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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 한눈에

  • 중국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 노력했는데도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면 '방법이 없다(??法)'며 쉽게 수긍해 버립니다. 아마도 공자의 지천명 사상에 익숙해져서 그러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중국 사람이 생각하는 공자 사상과 유학, 그리고 한국 사람이 생각하는 공자 사상과 유학이 어떻게 다른지 알아보기 위해 먼저 중국 곡부시에 있는 공자 기념관 공묘(孔廟)를 소개합니다.

한국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공자 기념관 공묘

중국 산동성 곡부시에 있는 공묘 입구
 중국 산동성 곡부시에 있는 공묘 입구
ⓒ 김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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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는 중국 산동성 제녕시 곡부에서 태어나고 생활했습니다. 그래서 곡부에는 공자와 관련된 유적지가 많은데 사람들이 자주 가는 장소는 공묘, 공부, 공림 이렇게 세 곳입니다. 그중에서 공자의 사상을 기리는 장소가 공묘입니다.

한국어로 '묘'로 발음되기 때문에 공자 무덤으로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공묘(孔廟)에서 '묘(廟)'는 우리나라 조선 시대 왕들의 신주(神主)가 있는 서울 종로구 종묘(宗廟)의 '묘(廟)'와 같습니다. 그러니까 공묘에는 공자의 신주가 있는 거지요.

신주(神主)는 죽은 사람의 이름과 사망한 날짜를 적어 죽은 이의 혼을 모셔두는 나무 조각인데 우리나라에서 제사 지낼 때 제사상에 놓아두는 지방과 같은 겁니다. 쉽게 표현하면, 저 같은 보통 사람이 죽으면 저의 사후 이름표는 지방으로 불리고, 살면서 한 가닥 한 사람이 죽으면 사후 이름표가 신주 또는 위폐로 불립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뼈대 있는 오래된 양반 가문은 가옥 공간에 사당이라는 건물을 짓고 그 안에 조상의 이름을 적은 위폐(지방)를 모셔둡니다. 한국 양반이나 중국 귀족 집안에서 조상 이름표를 보관하는 건물을 사당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나라의 통치자인 황제나 왕의 사후 이름표를 보관하는 장소를 묘(廟)라고 합니다. 일반인들이 조상 이름표가 있는 건물을 묘(廟)라고 이름 지으면 반역죄로 잡혀 죽습니다. 

공묘 대성전에 있는 공자의 신위 모습
 공묘 대성전에 있는 공자의 신위 모습
ⓒ 김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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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묘(孔廟)는 공자의 혼을 모신 건물이 있는 장소로 공자의 사상을 대표하는 공간입니다. 황제나 왕이 아닌 일반인인데 사후 이름표를 보관하는 건물이 묘(廟)로 불리는 경우는 중국에서 공자와 맹자, 관우 등 몇 사람밖에 없습니다. 공묘(孔廟)라는 건물 이름에서 중국에서 공자는 황제와 동급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바지사장 노나라 제후  

공자는 기원전 551년 노나라(현재 중국 산동성 곡부시)에서 태어나 기원전 479년에 죽었습니다. 공자가 살았던 시대 노나라 상황은 복잡했습니다. 당시 노나라 제후(실제는 '왕'이었으나 당시에는 '제후'라고 불렀습니다)는 바지사장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노나라 제후는 직위만 국가 책임자이고 실제는 세 귀족 가문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이 세 가문이 서로 협조하고 때론 싸우며 돌아가면서 노나라를 통치했습니다.

어느 조직이나 대장이 실권이 없으면 조직이 잘 운영되지도 않고 그 조직에 속한 사람들 생활이 힘들어집니다. 대장 한 사람만 조직원들에게 세금을 걷어야 하는데, 실권자 여러 명이 각각 여러 명목으로 세금을 뜯어가면 당연히 그 조직에 속한 사람들 살림살이는 팍팍해집니다.

세상에 권선징악은 없다

공자가 살던 노나라는 주변 어느 나라보다도 도덕적 정통성이 있었습니다. 노나라를 세운 주공은 주나라를 세운 문왕의 둘째 아들로, 형인 주나라 무왕이 죽은 후, 나이 어린 조카 성왕을 대신해 나라를 운영하다가, 성왕이 성인이 된 후 조카에게 깨끗하게 실권을 넘겨 주었습니다.

