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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히니비아.
 로히니비아.
ⓒ 조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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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달에 장기 세계 일주를 떠난다. 여행의 주제는 '지속가능한 삶'이다. 이런 독특한 여행 주제를 선정하게 된 건 2년 전 여행 중 만난 어떤 남자 때문이다. 그 남자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여기가 비좁다고 느껴질 때마다 로히니비아에 대해 생각한다. 너무나 조용해서 내가 눈 밟는 소리와 혼자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소리마저 메아리가 되어 귓전을 울리던 곳. 세상 어디에서도 만나보지 못했던 이상한 핀란드 아저씨가 있던 로히니비아.

2014년 3월 말, 서울에는 목련과 벚꽃이 피어나는데 나는 눈과 호수의 나라, 핀란드로 그 중에서도 춥다는 북극 지방으로 날아갔다. TV에서 본 본 핀란드 사우나가 어째서인지 너무 해보고 싶었다. 핀란드 전통 사우나는 자작나무 숲, 가족 대대로 이어 받은 통나무 집에 전기를 사용하지 않고 순전히 커다란 돌을 뜨끈하게 푹 데워 그 위에 찬물을 가득 부어 증기를 만들어 낸다.

사우나가 끝난 후에는 눈밭에 뛰어들어 알몸을 굴리거나 얼음같이 찬 호수에 첨벙 뛰어든다. 사우나에서 막 나와 온몸에 김이 펄펄 나는데도 아랑곳 하지 않고 눈밭으로 뛰어드는 핀란드 사람들의 모습이 부러웠다. 내가 가지지 못한 자유를 가진 것처럼 보였다.

내 세상의 한계를 보여준 핀란드 아저씨의 삶

자작나무 숲 한가운데서 사우나를 즐길 수 있는 숙소를 찾다가 우연히 발견한 집이 주카 아저씨네 집이었다. 아저씨네 집은 로히니비아라는 인구 80명의 작은 마을에 있다. 내가 그리던 자작나무 숲 속 통나무 사우나가 있는 집들은 대개 숙박료가 하루에 10만 원을 훌쩍 넘었다. 주카 아저씨네는 달랐다. 아저씨네 집 숙박료는 식비까지 포함하여 단돈 1만 6000원. 높은 가격에 좌절하다가 구세주를 만난 심정으로 주카 아저씨네에 예약을 했다.

헬싱키에서 야간열차와 고속버스를 번갈아 타며 13시간 만에 도착한 로히니비아 버스 정류장은 한산했다. 숲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2차선 고속도로가 있고 버스 정류장 바로 뒤에는 작은 주유소, 카페, 그리고 슈퍼마켓이 있었다. 주카 아저씨가 만약 불한당이어도 최소한 굶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무렵 저 멀리 어떤 키 큰 백인 남자가 개 한 마리를 끌고 나타났다. 주카 아저씨다. 어깨까지 오는 부석거리는 갈색 머리를 질끈 묶고 마른 몸매에 짙은 갈색의 스웨터를 입은 사람이다. 여느 핀란드 사람처럼 뭔가 알 수 없는 속내를 꼭꼭 숨겨둔 듯이 수줍고 차가운 얼굴에 회색빛 눈동자가 조용히 빛나는 얼굴.

버스정류장에서 30분을 걸어가니 자작나무 숲 한가운데 아저씨네 통나무집이 있다. 집안 대대로 물려받은 100년 넘은 낡은 통나무집 현관에는 거대한 뿔이 달린 염소 머리 헌팅 트로피가 기묘한 눈동자를 뽐내며 걸려있었다. 집 앞마당에는 아무런 발자국 한 번 나지 않은 순백의 눈밭이 끝 모르게 펼쳐져 있었다. 사방 어디에도 사람의 흔적이 없는 지독하게 고립된 곳이었다.

이 외딴 숲 속에서 주카 아저씨는 임신한 여자친구와 살고 있다. 마침 여자친구는 임신한 몸을 이끌고 태국에 여행을 갔다. 숲 속 통나무집에 나와 아저씨 단둘이서 3박 4일을 지내게 됐다. 걱정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두려움 보다는 아저씨에 대한 호기심이 앞섰다.

쉽게 정의 내리자면 주카 아저씨는 아나키스트다. 3년 전만 해도 근처 큰 도시에서 바텐더로 생활했지만, 쇼핑 중독이었던 전 부인과 이혼 후 고향 로히니비아로 돌아왔다. 아저씨는 여기서 매달 30만 원의 생활비로 지낸다. 민박과 재활용품 수집으로 약간의 돈을 벌고 농사와 사냥을 하며 생활을 영위한다.

아저씨네 생활용품은 기본이 30년 이상이다. 100년 된 나무 스키는 니스칠이 다 벗겨져 광택이 나질 앉아도 눈밭 위를 활주하는 데 문제없다. 50년 된 세탁기도 플라스틱 부속 하나 없이 온통 철로만 만들어져 세월의 힘에 끄떡없이 잘 버틴 듯했다. 30년 된 하얀색 접시는 살짝 누렇기는 해도 관리가 잘 된 탓일까 금간 흔적 하나 없이 말끔했다.

