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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학교 3학년이다

'대학교 3학년'을 달리 부르는 말이 있다. '사망년'. 온갖 스펙을 준비하느라 고통을 받아 사망할 것 같은 학년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나는 대학교 3학년이다. 사실 내가 사망년이라는 단어에 해당되는지는 체감되지 않는다. 다만 좋은 학점을 받기 위해 공부하고, 한 달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고, 토익 점수를 올리기 위해 짬짬이 영어 단어를 외우고, 스펙을 쌓기 위해 공모전을 하는 나의 일상은 사망년이 묘사하는 일상과 닮아 있었다. 친구들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

대학교 4학년은 더 하다. 그들은 말 그대로 취업준비생으로 사망년의 일상에 자기소개서 쓰기, 인적성검사 시험 및 면접 준비 등이 추가된다. 4학년이 된 동기들의 모습을 보면, 시간이 이대로 멈추길 바라게 된다.

그러나 IMF 경제위기 이후 최고치를 경신한 청년실업률은 내려올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취업의 문은 좁아져만 간다. 자연히 학생들은 취업활동에 더욱 매진하게 된다. 취업을 제외한 사안들은 관심 밖으로 밀려 나갔다. 특히 정치적 사안이 그랬다. 연애마저 포기한 학생들에게 정치는 사치였다.

그럼에도 대학생들은 거리에 나섰다

박근혜즉각퇴진 5차 범국민대회에 참가한 시민, 대학생들이 26일 오후 청와대 방향 소격동 국립현대미술관앞까지 행진을 벌인 뒤 자유발언, 노래부르기 등을 하고 있다.
▲ 촛불시민들 소격동 청와대입구까지 행진 박근혜즉각퇴진 5차 범국민대회에 참가한 시민, 대학생들이 26일 오후 청와대 방향 소격동 국립현대미술관앞까지 행진을 벌인 뒤 자유발언, 노래부르기 등을 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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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24일 JTBC의 최순실 태블릿PC 보도 이후, 대학생들은 거리에 나섰다. 투표를 안 한다고, 정치에 관심이 없다고 욕을 먹던 바로 그 대학생들이 말이다. 그만큼 박근혜 게이트는 전례 없는 국정혼란을 야기했다. 대다수 국민들과 마찬가지로 대학생들도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헌법이 유린된 상황에서 이번마저 정치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도 기업의 신입사원 채용 계획은 예정대로 진행된다. 박근혜 게이트로 모든 게 멈췄기 때문에 학생들이 거리로 나온 것이 아니다. 인적성 시험, 면접 등은 예정대로 실시되고 있으며, 각종 공모전 또한 평소와 똑같이 진행되고 있다. 그럼에도 학생들은 광화문에 모였다. 나와 거리 행진에 함께 했던 친구들은, 면접을 보고 왔으며, 인적성 시험을 치렀고, 귀가하자마자 공모전을 준비했다.

"여러분이 시위할 때 다른 4900만명은 무엇인가 하고 있다"...?

이봉진 자라코리아 사장의 강연 중 발언이 논란이다. 사진은 지난 2008년 자라의 한국 첫 매장 오픈 행사 당시 모습. 사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이봉진 사장이다.
 이봉진 자라코리아 사장의 강연 중 발언이 논란이다. 사진은 지난 2008년 자라의 한국 첫 매장 오픈 행사 당시 모습. 사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이봉진 사장이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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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미래는 여러분이 책임져야 한다. 정치가 여러분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으며, 여러분은 공부만 하면 됩니다. 어떤 상황이나 위치에서도 감정과 분위기에 휩쓸리지 마세요."

지난 22일 자라코리아 이봉진 사장이 한 대학 강연에서 발언했다는 내용이다. 한 순간에 시위에 참여한 대학생들은 '공부도 안 하고, 쉽게 감정과 분위기에 휩쓸리는' 존재가 돼버렸다. 더 나은 미래에 일조하기 위해, 바쁜 취업활동 속에서도 거리에 나선 학생들을 비하하는 발언이었다. 발언 내용이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의 질타를 받았고, 이에 그는 직접 해명 글을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어쩌면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적잖은 학생들이 공부하고 취업준비하기 바쁜 와중에도 변화를 위해 거리에 나섰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대학생들은 최저임금 1만 원을 요구하며 파업에 나섰다. 한 학기 등록금이 400만 원을 웃도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학생들은 반값등록금 운동을 진행했다.

