더니 극구 사양을 하는데 박 선생이 한 번 써 보는 게 어떻겠소?"
"그쪽에서 어떤 글을 요구할지 잘 몰라 당장 대답키 어렵습니다."
"그럼, 담당기자에게 박 선생한테 직접 연락토록 조치하겠습니다."
"쓸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래서 당시 <새한신문> 김강자 기자를 만나게 되었고, 그 기자로부터 편집의도를 들은 뒤 '남녀공학 학교의 생활'을 주제로 신년호부터 한 달(4주)간 연재키로 했다.

새한시론 칼럼
 새한시론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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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친구'라는 제목의 남녀공학 학교 이야기 제1회가 1984년 1월 2일 치 <새한신문>에 실렸다. 기사가 나간 지 며칠 후 담당 기자가 독자의 반응이 매우 좋다는 전화를 해왔다.

그 글을 읽은 독자들이 우리 학교로도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 그들은 한결같이 다음 회가 기다려진다고 격려와 아울러 성원을 했다.

'우리는 친구' 3회 연재가 나가자 담당 기자가 애초 기획과는 달리 한 달 더 연장 연재하자고 부탁했다. 나로서는 제재는 무궁무진한 터에 원고료도 쏠쏠하여 흔쾌히 승낙했다. 그해 2월 27일 약속한 8회가 끝났다.

그러자 담당 기자는 애초 편집기획상 더 이상 연장을 할 수 없음을 매우 아쉬워하며, 대신 <새한신문> 권두 칼럼을 써줄 수 없느냐고 의향을 물었다.

내가 승낙하면 자기가 편집국장과 상의해서 청탁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권두 칼럼은 그동안 대학교수나 교육학자 또는 사회 저명인사들이 써왔다며 만일 내가 쓴다면 중·고교 교사로 아마 처음일 거라는 군말도 보탰다. 이에 내가 흔쾌히 승낙하자 정식으로 새한신문사에서 원고청탁서를 보내왔다.

새한신문 권두 칼럼은 '새한시론'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사람이 번갈아 가면서 집필하였는데 나는 그해 3월 26일 치에 "학교 교육은 정직이 생명"이라는 첫 칼럼을 썼다. 이후 "위대한 교과서" "서울바람 강남바람" "교사의 페어플레이" 등의 내 칼럼은 <새한신문> 1면을 장식했다.   

개교기념식장에서 이화학당 10년, 20년 근속 표창을 받고(1977. 5. 왼쪽부터 정숙현, 정식영 교장, 기자, 김학찬 선생님)
 개교기념식장에서 이화학당 10년, 20년 근속 표창을 받고(1977. 5. 왼쪽부터 정숙현, 정식영 교장, 기자, 김학찬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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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무부장이 되다

1983년 2월 하순 어느 늦은 오후, 3층 교무실 난로 곁에서 학년말 마무리 작업으로 담임 반 학생들의 생활기록부를 쓰고 있었다. 1층 교장 선생님이 느닷없이 3층 교무실에 오셔서 퇴근길에 교장실로 잠시 들러 가라고 했다.

사실 그 이전부터 정식영 교장선생님은 나를 곱지 않게 대했다. 한함윤 선생 진정서 서명 건, 친목회 총무 건 등으로 교장선생님은 직·간접으로 내 처사에 대한 강한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날 퇴근길 교장실로 가자 교장선생님은 소파에 앉기를 권했다. 내가 소파에  앉자마자 교장선생님은 말했다.

"신학년도부터 박 선생이 교무를 맡아주시오."
"네에?!"

"학교가 매우 어렵습니다."
"안 됩니다. 저보다 훌륭하신 선배 선생님이 여러분 계십니다."

"언제 박 선생이 내 집에 사과상자를 들고 찾아온 적이 있소?"
"그런 적 없습니다."
"그럼 됐소. 이 인사는 누가 뭐래도 떳떳하오. 그만 퇴근하시오."

(*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제2부 '교단일기'는 22회로 끝날 예정입니다.



태그:#봉투, #우리생활, #새한신문, #교무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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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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