"난 300유로면 충분해... 돈은 더 필요치 않아"

"아저씨, 핀란드는 복지 국가잖아요. 근데 아저씨는 아나키스트고. 나라에서 주는 돈은 그래도 받죠? 공짠데."

"아니. 한 푼도 안 받아. 기초 생활비로 1000유로 정도 받을 수 있긴 하지만 난 자본주의 시스템에 단 1%도 참여하고 싶지 않거든. 그래서 우리 집 숙박비도 그렇게 싼 거야. 난 월 300유로면 충분해. 물론 나도 여기서 제대로 사업 벌여보고 싶어. 식당도 하고 게스트하우스도 번듯하게 지어보고 싶어. 하지만 역시 나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끼어들고 싶지 않아."

내게 자본은 한계였다. 도저히 무너뜨릴 수 없는 철옹성이었다. 서울에서는 돈이 없으면 친구와 수다 떨기 위해 전화 한 통 걸 수 없다. 6000원 하는 야채죽이 비싸 2500원 하는 김밥을 먹곤 했다. 하지만 주카 아저씨의 세상은 가격표가 없었다. 모든 것이 1만 6000원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나 같았다면 사우나나 스키를 타려면 추가비용을 내라는 식으로 어떻게든 추가 요금을 받으려 애를 썼을 텐데 아저씨는 더 이상의 돈을 요구하지 않았다. 아저씨의 계산 방법은 내 자본주의적 한계선을 흔들었다.

아저씨의 세계는 참으로 이상했다. 집에서 30분 떨어진 슈퍼로 재활용품을 팔러 가기로 했다. 핀란드에서는 유리병, 플라스틱 등의 물품을 모아 슈퍼에 가져가면 재활용품 환급금을 준다. 동네 슈퍼에 가기 위해 나는 100년 된 나무 스키를 신고, 아저씨는 쓰레기 운반용 썰매까지 끌며 쇼트 스키를 탄다. 극동에서 온 소녀와 핀란드 아나키스트 아저씨가 쓰레기 썰매를 끌며 얼어붙은 강과 순백의 자작나무 숲을 가로지르는 기묘한 풍경. 스키를 타고 얼음 위를 내달리는 소리가 또렷하게 메아리가 되어 들려왔다.

"스-윽, 스-윽."

슈퍼에 가다가 갑자기 아저씨가 방향을 튼다. 이웃집을 방문해 그 집 재활용품을 모두 거둔다. 아저씨는 산더미같이 많은 재활용품을 썰매에 구겨 넣는다. 1시간 가량 스키를 타고 슈퍼에 도착하니 내 다리는 자꾸만 힘없이 주저앉는다.

내가 잠깐 슈퍼 앞 벤치에서 쉬는 사이 아저씨는 슈퍼 주변을 한 바퀴 돌더니 찌그러진 빈 콜라 캔을 집어 들었다. 찌그러지고 흠집이 난 빨간 캔 안에는 진흙과 쓰레기가 가득 차 있다. 아저씨는 힘껏 캔을 탈탈 턴다. 캔 안에서 오물이 쏟아져 나왔다. 아저씨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캔마저 재활용품 수거함에 넣었다. 슈퍼에서 재활용품 판매로 번 돈은 4유로 쯤이다. 스키 타고 슈퍼를 간 것도 난생처음인데 돈까지 벌었다. 온통 처음 하는 신기한 일들이다.

아저씨의 세상은 내 세상의 한계를 보여줬다. 아저씨의 세상은 자신이 믿는 것과 삶이 닮아있었다. 천연자원을 낭비하고 제 3세계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자본주의가 싫은 아저씨는 자신의 한계선을 재설정하기 위해 도시에서의 삶을 포기하고 자급자족의 삶을 택했다. 나의 삶이 자꾸 비교됐다. 몸만 간신이 들어가는 비좁고 똥 냄새 나는 우리에서 짧은 생을 마감하는 양계장 닭들이 불쌍하면서도 당장 내 혀에 달콤한 치킨을 포기할 수 없었다. 예수를 믿는다지만 교회에 십일조만 할 뿐 교회 밖의 힘없는 이들을 위해 그 흔한 봉사활동조차 하나 하지 않는 내 삶의 한계가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사람들은 '어쩔 수 없잖아, 그게 내 한계인 걸' 혹은 '남들도 다 그렇게 살잖아'라며 세월호나 비정규직 문제 같은 일들에 눈을 감아 버린다. 하지만 나는 달라지기로, 아니 달라질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이 믿는 바대로 살아가는 주카 아저씨의 괴짜 같은 삶이 내 한계선을 자꾸 흔들었기 때문에. 핀란드에서 돌아온 후 나는 채식을 시작했다. 열심을 다해 다니던 대형 교회를 그만두고 세월호 집회에 나가고 지역 아동센터에서 봉사활동을 했다.

운영하는 가게에서 손님들에게 욕을 먹고 쓰라린 상처에 힘이 들면 나는 아무도 없고 아무것도 없던 눈 덮인 로히니비아를 떠올린다. '어쩔 수 없잖아'라며 자꾸만 세상과 타협할 때 내 한계선을 흔들던 주카아저씨를 떠올린다.


태그:##세계일주, ##핀란드, ##아나키스트, ##지속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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