세월호 참사가 있은 후, 세월호 사태 진상규명을 촉구하며 침묵시위에 동참했다. 하지만 변화는 극히 미미했다. 2017년 최저시급은 6470원으로, 학생들이 요구했던 1만 원에 크게 못 미치는 금액이다. 2015년에 비해 인상 폭도 0.8%가 낮다. 반값등록금 운동은 어떻게 됐을까? 400만 원을 웃도는 등록금은 여전히 그대로다. 청와대는 세월호 7시간에 대한 침묵을 이어가고 있다. 심지어 검찰은 몇몇 학생들에게 죄를 물기도 했다.

세월호 참사 뒤 '가만히 있으라' 침묵 행진을 주도한 용혜인씨는 검찰에게 2년을 구형 받았다. 변화를 바라며 학생들은 거리에 나섰지만,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공부와 취업준비를 포기하며 거리에 나온 시간만큼, 학생들은 취업전선에서 뒤처져 있었다.

당시 시위에 참여했던 친구는 몇 달 전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때, 영어 단어나 더 외울 걸 그랬어. 토익 점수 올리기 너무 힘들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위에 참여하기 보다는 공부하고 취업준비를 하라는 그의 말은, 이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 부정하기 힘들었다. 스스로의 미래는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이제는 대학생 그리고 국민들이 변화를 목도해야 한다

경찰이 2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청운효자동주민센터 앞에서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며 청와대 인간띠잇기를 벌인 시민들을 강제해산 시킨 가운데,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시민들이 세월호참사에 대해 박 대통령의 책임을 요구하고 있다.
▲ 박근혜 대통령 향해 세월호참사 책임 묻는 시민들 경찰이 2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청운효자동주민센터 앞에서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며 청와대 인간띠잇기를 벌인 시민들을 강제해산 시킨 가운데,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시민들이 세월호참사에 대해 박 대통령의 책임을 요구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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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바쁜 취업준비, 실패로 남은 거리의 경험에도 대학생들은 다시 한 번 거리로 나왔다. 11월 26일 시위에는 주최 측 추산 190만 명의 시민들이 거리로 나왔다. 역사상 최고치이다. 더 많은 대학생들이 취업준비를 잠시 내려놓고 있다.

대한민국 최고 권력자인 국민의 이름으로, 무너져가는 대한민국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서 말이다. 대학생뿐만이 아니다. 휴일 없이 일하다가 겨우 얻은 휴일에 나온 국민, 하루 장사를 접고 나온 국민, 몸이 불편함에도 나온 국민, 대학 입시를 앞두고 나온 국민 등 각계각층의 국민들은 각자 잃을 걸 감수하며, 거리를 메우고 있다.

이제는 변화가 이뤄줘야 한다. 박근혜와 그 공모자들은 하루빨리 자리에서 끌려 내려와야 한다. 그 다음은 엄정한 법의 심판을 받아 죗값을 치러야 한다. 이를 위해 정치권은 반드시 탄핵을 통과시켜야 한다. 혼란을 틈타 개헌이라는 명목으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행동은 용납할 수 없다. 헌법재판소는 국민의 뜻에 따라 심판을 내려야 한다. 검찰은 성역 없는 수사를 진행해야 한다. 더 이상 거리에서 집으로 돌아온 국민들이, 각자의 잃은 것만을 목도해서는 안 된다. 포기했던 공부와 취업준비를 후회하고 싶지 않다.

이제는, 아니 이번만큼은 자라코리아 이봉진 사장의 말을 온전히 부정할 수 있으면 좋겠다.


태그:#대학생, #시위, #이봉진 자라 코리아 사장,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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