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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린 대로 거둔다"

나는 1971년 7월 12일 교단에 섰고, 2004년 2월 29일 정년을 만 5년 남긴 채 교단을 떠났다. 정확히 32년 7개월 18일 교단에 선 셈이다. 그런데 제자들에 대한 기억은 전반기인 1970년, 1980년대까지는 뚜렷한데, 그 이후에는 기억에 가물가물하다.

지금도 안부를 주고받는 제자들은 거의 초기의 제자들이다. 아마도 그때는 내가 젊은 탓으로 열정이 넘쳤기 때문인가 보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은 진리다.

후반기 제자들이 기억에 가물가물한 원인은 학교 교육 풍토 변화 탓이다. 1970년대 후반부터 시작한 보충수업, 1980년대부터 불기 시작한 전대미문의 '자율학습'이라는 이름의 괴물, 그리고 상대 평가 등은 교육현장을 황폐화시켜 버렸다.

일과가 끝난 뒤 다시 밤 10시 학생들을 학교에 남긴 채 자율학습이라는 고상한 이름으로 '강제 타율학습'을 시키는 일은 교육이 아니라 사육이었다. 그때 교사들은 보충수업으로 늘어난 수업시간에, 방과 후에는 몽둥이를 들고 '야자'(야간 자율학습) 감독으로 각 교실을 순찰해야 했다. 그러자 교사도, 학생도 피차 서로 얼굴을 마주 보기도 지겨웠을 것이다.

교사가 하루에 3~4시간까지는 그런대로 기분 좋게 수업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의 수업시간은 무리다. 우선 체력적으로 힘들기 마련이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거의 날마다 정규수업과 보충수업으로 5~6시간의 수업을 소화하자면 자연 체력 안배를 하기 마련이다. 그러다 보면 수업시간에 전력투구할 수 없다.

게다가 초기에는 교육당국에서 자율학습비를 걷지 못하게 했다. 그러자 일선 학교들은 당국 몰래 편법으로 돈을 거뒀다. 담임교사들은 앞장서서 학부모에게 손을 내밀었다. 돈이 오가면 자연 교권은 자연히 추락하기 마련이었다.

오산중 1-12반 담임교사 시절 소풍지에서 제자들과 함께(1972. 5.)
 오산중 1-12반 담임교사 시절 소풍지에서 제자들과 함께(1972. 5.)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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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된 제자들이 오히려 기억에 남다

솔직히 세계 어느 나라에서 학생을 밤 10시까지 강제로 남기고 지도 명목으로 돈을 걷게 한다는 말인가. 아마도 아프리카의 어느 나라에서도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학교들은 '돈에 환장한' 학교로 전락해 버렸다. 교권은 돈과 권력에 초연치 못하면 반드시 떨어지게 마련이다. 그 단적인 예로 오늘날 '정유라 사태'로 홍역을 치른 한 대학교와 같은 사태다.

교권이 추락하면 결국은 '스승도 없고, 제자도 없는 사회'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나는 평교사로 줄곧 지내다가 교단을 떠나왔지만, 이런 교육 풍토를 만드는데 조연, 때로는 그런 일에 앞장설 수밖에 없었다. 학부모에게 육성회 임원이라는 감투를 씌우고는 육성회비 또는 학교발전기금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돈을 갹출케 했다.

그 보충수업, 자율학습이 학교마다 경쟁적으로 이루어지자 점차 사제의 관계는 멀어지기 마련이었다. 수업에, 자율학습 감독에 지친 교사들은 학생 면담도, 특기 교육이나 특별활동도 기피하거나 위축되기 마련이고, 오직 교과공부에만 매달렸다. 그러다 보니 학교교육은 자동회된 자동차공장의 제품처럼 쏟아져 나오는, 교사는 단순 지식 전달자요, 학생은 전수자의 관계로 끝나기 마련이었다.

나는 지금도 초반기의 제자들은 이름도 거의 외울 뿐 아니라 얼굴 기억도 삼삼하다. 하지만 보충수업, 자율학습이 극성이었던 그 이후는 유감스럽게도 학생의 얼굴도, 이름도 가물가물 기억에 거의 남아있지 않다. 

한 번은 이대부고 22기 제자들의 졸업 20주년 모임에 초대받아 참석했다. 그때 사회자가 나에게 한 말씀 부탁하기에 그날 모인 제자들 이름을 한 사람 한 사람 정확히 부르며 학창시절의 추억담을 얘기하자 그들이 밥상을 두드리며 환호했다.

"배아무개, 너. 한밤중에 자지 않고 설악산 2층 숙소에서 몰래 빠져나와 아래층 남학생 숙소로 가려다가 혼났지?"
"어머, 선생님! 저 학부모예요. 신랑이 알면 큰일 나요."

"이아무개, 너. 슬리퍼 신고 설악산 오르다가 혼났지? 그리고, 박아무개, 너. 민속제 때 기모노를 입은 일본 여인이었지."