이런 도덕적 정통성을 가진 노나라가 공자 시대에 와서 제후(왕)가 실권을 잃고 귀족 신하들이 판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이런 상황에 직면한 공자는 그때까지 하늘에 있는 초자연적인 그 무엇인가가 세상을 올바르게 이끌어 간다는 생각을 의심하게 됩니다. 그래서 공자는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하늘 신의 존재나 사람이 죽은 후에 혼으로 변해 귀신으로 존재한다는 생각을 믿지 못하게 됩니다.

공자는 제자가 귀신과 사후 세계에 관해 물었을 때, '사람의 일도 아직 잘 모르는데 귀신의 일을 어떻게 알겠느냐, 또 살아생전의 일도 아직 잘 모르는데 죽어서의 일을 어떻게 알겠느냐'라고 답합니다.

그러니까 귀신이 있는지 없는지, 사후 세계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는 말입니다. 누구나 잘 모르는 일은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공자는 사람 사는 세상의 일은 사람이 해결해야 하고, 사람이 세상일을 해결하는 이데올로기로 '인(仁)'이라는 사상을 만들게 됩니다.

공묘 대성전 앞에서 공자에게 예를 표하는 중국 대학생들
 공묘 대성전 앞에서 공자에게 예를 표하는 중국 대학생들
ⓒ 김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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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공자의 사상은 오늘날 시각으로 봤을 때도 상당히 합리적입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은 사람이 해결해야지,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신이나 귀신이 해결해 주지 않습니다.

공자의 현실주의적인 사상을 2500년 동안 교육받은 중국 사람은 매사에 현실적입니다. 중국 사람은 하늘에 신이 있고, 사람이 죽어서 귀신이 된 후 생전에 착한 일을 많이 하면 극락이나 천당에 가고 나쁜 일을 많이 하면 지옥에 간다는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중국에서 초자연적인 신의 존재나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되어 극락이나 지옥에 간다는 종교는 대부분 실패했습니다. 1850년 중국에서 태평천국 난을 일으킨 홍수전이라는 사람은 자신이 기독교 예수의 동생이라며, 기독교의 천국을 현실에서 이루겠다고 했습니다. 이래야만 사람이 모입니다.

현실적인 실제 일에만 관심 있는 중국 사람의 행동 양식이나 사고방식은 공자의 현실주의 사상에서 연유합니다. 그런데 중국 사람들이 이렇게 공자의 현실주의 사상으로 생활하다 보니 문제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한국에서는 상대방이 도덕과 상식에 벗어나는 생각이나 행동을 하려고 하면, '하늘이 보고 있다''하늘이 무섭지도 않냐''하늘에서 천벌을 받는다'라며 세상일은 결국 권선징악에 따라 결말이 나니 항상 하늘을 염두고 두고 미리 생각과 행동을 조심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공자는 세상일을 관장하는'하늘'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중국 말 '사람의 일은 하늘이 보고 있다''사람의 일은 하늘에 달렸다'(人在做天在看)'는 한국과는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중국에서 '하늘이 보고 있다(人在做天在看)'는 상대방이 좋은 일을 했는데도 보상받지 못했을 경우, 또는 상대방이 나쁜 일을 했는데도 벌을 받지 않을 경우 즉 어떤 행동에 대한 결과가 상식과 벗어났을 때 그 결과를 수용하는 방법으로 사용됩니다.

한국에서처럼 미리 행동과 생각을 조심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이미 행동한 결과에 대한 평가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다른 사람만 모른다면 내가 어떤 행동을 하든 전혀 꺼릴 게 없는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일상생활에서 중국 사람들이 왜 서로를 믿지 못하는지 그 이유를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중국 사람들의 현실적인 생활양식과 사고방식에서 공자의 사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나이 오십이면 지천명

초자연적인 하늘의 힘을 믿지 못한 공자는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생기는 여러 일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인(仁)'이라는 사상을 만들게 됩니다.

제가 유학자가 아니라서 '인(仁)'에 담겨있는 심오한 내용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공자의 논어 글귀를 설명하는 한국 네이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과 중국 바이두 '신화사전'을 참고하여 한국 사람이 생각하는 공자 사상과 중국 사람이 생각하는 공자 사상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공자는 논어에서 극기복례위인(克己復禮爲仁)이라고 했습니다. 극기복례를 하면 공자의 사상 인(仁)을 행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한국 사전에서는 극기복례를 '자신의 의지로 사욕을 극복하고 예법을 갖춘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현대어로 바꾸면 욕망을 이기고 도덕적인 인간이 되자는 거지요.

