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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제관 터
 벽제관 터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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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1592년(선조 25) 4월 30일자는 동궁(광해군)이 반찬도 없이 밥을 먹는 장면을 보여준다. 하루 종일 비가 쏟아진 이날, 선조 등은 새벽에 서울을 떠나 피란길에 올랐다. 임금을 뒤따르는 사람은 종친(왕의 친척)까지 다 합해도 100명이 채 안 되었다. 그런데도 얼마나 가진 것이 없었던지, 벽제관(碧蹄館)에서 점심 식사를 할 때 왕과 왕비의 밥상에는 겨우 반찬이 얹혔어도 동궁에게는 맨밥만 주어졌다(東宮則闕膳). 병조판서 김응남이 어떻게 해보려고 흙탕물 속을 부지런히 뛰어다녔지만 아무 성과도 얻지 못했다.

명색이 다음 임금이 될 세자인데 아무리 전쟁 중이라지만 맨밥을 먹다니... 그것도 궁궐을 떠나온 지 반나절밖에 안 된 이 시간에... 선조는 국왕이라는 막중한 신분을 떠나, 그냥 아버지로서도 이 상황이 너무나 안타까웠을 법하다. 아마도 선조는 벽제관의 이날을 죽는 그 순간까지도 잊지 못했을 것이다.

결코 잊지 못한 선조의 벽제관 추억 두 가지

벽제관 전투 당시 명군이 진격해온 방향의 여석령(숫돌고개) 풍경
 벽제관 전투 당시 명군이 진격해온 방향의 여석령(숫돌고개)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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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가 결코 잊지 못할 벽제관의 또 다른 하루는 그로부터 아홉 달 뒤인 1593년 1월 27일이었을 듯하다. 이날 벽제관 전투에서 거의 죽을 뻔하다 겨우 살아난 명나라 제독(대장) 이여송이 그 이후 일본군과 도무지 싸우려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여송이 벽제관 패전 이후 전투 의욕을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은 <선조수정실록> 1593년(선조 26) 2월 1일자 기사가 단적으로 증언해준다. 이날 기사의 첫 문장은 '제독 이여송이 도로 평양에 머물렀다'이다. 1월 초에 평양을 되찾았는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도 않아 이여송은 남쪽으로의 진군을 포기하고 평양으로 되돌아갔던 것이다.

2월 1일자 기사의 두 번째 문장은 '이여송이 줄곧 개성에 머물면서 군량이 떨어져 가는데도 전진할 생각은 없이 자주 사람을 경략(총사령관 송응창)에게 보냈다. 전에 진행되었던 화의(정전 협상)를 계속해 보려는 의도였다'이다. 이여송은 1592년 9월 1일 소서행장과 명나라 심유경 사이에 있었던 휴전 협정 체결과 같은 협상을 바라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가등청정이 평양을 침범하려 한다는 헛소문이 들려오자 이여송은 "평양을 구제하겠다"면서 군사를 이끌고 떠나버리고 개성에는 왕필적을 남겨 두었다.

<선조실록> 1593년 4월 1일자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좌승지 홍진이 선조에게 "벽제관에서 패전한 후로 중국 장수들은 싸울 의욕이 없고, 제독 이여송은 오직 철군하여 돌아갈 생각만 합니다"라고 보고하는 내용이 바로 그 부분이다.

류성룡의 왕릉 수호 주장


류성룡은 명군이 평양으로 후퇴해서는 안 되는 가장 큰 이유로 이성계 이하 조선 역대 임금들의 왕릉이 적의 점령지에 있다는 점을 들었다.

실제로 1592년 12월 16일, 일본군에 붙은 전직 아전 최업의 안내를 받은 왜군 50여 명과 조선인 50여 명이 양주에 있는 명종 왕릉 강릉(康陵)과 문정왕후의 능 태릉(泰陵), 그리고 선조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의 묘소를 도굴하려다가 실패한 사례가 있었다. 이들은 곡괭이 등으로 팠지만 무덤의 벽을 뚫지 못한데다, 고언백의 공격을 받아 도굴에 실패했다(<선조실록 1592년 12월 22일 : 강릉과 태릉의 사고는  실로 고언백이 공격하여 죽여 흩어지게 한 공으로 인해 그 흉한 모의가 중지되었다.). 그 후에는 성종의 선릉(宣陵)과 중종의 정릉(靖陵)이 파헤쳐지기도 했다.

