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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얗게 서리를 뒤집어쓴 손돌묘, 묵묵히  손돌목을 내려다 보고 있다.
▲ 손돌묘 하얗게 서리를 뒤집어쓴 손돌묘, 묵묵히 손돌목을 내려다 보고 있다.
ⓒ 이종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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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년 새해 덕포진을 찾았습니다. 행정구역상으로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 산 105번지에 속하는 덕포진은 소금 강이라는 뜻의 염하(鹽河)를 사이에 두고 강화도의 덕진진, 광성보와 마주보고 있습니다. 강화해협을 통하여 도성으로 진입하려는 외적을 방어할 목적으로 설치된 조선시대의 군영인데 그 시기는 임진왜란을 전후한 때라고 하는군요. 꽤 유서 깊은 군사 유적입니다.

본래 내륙과 연결되어 있었던 강화도는 김포반도와 사이에 염하가 흐르면서 섬이 되었다고 하는데 풍수에 문외한인 사람이 봐도 이곳 강화해협은 그 지리적 중요성이 매우 높아 보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삼남지방에서 거둔 세곡 20만 석을 서해 바닷길을 통해 한양으로 운송했는데, 세곡선들은 인천의 만석부두에서 대기했다가 밀물을 타고 이곳 강화해협을 지나 마포나루에 닿았다고 합니다. 군사적으로도 그 중요성이 매우 높아서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요호 사건 등 근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모두 이곳 강화해협과 관련이 있습니다.

겨울답지 않게 포근한 날씨이지만 바다에는 안개가 자욱하여 지척에 있는 남장포대, 용두돈대 등도 보이지 않습니다. 대신 포대가 설치되어 있는 능선길은 자욱한 안개와 그 안개 사이로 스며드는 아침 햇살의 스펙트럼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신선세계에라도 온 듯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평일이라 인적 없는 길을 걷노라니 주변 너른 잔디밭은 흡사 눈이라도 내린 것처럼 하얀 서리로 뒤덮여 있는데 아직 깊은 잠에 빠져있는 키 큰 소나무 한 그루가 침입자의 발자국 소리에 놀랐는지 후드득 물방울을 뿌립니다. 이마 위로 떨어진 물방울의 여운이 오래도록 남습니다. 평화란 이런 걸까요?

해안을 따라 길게 이어진 포대 능선을 걷노라니 저 앞에 커다란 무덤 하나가 보입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사공 손돌의 묘라고 써 있습니다. 사연인즉 이렇습니다.

고려 고종이 몽고의 침입으로 배를 타고 강화로 피신할 때, 사공 손돌(孫乭)이 배를 저어 이곳에 이르자, 갑자기 물결이 사나워지면서 배가 조리질하며 나가질 못하고 위험하게 되었다. 이에 왕이 크게 노하여 손돌이 자신을 속여 사지(死地)로 유인한 것이라 하여 목을 베라 하니 손돌이 참수당하기 전에 쪽박을 하나 주며 바다에 띄워 따라가라고 하여 무사히 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에 뱃사공들이 그 시신을 바닷가에 묻고 그 바다를 손돌묵이라고 했다.

손돌이 참수당한 날짜가 음력으로 10월 20일인데 지금도 김포에서는 이 날짜를 손돌공의 주기로 삼아 이곳에서 '주사손돌공진혼제'를 봉행한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손돌의 원혼은 아직도 구천을 떠도는 것인지 해마다 그가 죽은 날이 되면 돌풍이 불고 추위가 닥치는데 사람들은 이를 손돌바람, 또는 손돌 추위라 부르고 바다에 나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한편, 구한말의 유생 이승희는 그의 『한계유록』 「강화일기」에서, 고려 고종이 강화에 들어온 것은 7월이므로 10월에 손돌의 배를 탔다는 것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하고, 손돌이란 이름도 '착량(窄梁)'의 뜻을 지닌 우리말 지명이라고 하였습니다. 부연하자면 착(窄)은 '좁다'라는 뜻이고, 량(梁)은 문(門)의 뜻을 갖고 있으니 착량은 곧 육지와 섬 사이, 또는 섬과 섬 사이의 좁은 해협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국립도서관 소장 <강도지도> 제작시기 미상으로 덕진포와 손돌목 등의 지명이 보인다
 국립도서관 소장 <강도지도> 제작시기 미상으로 덕진포와 손돌목 등의 지명이 보인다
ⓒ 국립도서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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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은 '솔다'의 어간 '솔'이 변형된 것인데 '솔다'는 '좁다'의 뜻을 가진 옛말입니다. '돌' 역시 '울돌목', '노돌길' 등과 같이 관문이나 길목을 지칭하는 우리말입니다. 옛 문헌에 착량(窄梁)이나 '석항(石項)' 등의 지명이 여러 곳에 등장하는 사례를 들어, 손돌이 강화해협을 지칭하는 지명이며 뱃사공 손돌의 이야기는 호사가들이 갖다 붙인데 불과하다고 한 이승희의 지적은 적확하다고 하겠습니다.
손돌이 실존 인물이 아닐뿐더러 심지어 사람 아닌 지명이라고 하니 다소 맥이 빠집니다. 그런 걸 사람인 양 묘를 쓰고 비를 세우고 해마다 제를 올린다고 하니 민초들의 몽매함에 쓴웃음을 지으며 돈대 터 쪽으로 발길을 돌립니다. 서서히 안개가 걷히고 멀리 초지대교를 비롯하여 남장포대, 용두돈대 등이 시야에 들어옵니다.

손돌목, 염하는 거친 물살을 일으키며 흐르고 서너 척의 배가 그 위를 지나갑니다. 물살이 빠르고 암초가 많아 조선 태조 4년(1395) 조운선(漕運船) 16척, 태종 3년(1403) 30척, 태종 14년(1414) 66척, 세조 원년(1455)에 54척 등 수많은 침몰사고가 발생한 곳이라고 하나 믿기지 않을 만큼 한적한 모습입니다. 또한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요호 사건 등 대규모 전투가 이곳 손돌에서 벌어졌다고 하는데 지금은 어디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세월의 무상함에 흐르는 물결만 맥없이 바라보다가 아무래도 손돌의 이야기가 마음에 걸려 다시 시선을 돌리니 주인 없는 손돌묘가 거기 우두커니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손돌이 비록 이곳 염하를 일컫는 지명이라고 해도 그것은 어쩌면 격랑의 세월 속에서 불의한 권력에 희생된 민초들의 원혼이요, 억울하고 한 많은 삶을 살다간 민초들의 넋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민초들의 성난 민심을 손돌바람이라 부르고 손돌 추위라고 불렀던 것은 아닐는지요? 문득 지난해 말부터 전국 각지에서 타오르고 있는 촛불이 생각납니다. 촛불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태그:#현해당, #덕포진, #손돌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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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인문기행 작가. 콩나물신문 발행인. 저서에 <그리운 청산도>, <3인의 선비 청담동을 유람하다>, <느티나무와 미륵불>, <이별이 길면 그리움도 깊다> <주부토의 예술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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