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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추진해온 교육부가 현장 적용 시기를 한 해 늦춰 2018학년도부터 학교에서 국정 또는 검정교과서 가운데 선택하는 '국·검정 혼용' 방안을 내놨다. 친일과 독재를 편들고 역사 사실을 왜곡해 국민에게 탄핵 당한 '박근혜표 교과서'를 끝끝내 지키겠다는 뻔뻔함에 입이 쩍 벌어져 안 다물어진다.

이래서 우리는 교육부가 하는 일이라면 다시금 고개를 빼뚜룸히 기울이고 보아야만 한다. 이즈음 교육부가 벌이는 일 가운데 하나가 바로 초등학교 교과서 한자 표기 문제다.

잘 알다시피 2014년 9월 <2015 개정교육과정 총론>(시안)에서 "초등학교에 적정한 한자 수를 제시하고 교과서에 한자병기의 확대를 검토한다"라는 말을 슬쩍 끼워 넣어 교과서 본문에 한자를 병기하려다가 거센 반대에 부딪히자 <2015 개정 교육과정>에서는 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지 않고 교육부는 아이들이 볼 교과서 날개든 바닥이든 교과서에 한자를 끌어들일 방법을 지금껏 끈질지게 찾아왔다. 이에 호응해 지난 11월 30일 교육부 위탁을 받은 서울대 교육학과 김동일 교수 연구팀은 서울대 호암교수회관에서 열린 '초등학교 교과서 한자 표기 방안' 정책연구 토론회에서 한자 370자를 공개하고 한자 표기 방안을 제안하기에 이르렀다.

왜 초등 교과서에 한자가 필요한지는 묻지 않는가

370자는 초등학교 5~6학년 국정교과서에 있는 주요 학습 어휘를 중심으로 교과서에 나오는 빈도, 학습 도움 여부, 같은 소리 다른 뜻 낱말들을 중심으로 추렸다고 했다. 단원에서 꼭 알아야 할 학습 용어이거나 한자말 이해에 도움이 될 때는 풀이를 보여주되, 단원 첫머리에 글상자 꼴로, 책 날개 또는 바닥에 , 단원 끄트머리에 글상자꼴로, 교과서 마지막 부분에 어휘 목록꼴로 제시하는 방법을 내놨다.

연구팀은 "교과서에 시각적으로 노출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한자, 또는 음과 훈이 교과서에 제시된 개념의 학습에 유용할 수 있는 한자를 중심으로 '어휘 교육'의 일환으로 접근했다"라면서 "'한자 교육'을 위한 기초 한자 연구와 구별된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멀리 갈 것도 없이 초등 교과서에 한자가 필요한지는 왜 묻지 않는가. 낱말이 어렵다면 더 쉬운 말로 풀어주는 게 상식이지, 어떻게 한자의 음과 훈을 적어주는 것으로 뜻풀이를 대신한다는 말인가. 우리 말이든 한자말이든 영어든 말밑을 샅샅이 따지고 알아야만 어휘를 더 잘 익힐 수 있는가. 더구나 낱말을 가르치겠다고 한자를 가르쳐야 한다면 아이들에게 짐 한 가지를 보태는 죄 말고 도대체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그 밑바닥에는 한자말은 한자를 알아야만 낱말 뜻을 빠르게, 또 온전하게 알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조금만 따져봐도 참으로 순진하기 그지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자연수, 소수, 대분수... 이걸 한자로 풀어본다면?

이해가 쉽지 않다.
 이해가 쉽지 않다.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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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초등학교 수학과에서 나오는 몇 가지 개념으로 생각해보자. 삼각형, 수직, 전개도, 다각형 같은 낱말을 보면 과연 한자를 알 때 개념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석 삼+뿔 각+모양 형, 드리울 수+곧을 직, 펼 전+열 개+그림 도, 많을 다+뿔 각+모양 형'이니까 이럴 경우에는 낱말을 아는 데 도움이 되고 말고다.

물론 여기엔 '석/세, 뿔, 드리우다, 곧다, 펼치다, 열다, 그림…' 같은 우리 말을 먼저 알고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이런 한자말은 초등교과서 한자말 가운데 30%밖에 안된다. 나머지 70% 한자말은 대표 훈으로 톺아보면 오히려 더 헷갈리고 어리둥절해진다.