'짐이 곧 국가'인 시대에 지난 왕들의 묘소가 파괴되었으니 당시 조선 조정으로서는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유성룡은 신경진을 보내어 평양으로 군대를 물려서는 안 되는 이유 다섯 가지를 이여송에게 말한다.

"첫째, 선왕(先王)의 묘소가 모두 경기에 있는데 이곳이 지금 적의 소굴 속에 빠져 있으니 버리고 갈 수 없고, 둘째, 경기 이남의 유랑하는 백성들이 임금의 군대가 오기만 기다리고 있는데, 거꾸로 물러갔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오히려 적에게 의지할 것이고, 셋째, 우리나라 국토는 한 치라도 쉽게 버릴 수 없는 것이고, 넷째, 우리나라의 장수와 군사들이 힘은 약하지만 그래도 서로 의지하여 함께 전진할 것을 도모하는 중인데 지금 후퇴하라는 명령을 받으면 모두가 분노하여 흩어져버릴 것이고, 다섯째, 후퇴할 때 적이 뒤를 따라 붙으면 임진강 이북도 지킬 수 없다."

그러나 이여송은 아무 대답도 없이 그냥 평양으로 떠나버린다.

명군이 후퇴해서는 안 되는 다섯 가지 이유

정자각(보물 1741호) 뒤쪽 창으로 보이는 이성계의 건원릉. 묘역의 잔디가 보여주는 빛깔과, 봉분의 빛깔이 사진에서 너무나 다른 것을 보면 건원릉 봉분이 잔디가 아닌 다른 식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다. 이성계 왕릉 봉문은 잔디가 아니라 억새풀이 가득 심어져 있다. 고향을 그리워한 이성계를 위해 함흥의 흙과 억새풀로 봉분을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정자각(보물 1741호) 뒤쪽 창으로 보이는 이성계의 건원릉. 묘역의 잔디가 보여주는 빛깔과, 봉분의 빛깔이 사진에서 너무나 다른 것을 보면 건원릉 봉분이 잔디가 아닌 다른 식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다. 이성계 왕릉 봉문은 잔디가 아니라 억새풀이 가득 심어져 있다. 고향을 그리워한 이성계를 위해 함흥의 흙과 억새풀로 봉분을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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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제관 전투의 시작과 끝을 알아본다. 벽제관 전투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 문헌으로는 <선조수정실록> 1593년(선조 26) 1월 1일자 기사와 이형석의 <임진전란사>가 있다.

1월 19일 이여백(이여송의 동생)의 선봉 부대가 개성 청석골에서 적을 추격하여 30여 급을 벤 이래 개성이 탈환되었다. 이제 평안도와 황해도가 완전히 수복되었고, 경기와 강원의 일부 지역도 되찾았다. 명군 제독 이여송은 1월 25일 당당하게 개성으로 입성했다.

이여송은 여러 장수들을 개성 진중에 모아 한성 탈환 작전 회의를 열었다. 명군 중 남병(南兵)을 이끌고 있는 유격장 전세정이 "적들은 군사를 한성에 집결시키고 있으므로 경솔하게 공격할 것이 아니라 만반의 준비를 갖춘 후 움직여야 할 것입니다" 하고 신중론을 펼쳤다.

그러나 대부분의 장수들은 "적들은 지금 피로에 지쳤고, 우리는 평양을 탈환하여 승리의 여세를 타고 있으므로 일거에 한성을 들이쳐야 하오" 하며 빠른 진격을 주장했다. 도체찰사(전쟁 중 임금의 권한을 대신하여 군사 일을 총괄하는 직책) 류성룡도 빨리 한성을 탈환하고 싶은 마음에 빠른 출전을 요청했다.

류성룡은 이때 이여송에 앞서 남쪽으로 내려갔다가 돌아와 있었다. 류성룡은 명군의 진격을 지원하기 위해 먼저 가서 군대가 지나갈 요소 곳곳에 군량과 마초를 서둘러 마련해 두었다. 그 무렵은 날씨가 비교적 따뜻하여 임진강의 얼음이 녹아 있었기 때문에, 강 상류로 올라간 류성룡은 칡으로 만든 밧줄을 연결하여 다리도 만들었다. 산골짜기에 숨어 지내던 주변 여러 읍의 백성들도 이제는 어느 정도 마음을 놓고 밖으로 나와 짐을 옮기고, 다리를 놓는 일에 힘을 보탰다.