"어찌 그걸 다 기억하십니까?"
"작가는 과거의 기억을 우려먹고 산단다."

어쨌든 서로의 이름을 기억해 주고, 추억을 나눌 수 있는 사제관계라야 졸업 후에도 그 관계도 지속되기 마련이다.

어느 장애 학생

내가 오산중학교를 떠나 모교인 중동고교를 거쳐 이대부고에서 근무하던 1980년대 어느 해 여름날 오후, 마침 수업이 비어 쉬고 있는데 구내전화가 왔다.

"선생님, 여기 수위실인데요. 옛날 제자였다면서 성충수(가명)라는 분이 찾아왔습니다."
"네?! 기다리라고 하세요. 곧 나가겠습니다."

'그 녀석이 어떻게 여기까지?'

그는 1972년 오산중학교에서 첫 담임을 맡았던 학생이었다. 키가 가장 작아 출석 번호 1번이었고, 어렸을 때 소아마비를 앓은 탓으로 거동이 몹시 불편했다. 거기다가 열병까지 앓은 탓으로 지능지수가 낮은 학생이었다. 모든 게 뒤떨어지는 녀석이었지만 학교만은 하루도 빠짐없이, 언제나 가장 먼저 등교했다.

수업시간 질문에는 언제나 답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시험 답안지에는 자기 이름만 간신히 쓸 뿐, 나머지는 제멋대로였다. 그래서 학급에서 꼴찌는 그가 늘 도맡았다. 짓궂은 반 아이들 등쌀에 무수한 놀림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그들에게 덤빌 줄도 모르고, 언제나 눈물만 훔칠 뿐 담임인 나에게 찾아와 자기가 받은 시달림을 한 번도 호소치 않았다. 소풍 전날 종례 시간이었다.

"성충수!"
"네, 선생님."

학교에서 원거리 소풍 때는 장애 학생이나 신체 허약자는 담임 재량으로 가정학습을 허용케 했다.

"너는 내일 소풍지에 오지 않아도 좋아요. 결석으로 치지 않을 테니."
"아니에요, 선생님. 저도 갈 수 있어요."

나는 다소 불안했지만 그의 애절한 눈빛에 허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혼자 오지 말고 희규랑 손잡고 와야 돼."
"네, 선생님."

금방 표정이 밝아졌다. 이튿날 내가 소풍 집결지로 갔을 때 그는 벌써 도착해 있었다. 미처 내가 그를 확인치 않자 열 가운데서 절름거리며 다가와서 도착 인사를 했다.

"선생님, 저 왔어요."
"그래, 고생 많았지?"
"아니에요, 선생님 말씀대로 희규 손을 잡고 왔어요."

내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활짝 웃으며 그제야 아이들 틈으로 사라졌다.

오산중 3-11반 학급담임시절 속리산 수학여행 때 법주사 경내에서 단체사진(1974. 5.)
 오산중 3-11반 학급담임시절 속리산 수학여행 때 법주사 경내에서 단체사진(1974. 5.)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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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 학생의 어머니

어느 날 성군 어머니가 학교로 찾아왔다. 서무실에 등록금을 낸 뒤 일부로 내게 인사하려고 왔다. 어머니는 쉰은 훨씬 넘었을 듯, 얼굴에 수심이 가득해 보였다.

"선상님, 철 모르는 제 자슥 때문에 얼매나 고상이 많으십니까?"

어머니는 더 말을 잇지 못하시고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묻고 한참이나 흐느꼈다.

"글쎄, 자슥이 하도 시원찮아서 중핵교는 안 보내려고 했는데, 그 자슥이 새벽같이 일어나 핵교 가겠다고 졸라 대니 안 보낼 수 있어야지요."
"…."

"제 자슥 에미가 봐도 답답하고 속상한데 선상님은 얼매나 속이 터지겠습니까?"
"아닙니다. 아이가 착하고 정직합니다."

"고맙습니다, 첫돌 지난 뒤 우연찮게 앓더니 한쪽 다리도 절고 열병이 머리까지 옮았나 봐요."

어머니는 내 곁에서 내내 울다가 갔다. 아들 같은 내게 몇 번씩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는 담배 한 포를 책상 서랍에 재빨리 넣고서는 일어섰다.

그해 가을, 퇴근 길 학교 정문 앞에서 성군의 어머니와 마주쳤다. 어머니는 얼른 화장품 외판용 가방을 뒤로 감췄다.

"선상님 부끄럽습니다."
"원, 별말씀 다 하십니다."
"선상님, 바쁘시지 않으시면 저기로 갑시다. 제가 맥주 한잔 대접하겠습니다."

어머니는 내 옷소매를 막무가내로 끌었다.

"아닙니다. 저는 술을 못합니다."

나는 한사코 어머니의 호의를 거절하고선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났다.