중국 사전에서는 극기복례 단어 설명뿐 아니라, 유래에 관해서도 설명합니다. 공자가 살았던 노나라는 주나라의 예법을 따랐는데, 주나라 예법에는 각종 행사 진행 중에 전문 댄서들이 춤을 추었습니다. 그래서 천자의 행사에는 가로세로 8줄로 총 64명의 댄서가 춤을 추고, 제후 행사에는 가로세로 6줄로 총 36명이 춤을 추고, 대부 직급 행사에는 가로세로 4줄로 16명이 춤을 추었답니다.

노나라 행사에서도 이렇게 춤을 추지 않았을까?
 노나라 행사에서도 이렇게 춤을 추지 않았을까?
ⓒ 김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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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공자가 살았던 시대 노나라에서는 제후(왕)가 바지사장이다 보니, 대부 직급의 귀족이 행사를 진행하면서 64명의 댄서를 불러서 권세를 자랑하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노나라 대부 직급의 귀족이 천자 행세를 한 거지요.

예법을 중시하는 공자는 이러면 사회질서가 무너져 세상이 혼란해진다고 생각했는가 봅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신을 억제해서 주나라의 예법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극기복례라는 글귀를 논어에 남겼습니다. 주나라의 예법에서는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한다며 자신이 속한 등급에 따른 규범을 지킬 것을 강조했습니다.

중국 사전에서는 극기복례를 '사회 구성원들은 자신이 속한 등급의 규범을 준수한 주나라의 예법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미묘하게 의미가 다르긴 하지만 위의 두 나라 설명을 종합하면 '자신이 속한 등급의 규범을 지켜 안정된 사회를 이루자' 이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공자는 사회안정을 위해 권세 있는 대부 가문에게 자중하라는 의미로 이런 말을 했을 겁니다.

하지만 후에 국가 통치자와 유학자들은 '니 꼬라지를 알고 쭈그러져 있어라'라고 해석하며 기득권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 이론으로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공자 모습을 새긴 비석 탁본
 공자 모습을 새긴 비석 탁본
ⓒ 김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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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오십이면 지천명(知天命)도 공자의 말로 논어에 나옵니다. 극기복례(克己復禮)처럼 지천명(知天命)에 대한 해석도 한국과 중국이 다릅니다. 이번에는 아주 다릅니다.

한국 사전에서는 지천명을 '사람이 나이가 오십이 되면 우주 만물을 지배하는 하늘의 명령이나 원리를 안다'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런데 공자는 초자연적인 하늘의 명령과 원리가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중국 사전에서는 '사람이 나이가 오십이 된 후에야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없는 일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라고 해석했습니다. 중국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 노력했는데도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면 '방법이 없다(没办法)'라며 쉽게 수긍해 버립니다. 아마도 공자의 지천명 사상에 익숙해져서 그러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여기까지가 중국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공자 사상입니다. 공자 이후로 여러 유학자가 공자 사상에 본인의 생각을 덧붙여 또는 공자 사상을 본인의 주관으로 해석해서 유학이라는 종교, 철학을 만듭니다.

중국 사람들은 공자의 현실주의와 지천명 사상에 익숙합니다. 하지만 공자 이후의 유학자들이 만든 유학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중국사람은 '공자'라는 단어를 들으면 가장 먼저 '논어' 책과 '위대한 스승'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립니다.

한국사람이 '공자' 하면 생각하는 '유학'과 '삼강오륜'이라는 단어는 공자 사후 유학자들이 만들었습니다. 물론 후세의 유학자들은 공자의 사상을 기초로 했다고 주장합니다.

다음 편에서는 후세 유학자들이 공자의 사상을 어떻게 발전, 변형시켜 유학을 만들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태그:#중국, #중국여행, #중국문화, #중국생활, #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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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중국사람이야기>,<중국인의 탈무드 증광현문>이 있고, 논문으로 <중국 산동성 중부 도시 한국 관광객 유치 활성화 연구>가 있다. 중국인의 사고방식과 행위방식의 근저에 있는 그들의 인생관과 세계관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어, 중국인과 대화하고 있다.

공연소식, 문화계 동향, 서평, 영화 이야기 등 문화 위주 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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