이여송이 개성으로 들어온 당일(1월 25일)에 경기도 방어사 고언백과 함께 예종의 무덤인 창릉(고양시 덕양구 창릉동) 방면에 나갔다가 벽제역 남쪽 여석현(숫돌고개)에서 적의 수색대 100여 명을 죽인 사대수는 "적은 만나기만 하면 반 이상이 도망을 칩니다. 한성을 되찾기는 아주 쉬울 듯합니다" 하고 말했다. 조선의 대신들도 "왜적이 평양에서 혼이 났으니 한성을 버리고 퇴각할 게 자명합니다" 식의 의견을 내놓았다.

평양을 탈환하면서 한껏 고무되어 있던 이여송은 속히 한성을 들이치기로 결심을 굳혔다. 하지만 작전 회의는 한성에서도 열렸다. 당시 일본군들은 함경도 방향으로 진출해 있던 2군의 가등청정 부대 2만여 명을 제외한 대부분이 한성에 모여 있었다. 회의에 참석한 일본군 장수들은 대체로 명나라의 대군이 왔으니 앞으로 전쟁이 어렵겠다는 회의론에 빠진 상태였다. 그러나 소조천융경(小早川隆景,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만은 "평양성을 탈환한 데 도취된 적들이 우리를 가벼이 여기고 함부로 덤벼들 테니 그들이 예상하지 못한 때에 기습을 하면 반드시 이길 수 있소" 하며 결전을 주장하였다.

단검만 든 기마병 1천 명 데리고 맨앞에 선 이여송

이여송이 죽다가 살아나 도망치는 벽제관 전투는 일명 여석령(礪石嶺) 전투라고 부르기도 한다. 여석령은 벽제관에서 3km가량 떨어져 있는 고개로, 우리말 이름은 숫돌고개이다. 사진은 고양 중심부에서 벽제관 쪽으로 넘어가는 숫돌고개의 오르막 부분으로, 전쟁 당시 일본군이 넘어간 방향이다. 지금은 큰 도로가 왼쪽으로 뚫려 있어 웬만한 볼일이 있는 차량이 아니면 이 길을 이용하지 않는다.
 이여송이 죽다가 살아나 도망치는 벽제관 전투는 일명 여석령(礪石嶺) 전투라고 부르기도 한다. 여석령은 벽제관에서 3km가량 떨어져 있는 고개로, 우리말 이름은 숫돌고개이다. 사진은 고양 중심부에서 벽제관 쪽으로 넘어가는 숫돌고개의 오르막 부분으로, 전쟁 당시 일본군이 넘어간 방향이다. 지금은 큰 도로가 왼쪽으로 뚫려 있어 웬만한 볼일이 있는 차량이 아니면 이 길을 이용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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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여송은 친병(親兵, 직접 거느린 군사)인 기병 1천여 명을 데리고 앞장서서 진격하면서 대군을 계속 출동시키라고 명령했다. 소조천융경이 지휘하는 일본군은 대군을 숫돌고개 뒤에 매복시킨 뒤 수백 명만 고개 위에 배치해 명군의 공격을 유인했다. 이여송이 기세좋게 나아가니 고개 위의 적들도 맞서 싸울 듯이 내려왔다. 이여송 군은 더욱 힘차게, 빠르게 말을 몰아 고개로 쳐올라갔다.

그때 갑자기 사방에서 적들이 소리를 지르며 쏟아져 나와 이여송 군을 포위했다. 적들은 거의 1만 명이나 되었다. 기마병인 명군은 단검만 지녔을 뿐 화기(대포)도 없었다. 그런데 숫돌고개 일원은 길이 험한데다 진흙이 쌓여 있어서 말이 제대로 달리지를 못했다. 명군은 긴 칼을 휘두르며 돌격해 들어오는 수많은 일본군들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명군 장수 이유승과 휘하의 용감한 병사들 80여 명이 죽음으로 길을 터주는 사이, 이여송은 사대수에게 뒤를 맡기고 구사일생으로 탈출했다. 그제야 부총병 양원이 이끄는 명군 본군이 당도했다. 적들은 명의 대군이 나타나자 철수했다.

이여송은 이제 동파(東坡)에 주둔하려 했다. 동파는 임진강 북쪽에 있는 파주시 진동면 동파리로, 화석정에서 직선거리로 강 건너 약 2.5km 지점이다. 이여송이 멀찍이 물러나 동파에 주둔하려 한다는 말을 들은 류성룡·유홍·김명원 등이 처소로 찾아가 그를 만났다.

