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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소 냄새 나. 왜 소랑 같이 살아?"

"소도 추워. 그리고 소 듣는 데서 그런 말 하면 못써."

큰 눈망울 굴리며 김이 무럭무럭 피는 여물을 먹는 소를 보며 부엌에서 어머니에게 이렇게 물었다. 당시 집은 오색약수까지 걸어서 15분은 걸리는 산 속에 외따로 있었다. 달빛이 밝은 밤이면 방에 누워 지붕 사이로 별빛을 볼 수 있는 너와집이었다.

오색마을에 많은 눈이 내린다는 뉴스를 서울에서 듣는다. 고향을 떠나 있으면 이런 날 누구나 더 간절하게 고향이 생각되어지는 법이다. 더구나 고향에 아내와 자식을 두고 제법 긴 시간 떠나 있다면 두말 필요 없다.
▲ 오색리 설경 오색마을에 많은 눈이 내린다는 뉴스를 서울에서 듣는다. 고향을 떠나 있으면 이런 날 누구나 더 간절하게 고향이 생각되어지는 법이다. 더구나 고향에 아내와 자식을 두고 제법 긴 시간 떠나 있다면 두말 필요 없다.
ⓒ 정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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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도 거르지 않고 세월호를 기억하는 이들이 찾아와 손을 보태는 노란리본공작소엔 눈이나 비가 내려도 늘 따듯한 마음으로 가득하다. 국가와 정부가 외면하여 가슴을 치며 통곡할 때 아픔을 나눌 줄 아는 이들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이 자리가 지켜졌다. 바로 그런 이들의 마음이 세월호 가족들에겐 너와지붕을 지탱하던 누름돌 아니었을까.
▲ 노란리본공작소 하루도 거르지 않고 세월호를 기억하는 이들이 찾아와 손을 보태는 노란리본공작소엔 눈이나 비가 내려도 늘 따듯한 마음으로 가득하다. 국가와 정부가 외면하여 가슴을 치며 통곡할 때 아픔을 나눌 줄 아는 이들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이 자리가 지켜졌다. 바로 그런 이들의 마음이 세월호 가족들에겐 너와지붕을 지탱하던 누름돌 아니었을까.
ⓒ 정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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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는 물론이고 1980년대 들어서도 강원도 산골을 찾으면 굴피나 너와로 지붕을 한 집을 만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지리적 여건에 따라 백두대간의 마루금 주변에 외따로 터를 잡은 집들은 소도 사람과 함께 온기를 나눴다.

북방식 가옥의 특성으로 집안의 대소사를 모두 처리할 수 있도록 부엌은 컸다. 마당에서 보았을 때 전면으로 보이는 방과 그 뒤로 숨겨진 뒷방까지 모두 부엌에서 직접 불을 지필 수 있고, 외양간도 부엌과 함께 연결되어 부엌의 온기가 외양간까지 전해졌다.

이런 강원도 북방식 집들은 주변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들을 이용해 지어졌다. 소나무를 두껍게 깎아 부엌엔 출입문을 달고, 빗장부터 문을 받치는 지지대도 모두 소나무로 만들었다. 지붕도 굴참나무의 껍질을 벗겨 사용하거나(굴피집) 소나무를 도끼로 쪼개 넓적한 기와처럼 이용했다. 길고 굵기가 적당한 나무로 이들이 바람에 날아가지 않게 눌러주고 이 장대 위에 돌을 얹었다.

군용 통신선이 흔해 그걸로 장대들이 눈이 내려도 흘러내리지 않게 묶었다. 그 이전엔 뭘로 이 역할을 했는지 아버지께 여쭤봤던 적이 있는데, 아버지께서는 어렸을 적엔 매년 묵은 칡넝쿨을 끊어다 묶는 잡업을 했다고 하셨다. 전쟁을 치른 뒤 군 통신선이 산골에서도 어렵지 않게 구하게 되면서 더 이상 매년 칡넝쿨을 끊어다 고된 작업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고 하셨다.

바로 위에 형을 잃은 뒤 태어난 난 병약했다고 한다. 하는 행동은 영특한데 병약하다 보니 늘 잔병을 달고 살아 어머니는 또 자식 하나를 잃을까 늘 걱정이셨단다. 바람에 밤이 떨어지는 소리나 겨울철 쌓인 눈에 소나무가지가 부러지는 소리에도 놀라 깨기 일쑤였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내 가슴에 손을 얹고 토닥이셨다. 2살 아래 동생이 태어나고도 늘 동생보다 더 손이 많이 가야 했다고 한다.

그런 어머니지만 6살 이후엔 만날 수 없었다. 1977년 10월 말에서야 강원도 양구에서 만났을 때까지는 아버지 앞에서 "어머니"라는 말을 입에 올릴 수 없었다. 깊은 단잠을 재워주시던 어머니의 손길을 사라지고 입에도 올리지 못하는 일만큼 고통스러운 일도 아이에겐 없다.

어머니가 놀라 잠 깬 아들의 가슴에 얹어주시던 손이나 굴피나 너와지붕이 날아가지 않게 지그시 눌러놓던 돌은 다르면서도 같은 의미로 기억된다. 어머니의 손과 지붕에 얹어 놓았던 누름돌은 두려움에 흔들리지 않게 하는 안정감과 의지해도 되는 믿음을 지녔다.

지금 세상은 그런 믿음을 상실하여 흔들리지는 않은지?

안전하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보장도, 위험으로부터 반드시 지켜 주리란 믿음을 국가나 사회는 국민에게 확신시키지 못하지는 않은지?

그저 묵묵히 순응하며 따르는 소 같은 우리에겐 오늘 가슴을 토닥여주시던 어머니의 손이 필요하다. 바람에 너와가 날아가지 않게 지그시 눌러주던 누름돌이 필요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정덕수의 블로그 ‘한사의 문화마을’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박근혜 정권, #국정농단, #누름돌, #양양군, #너와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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