"선상님, 정말 너무 서운합니다."

뒤돌아보니 어머니는 그 자리에 서서 내 뒷모습을 바라보며 손을 들고 있었다.

길 잃은 어린 양

"안녕하세요, 선생님."

내가 수위실에 이르자 성군은 반가운 얼굴로 꾸벅 인사를 했다. 그새 그는 어엿한 어른이 되어 있었다.

"선생님, 저 취직했어요."

그는 틈도 주지 않고 자기 얘기부터 했다.

"아, 그랬어? 반갑다."
"종로5가에 있는 인쇄소에 다녀요."

"참 잘 됐구나."
"선생님, 저 이제 다리 많이 나았어요."

그런 뒤 그는 수위실 좁은 공간에서 두어 발자국을 걸어 보였다.

"그래 학교 다닐 때보다 많이 나았구나."
"오늘 일찍 끝나 선생님 만나려고 곧장 여기로 왔어요."

그날 오후 집에 돌아왔을 때, 아내는 한 졸업생이 다녀갔다고 했다. 인상착의를 들으니 성군이었다. 선생님을 조금 전에 만나 뵙고 돌아가는 길에 댁을 알아두려고 왔다면서 차 한 잔 마시고는 곧장 돌아갔다고 했다. 당시 내 집은 주소만으로는 찾기 힘든 산비탈 달동네라 더운 날 고생 꽤나 했으리라.

그날 이후, 그는 가끔 내 집으로 찾아왔고, 잊을 만하면 문안 전화를 걸어왔다.

"선생님, 저희 집에 한번 오세요. 엄마가 선생님을 꼭 한번 모시고 오랬어요."
"고맙다. 언제 한번 갈게."

어느 여름날 밤 잠결에 전화를 받았다. 창밖에는 장대비가 줄기차게 내렸다.

"선생님, 저예요."
"한밤중에 웬일이냐?"
"여기 순천향병원인데요. 엄마가 조금 전에 돌아가셨어요."
"저런!"
"선생님, 저 이제 어떻게 살지요. 엄마는 저 때문에 고생만 하다가 돌아가셨어요."

그는 더 이상 말없이 흐느끼다가 한참만에야 전화를 끊었다. 잠이 싹 가셨다. 그의 흐느낌이 귓전에 맴돌았다. 성군의 어머니는 차마 눈을 감지 못하고 돌아가셨을 것이다. 이 험한 세상에 온전치 않은 자식을 두고 어찌 편히 눈을 감았으랴.

화장품 외판용 가방을 뒤로 감춘 채, 내 옷소매를 잡으며 눈물 글썽이던 어머니의 서러운 얼굴이 내 마음을 울렸다.

오산중 3-11반 담임시절 학급학생들과 졸업기념촬영, 나는 40년이 지난 지금도 그들의 이름을 모두 다 외고 있다(뒷열 왼쪽에서 안성근, 김이광, 조태경, 강상욱, 구영모. 앞열 최만욱, 기자, 조영민)
 오산중 3-11반 담임시절 학급학생들과 졸업기념촬영, 나는 40년이 지난 지금도 그들의 이름을 모두 다 외고 있다(뒷열 왼쪽에서 안성근, 김이광, 조태경, 강상욱, 구영모. 앞열 최만욱, 기자, 조영민)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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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구멍을 찾고 싶은 부끄러움

1972학년도 그해 내 반에 후암동의 한 고아원에서 다니는 이아무개 학생이 있었다. 나는 그 학생을 담임한 1년 중 내 집에 불러다가 밥 한 끼 대접치 못한 게 두고두고 후회됐다. 그때는 미혼이기에 그랬다고 변명할 수도 있을 테지만, 학교에서 가까운 중국집에 데려가 그 시절 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자장면이라도 한 그릇 사주면서 어깨를 두들겨 줘어야 옳았다.

1975년 오산중 중 3-11반 졸업반을 담임했을 때 장아무개 학생은 등록금 미납으로 장기 결석해 끝내 제적 처리했다. 나는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자신이 싫어진다. 솔직히 그때 몇 학부모에게 그만한 촌지는 받았으면서도.

그 뒤 이대부고에서 근무했을 때 내 반에 휠체어만으로 이동했던 박아무개란 학생이 있었다. 그런데 나는 단 한 번도 그의 휠체어를 밀며 화장실에 데려다준 적도 없었다. 인생 황혼기에 든 이즈음 나는 그 제자들을 생각하면 쥐구멍을 찾고 싶을 정도로 부끄럽다.

(* 다음 글에 계속)

덧붙이는 글 | 백범회보 2016년 가을호에 '어느 역사 기록자가 들려주는 백범김구 선생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제 인터뷰 기사가 실렸습니다. [보는 방법] 백범김구기념관 -> 백범회보 보기 -> 백범회보 53호 26~29쪽



태그:#어느 해방둥이의 삶과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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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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