숫돌고개 전투 때 명의 본군과 함께 움직였기 때문에 조선군이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점도 있지만, 류성룡 등은 하루라도 빨리 한성을 수복하고 싶은 마음에서 이여송에게 재공격을 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여송은 "어제 (숫돌고개 전투에서) 우리 군대가 불리했던 것은 없소. 다만 이곳은 비가 와서 진흙탕이 된 관계로 군사를 주둔시키기가 불편하므로 동파로 돌아가 장졸들을 쉬게 한 다음 다시 진군하려는 것뿐이오" 하고는, 끝내 동파로 물러가서 진을 쳤다.

뿐만 아니라 이여송은 다음날에는 개성까지 군대를 후퇴시키려 했다. 유성룡 등이 크게 반대했으나 말을 듣지 않았다. 이여송은 사대수에게 군사 수백 명을 주면서 유성룡과 함께 임진강을 지키라고 했다

이여송은 '어제 (벽제관 전투에서) 우리 군대가 불리했던 것은 없소' 하고 말했지만 숫돌고개 일대에서 죽은 명군이 상당수에 이른다는 사실은 <선조실록> 1593년 10월 1일자 기사가 증언해준다. 선조는 "벽제관에서 중국군이 많이 죽었다"면서 "중국군은 우리나라 일 때문에 죽은 것이니 먼저 치제해야 한다. 제단도 만들고, 정성을 다하여 제사를 지내야 마땅할 것이다" 하고 명령한다.

이여송이 전투를 꺼린 근본적인 이유는?

벽제관 고지 기념비. 숫돌고개과 벽제관 터의 중간 지점쯤에 세워져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이 일대는 이여송의 명나라 군대가 일본군의 매복에 걸려 대패를 했던 전투 장소이다.
 벽제관 고지 기념비. 숫돌고개과 벽제관 터의 중간 지점쯤에 세워져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이 일대는 이여송의 명나라 군대가 일본군의 매복에 걸려 대패를 했던 전투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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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벽제관에서 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여송이 더 이상 일본군과 싸우지 않으려 했다고 볼 수는 없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으니 개인적으로 겁을 먹은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여송이 벽제관 패전 이후 일본군과의 전투를 기피한 데에는 좀 더 본질적인 이유가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한명기의 논문 <임진란 7주갑의 역사적 의미>가 명확하게 분석해준다.

한명기는 <주요석화(籌遼碩畵)>에 실려 있는 명나라 신료 이징의의 "求朝鮮所以衛遼也(구조선소이위요야, 조선을 구해야 요동을 지킬 수 있고) 衛遼所以衛京師也(위요소이위경사야, 요동을 구해야 북경의 안전을 지킬 수 있다)' 발언 등을 인용하면서,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파병하여 일본군을 막아야 한다고 황제에게 건의했던 명나라 인사들이 대략 그와 비슷한 논지를 내세웠다고 말한다. 명군의 임진왜란 당시 조선 참전은 조선을 지킴으로써 요동을 보호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 이루어진 전술적 판단의 결과라는 것이다.

게다가 요동은 대부분 평지이지만 조선은 산악 지대가 많아 방어하기에 훨씬 유리하다는 계산도 한몫을 했다. 뿐만 아니라, 명군이 조선 땅에 들어가서 싸우면 자기 나라가 전쟁터로 전락하는 일도 예방할 수 있다. 싸움터가 조선 땅이므로 군량미 등 전쟁 수행에 소모되는 물자도 조선이 공급해야 한다. 뒷날 '우리가 너희 나라를 지켜주었다'라고 큰소리도 칠 수 있게 된다.

실제로 선조와 조선 조정 대신들은 명나라에 '재조지은(再造之恩, 명나라 덕분에 조선이 다시 살아났다)'의 은혜를 입었다고 굳게 믿었다. 재조지은 운운은 평양성을 수복한 뒤부터 <선조실록>에 등장하는데, 1593년 8월 27일자에 보면 비변사가 선조에게 "제독(이여송)이 떠날 때가 가까워지자 '내가 귀국(조선)에 와서 다른 것은 요구하는 바가 없고, 다만 신한(宸翰, 임금의 친필 편지)과 모든 관리들의 증시(贈詩, 바치는 시)만은 받아 후손에게 전할 가문의 보물로 삼고자 한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가 지금 전쟁 중에 있으므로 글을 쓰고 할 겨를이 없습니다마는 중국의 대장이 이처럼 간절하게 요청하니, 저버리기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묻는 대목이 나온다.