이를테면, '자연수(自然數), 소수(小數), 소수(素數), 대분수(帶分數), 약수(約數)' 같은 한자말에도 같은 잣대를 들이댈 수 있는가. 한자를 안다고 해서 수학과에서 궁극으로 다다르고자 하는 개념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질 수 있을까. 아직 이런 말을 배우지 않은 아이 처지에서 한자 풀이에 기댄다면 다음과 같이 뜻을 추측할 수도 있을 것이다.

스스로 자 + 저절로 연 + 수  수  → 스스로 수(?), 저절로 수(?)
작을 소 + 수 수                       → 작은 수(?)
흴 소 + 수 수                          → 하얀 수(?)
띠 대 + 나눌 분 + 수 수            → 띠를 나누는 수(?)
묶을 약 + 수 수                       → 묶을 수(?), 묶는 수(?)

한자 훈을 안다고 해서 과연 교과에서 쓰는 뜻매김에 얼마나 더 가까워질수 있을까. 재미삼아 한번 견줘보자. 다음은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서 그대로 옮겨왔다.  

자연수(自然數) : 1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더하여 얻는 수를 통틀어 이르는 말. 1, 2, 3 따위이다.
소수(小數)  : 0보다 크고 1보다 작은 실수. 0 다음에 점을 찍어 나타낸다.
소수(素數)  : 1과 그 수 자신 이외의 자연수로는 나눌 수 없는 자연수. 2, 3, 5, 7, 11 따위가 있다.
대분수(帶分數) : 정수와 진분수의 합으로 이루어진 수
약수(約數) : 어떤 정수를 나머지 없이 나눌 수 있는 정수를 원래의 수에 대하여 이르는 말.

오히려 한자를 이미 알고 있을 때 샛길로 빠지거나 그릇된 개념에 이르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그렇다고 한다면 아이들에게 무턱대고 한자를 많이 보여준다고 해서 낱말 뜻을 더 정확하게 아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 된다.

낱말은 풀이로 외우는 게 아니라 맥락에서 배우는 것

과학 시간에 배우는 '소화'라는 말의 개념을 알려줄 요량으로 '消 사라질 소, 化 될 화' 하고 적어주었다고 하자. 한자 풀이만 보고 '우리 몸이 음식을 영양분으로 흡수하는 일' 또는 '배운 지식이나 기울을 제것으로 만듦을 빗대어 이르는 말'인 줄 알 수 있겠는가.

낱말을 안다는 건 말밑이나 사전 풀이를 외워서 아는 게 아니라 낱말이 쓰인 맥락 속에서 배우는 것이다. 똑같이 '소화'라고 쓰더라도, 아이들은 불이 일어나는 조건을 배우는 단원에서는 '불을 끈다'는 뜻으로, 우리 몸의 영양을 배우는 단원에서는 '영양분을 흡수하는 일'로 자연스럽게 알아간다.

초등학교 교과서 한자 표기가 '어휘 교육'이니 '인성 교육', '인문학 강화' 같은 아름다운 구실을 붙였지만 학부모 불안감과 이기심을 부추켜 제 뱃속을 채울 욕심만 가득할 뿐이다. 교육이라면 마땅히 아이를 먼저 생각해야 하건만 정작 한자를 배울 아이를 배려하는 마음은 병아리눈곱만큼도 없다. 발달 단계로 보면 초등교육은 낱말을 뜻 단위로 따로따로 쪼개고 외우는 분석 방법보다 맥락 속에서 절로 배우는 통합 방법으로 이뤄져야 옳다.

지난 11월 24일 헌법재판소는 공문서를 한글로 적도록 한 '국어기본법'이 헌법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린 바 있다. 동시에 초·중등학교에서 한자 교육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한 교육과학기술부 고시 또한 헌법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결정했다.

입만 열면 교육부는 '꿈을 키울 수 있는 교육, 끼를 펼칠 수 있는 교육'을 실현하겠다고 말한다. 그래서 묻고 싶다. 꿈과 끼는 과연 누구의 '꿈'이고 누구의 '끼'인가. 교육부가 과연 가치롭게 지켜야 할 교육은 과연 무엇인가. 아이들을 '교육 생체실험 대상'으로 삼아 한자 사교육과 한자 기득권 세력을 편들고, 저들의 꿈을 키우고 끼를 펼칠 수 있는 세상을 만들려는가. 교육부는 더 이상 시민을 속이지 말고 초등학교 교과서 한자 표기를 그만둬야 한다.


태그:#한자 표기, #한자 교육, #초등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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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말과 글쓰기 교육, 어린이문학에 관심이 많다.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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