그러면서 비변사는 선조에게 "상(上, 임금)께서 증시는 하지 않더라도 크게 '再造朝鮮(재조조선)' 네 글자를 써서 이별의 선물로 주신다면 중국 대장의 요청을 들어주는 것도 되고, 우리나라가 감사의 뜻을 나타내는 데 모두 마땅할 것입니다" 하고 건의한다.

선조는 "내가 제독에 대한 일이라면 몸이 가루가 된다 하더라도 사양하지 않을 것인데, 하물며 변변치 못한 글씨이겠는가. 그러나 요사이 건강이 좋지 않아 한갓 형체만이 남아 있을 뿐 정신은 이미 빠져나갔는데, 게다가 고질병이 날로 깊어져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니, 이런 때에 붓을 놀려 글씨를 쓰기란 참으로 어렵구나. 만일 모진 목숨이 몇 년 동안 더 연장된다면 그때 글씨를 써서 그의 집으로 보내주어도 무방할 것이니, 말을 잘 꾸며 대답하라. 그리고 여러분들이 시를 써서 주는 문제는 그대들이 알아서 하라" 하고 대답한다.

벽제관 전투 당시 개성에서 남하한 명군이 진격해온 방향을 여석령(숫돌고개)에서 내려다 본 풍경. 사진 오른쪽의 설치물은 이곳 숫돌고개에서 벽제관 전투가 치러졌다는 사실을 안내해주는 해설판이다.
 벽제관 전투 당시 개성에서 남하한 명군이 진격해온 방향을 여석령(숫돌고개)에서 내려다 본 풍경. 사진 오른쪽의 설치물은 이곳 숫돌고개에서 벽제관 전투가 치러졌다는 사실을 안내해주는 해설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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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명나라가 참전한 까닭에 대해 '자기 나라를 지키기 위해 파병했다' 식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입밖으로 그것을 꺼내는 것은 금기시되었다. 심지어 국왕인 선조조차도 1593년 1월 3일 중국 사신을 영접하면서 명나라의 파병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밝혔다가 그로부터 사흘 뒤인 1월 6일 낯뜨거운 면박을 당했다.

선조가 "왜노들이 무도하여 명나라를 침범하려 하므로 작은 나라 조선의 임금과 신하들이 의리에 의거하여 (일본을) 배척하고 거절하였다가 결국 그들의 화를 돋우어 (중국보다) 먼저 흉악한 침략을 받았다'라고 한 말을 두고 중국 사신은 서릿발 같은 질타를 했다.

"만약 왜노가 명나라를 침범하려 했다면 절강이나 영파부 등지로 곧장 침범할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귀국을 경유했겠습니까. (중략) 황제 폐하께서 속국(조선)이 병화(전쟁)를 당한 것을 염려하시어 군사를 내어 구원하게 하시고, 또 유구(일본 유구열도)와 섬라(대만) 등의 나라에 명령하여 왜노의 소굴을 소탕하도록 하였으니, 귀국에서는 다만 은혜에 감격할 뿐, 쓸데없는 말을 하는 것은 부당하니 신하들에게도 주의를 주어 그런 말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선조가 대답한다.

"귀한 가르침을 받았으니 어찌 명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이제 그만 싸우기로 결정한 명군 수뇌부

평양성을 되찾고, 벽제관 전투에서는 패전한 이여송 등 명군 수뇌부는 일본군과의 전투 대신 강화 협정을 벌이기로 방향을 바꾼다. 이제 일본군이 요동으로 진출할 가능성이 없어졌으므로 본래의 참전 목적이 달성되었다. 명은 피를 흘려가며 더 싸울 마음이 전혀 없었다.

심유경이 다시 나선 강화 협상은 1597년 정유재란이 벌어질 때까지 4년 동안이나 진행됐다. 그런데 명은 자기들이 '순이(順夷, 고분고분한 오랑캐)'라고 여겨온 조선을 이 밀실 협상에서 완전히 배제했다. 조선은 주권 국가의 지위를 인정받지 못했고, 조선군의 왜적 공격은 명군에 의해 저지되었다. 이는 <선조실록> 1593년 4월 6일자에 실려 있는 평안도 관찰사 이원익의 보고가 증언해준다. 이원익은 선조에게 "심유경이 중국군에게는 왜적을 죽이지 말라고 명하고 우리 군에게도 교전하지 말 것을 명하였습니다" 하고 아뢴 뒤 크게 한탄한다.

"결국 불공대천(不共戴天)의 흉적이 온전히 돌아갈 수 있게 되었으니 너무나 통탄스럽습니다."

조선군은 한양을 떠나 남해안 일대로 철수하는 일본군을 추격하려 했지만 명군이 가로막는 바람에 출동하지 못했다. 윤근수는 조선군이 추격하려 하면 명군이 달려와 쇠사슬로 묶어서 방해한다고 선조에게 보고했고, 밀양에서는 박진이 출전하려다가 명군에 의해 하루 종일 감금당하기도 했다. 1598년(선조 31) 9월 10일자 <선조실록>에는 이순신이 "신이 주사(수군)를 정돈하여 바다로 내려가서 기회를 틈타 왜적을 섬멸하려 해도 매번 (중국 수군 진린) 도독에게 중지당하니 걱정스럽기 그지없습니다"라고 보고한 내용이 실려 있다.

판문점으로 이어지는 1호선 국도를 타고 계속 북진하여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통일로 226번지 명품주유소에 닿는다. 주유소를 끼고 오른쪽으로 꺾어 오르막으로 들어선다. 지금 보면 얕고, 좁고, 포장도 안 되어 있는 산길이지만, 이곳이 바로 임진왜란 당시 이여송이 죽을 뻔한 위기에 몰렸다가 구사일생으로 도망친 숫돌고개이다.

그저 100m 남짓밖에 안 되는 고개 정상에 오르면 거기서부터는 갑자기 포장된 2차선 도로가 나타난다. 아스팔트가 시작되는 지점의 오른쪽에 화가들의 화판대(easel)처럼 느껴지는 설치물이 보이고, 그 위에 액자 같은 것이 얹혀 있다. 도로에서 보는 이젤? 호기심을 억누르며 다가가 본다. '길에서 역사를 만난다 : 숫돌고개 이야기'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숫돌고개에서 보는 안내판
 숫돌고개에서 보는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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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돌고개는 고양시 덕양구 삼송동과 오금동, 신원동의 경계에 위치한 고개입니다. 이곳은 오래 전부터 요충지였기 때문에 임진왜란과 한국전쟁 시기에도 큰 싸움이 자주 벌어졌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돕기 위해 명나라에서 파견된 이여송 장군은 1593년 1월 27일 숫돌고개에서 일본군과 큰 싸움을 벌였지만 애석하게도 일본군의 매복에 걸려 크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싸움에서 패한 이여송 장군은 복수를 다짐하며 이곳 고개에 있던 바위에 자신의 칼을 갈았다고 하며, 그때부터 이 고개의 이름이 숫돌고개가 되었습니다. 숫돌고개 주변에는 지금도 많은 참호와 군 부대가 있어서 중요한 요충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안내판을 읽은 후 저 멀리 명군이 진격해온 공릉천 쪽 내리막을 바라본다. 이여송이 맨 앞에서 말을 달리고 있다. 평양성을 탈환한 후 지나치게 기세등등해져서 잠깐 방심한 탓에 이곳에서 일본군의 매복에 걸려 패했다. 부하들의 희생 덕분에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그가 복수를 다짐하며 숫돌을 갈았다는 전설이 조금 애처롭지만, 그래도 그 숫돌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숫돌고개에서 3km 가량 북상하면 '벽제관 고지' 기념비

숫돌고개를 떠나 약 3km 가량 북쪽으로 올라가면 대자삼거리가 나온다. 직진하면 계속 통일로이고, 우회전을 하면 호국로이다. 우회전을 하자마자 '벽제관 고지 비석'으로 위치 검색이 되는 기념비가 서 있다. '벽제관 고지(碧蹄館古址)'라는 제목의 이 기념비는 몸돌에 안내문이 붙어 있다. '이곳에서 동북방 2.5km 지점에 벽제관 고지가 있다'로 시작되는 안내문을 읽어본다.

'벽제관은 이조(조선) 9대 성종 10년(서기 1479)에 건립한 객관(客館, 숙소)으로서 중국 사신이 올 때 여기서 숙박하고 의용(儀容, 의젓한 용모)을 갖추어 입경(入京, 서울로 들어감)하는 것이 정례(定例, 정해진 예)로 되어 있었으며, 우리 사신이 중국에 들어갈 때에도 쉬어가던 곳이다. 그 후 일제 초기에 50여 칸이 헐리고 2동만 남아 있었으나, 6.25전란(1950년)으로 불타버리고 지금은 주춧돌만 남아 있다.

고언백


고언백은 임진왜란 당시 양주목사, 경기도 방어사, 경상좌도 병마사 등으로 있으면서 벽제관 전투, 대동강 왕성탄 전투, 경북 안강 전투, 한성 탈환 전투, 한강 노원평 전투, 행주산성 전투, 1차 울산성 전투 등 크고 작은 싸움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그러나 광해군 들어 모반 혐의로 죽임을 당하는 (광해군의 형) 임해군의 심복이라는 이유로 처형되었다.

고언백의 활동이 남긴 임진왜란 초기 유적에는 건원릉(健元陵)이 있다. 건원릉은 조선 건국 시조 이성계(1335-1408)의 능으로, 봉분이 잔디가 아니라 억새로 덮여 있는 특이한 무덤이다.

그렇게 된 것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강했던 이성계가 고향 함흥에서 가져온 흙과 억새풀로 봉분을 만들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기 때문으로 전해진다. 고언백은 전쟁 초 건원릉을 지키는 임무를 스스로 자청하여 잘 완수했다. 건원릉은 구리시 동구릉로 197의 동구릉 안에 있다.
그리고 이 부근은 임진왜란 때 피아 5만의 대군이 격돌한 고전장(古戰場, 옛 전쟁터)으로, 명의 이여송이 지휘하는 조·명연합군과 소조천융경과 입화종무가 이끄는 일군이 격전(1593년 1월 27일)을 벌였으며 당시 이 싸움에 경기도 방어사 고언백 장군이 참전하여 일군을 무찌르고 많은 공을 세웠다.'

안내문은, 기념비가 있는 지금 이곳이 벽제관가 아니라 동북쪽으로 2.5km 정도 올라가면 그곳에 벽제관 터가 남아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 부근이 임진왜란 때 명군과 일본군 5만여 명이 뒤엉켜 혈전을 벌였던 벽제관 전투의 현장이라고 안내하고 있다. 당시 일본군은 숫돌고개에서 이여송을 반죽음으로 몰았고, 그 이후 기념비가 있는 이곳으로 추격을 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북쪽으로 4km쯤 되는 해음령을 넘어 명군 본군이 몰려오자 더 이상 전투를 벌이지 않고 퇴각했다.

사적 144호인 벽제관 터는 벽제관고지비석에서 호국로를 따라 약 3km 가량 북상하면 나타나는 고양동 주민센터 바로 뒤에 있다. 벽제관은 중국 사신이 한양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묵으면서 몸과 옷을 깔끔하게 가다듬은 마지막 숙소였지만, 지금은 터만 남고 건물들은 모두 사라져 버렸다. '벽제관지 사적 제144호 고양시 덕양구 벽제관로 34-16'이 위에, 본문이 아래에 적힌 현지 안내판을 읽어본다.

'이곳은 조선 시대 역관(驛館, 머물러 쉬는 집 역할의 공공기관)터로서 중국을 오가던 고관들이 머물던 곳이다. 조선 시대에는 한양에서 중국으로 통하는 관서로(關西路)에 역관이 10여 군데 있었는데, 한양에 들어가기 하루 전에 반드시 이곳 벽제관에서 숙박하고 다음날 예의를 갖추어 들어가는 것이 관례였다. 또한 중국으로 가는 우리나라의 사신들도 이곳에 머물렀다.

지금의 벽제관 터는 인조 3년(1625) 고양군의 관아(官衙, 관청 건물)를 옮기면서 지은 객관 자리로 일제 강점기에 건물의 일부가 헐렸고 6.25전쟁 때 문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불타 버렸다. 그후 객관의 문도 무너져서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 건물의 중앙의 청사와 좌우의 익사(翼舍, 본채 좌우로 날개처럼 배치된 집)로 구성되는데, 모두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벽제관 터
 벽제관 터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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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터가 황량하다. 임진왜란, 조선 말기 일본의 침략, 6.25전쟁이 벽제관을 없애버린 탓이다. 즉, 명나라 군대가 벽제관에 불을 지른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선조실록> 1600년(선조 33) 3월 11일자에 이헌국이 선조에게 "교외에 나가 보니 논밭이 황폐되어 사람의 자취가 끊겨 있었습니다"라면서 "왜적이 물러간 것이 오로지 중국군의 덕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모든 것이 다 없어져버린 이유도 역시 중국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 내용이 떠오른다. 재조지은의 발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이헌국이 조선이 이렇듯 황폐화된 것 또한 명나라 군대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는 광경이 놀랍다.

진정한 자주 독립 국가라야 백성의 삶을 지킬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백성들 사이에는 "명군은 참빗, 일본군은 얼레빗"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침략군인 일본군은 그래도 좀 엉성하게 빼앗아갔는데, 지원군인 명군은 오히려 촘촘하게, 악착같이 조선인들을 약탈했다는 뜻이다. 이이화는 <조선과 일본의 7년전쟁>에서 '명군은 틈만 나면 약탈과 강간을 일삼았다. 일본군은 처음 서울에 들어와서는 이런 짓을 삼갔다.'라고 썼다. 벽제관 전투의 현장 숫돌고개와 벽제관고지비석을 보며 진정한 자주 독립 국가의 소중한 가치를 다시 한번 깨닫는다.

<고양 벽제관의 역사> (벽제관터 입구 안내판)


고양시 덕양구 고양동 읍내마을에 위치한 벽제관지(址, 터)는 고양향교, 향교골 은행나무와 함께 이 지역의 오랜 역사를 보여주는 문화유산이다. 이곳 지명을 고양동이라 하는 것도 1625년부터 1914년까지 280년간 고양군청과 벽제관 같은 중요한 공공기관이 있어 붙여진 것이다.

고양동은 파주, 양주, 고양 지역이 만나는 곳으로 예부터 교통의 중심지로 유명하였다. 고려의 수도였던 개
성과 조선의 수도인 한양을 연결하는 곳이었고, 중국의 사신과 우리나라의 고위 관리 등이 자주 지나는 경의대로(연행로, 의주로, 관서대로)의 중심 건물이 벽제관이었다.

벽제관은 처음 이곳에서 서쪽으로 3km가량 떨어진 고골(古邑, 옛읍)에 지어졌다. 이후 임진왜란 등으로 훼손되고, 당시 고양군청이 1625년 현재의 고양동으로 옮기면서 벽제관도 고양향교와 함께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게 되었다. 고양의 벽제관은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기록을 보면 세종 원년(1419)에 중국 사신을 효령대군, 영의정 유정현 등이 영접했다는 내용을 시작으로 수십 차례 기록에 보이는 중요한 장소였다.

그러나 벽제관은 사신 영접의 기능 이외에도 고양군수가 전패(殿牌, 임금을 상징하는 殿자를 새긴 나무 조각)와 궐패(闕牌, 중국 황제를 상징하는 闕자를 새긴 나무 조각)를 모시고 임금께 예를 올리는 장소였고, 외부에서 온 관리나 손님이 머물렀던 공용의 숙박 장소였으며,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가 지방 소송에 대하여 재판하는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특히 벽제관은 인근에 조선 시대 왕릉이 있어 이곳을 임시 궁궐인 행궁(行宮)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1900년대 초반에 촬영한 사진에는 이곳 벽제관의 옛 모습이 잘 남아 있다. 우선 입구에는 삼문(三門)이 있는데 여기에 벽제관이란 현판이 쓰여 있고 중문(中門)에 태극무늬가 그려져 있다. 일설에는 명필 한호(韓濩) 한석봉의 현판 글씨라 전해진다.

삼문 안쪽 정청 건물은 현재 터만 남아 있는데 전돌과 마루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정청 좌우에는 방이 딸린 동익헌(東翼軒)과 좌익헌(左翼軒)이 있었다. 옛 기록에는 행랑, 중대랑 즉청방, 익랑, 하마대 등이 보여 지금보다 훨씬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곳 벽제관지는 1998년 경기도박물관, 연세대학교에서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는데 사진과 유사한 건축물 발굴 결과가 나왔고, 당시 명문 기와와 도자기, 동전, 못 등 187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특히 삼문 동쪽 계단에서 '벽제'라 쓰인 석물이 발견되어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태그:#벽제관, #이여송, #고언백, #숫돌고개, #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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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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