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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적인 초과 근무에 시달리던 광고회사 여사원 다카하시 마쓰리의 자살 사건을 보도하는 NHK 뉴스 갈무리.
 살인적인 초과 근무에 시달리던 광고회사 여사원 다카하시 마쓰리의 자살 사건을 보도하는 NHK 뉴스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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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명문 도쿄대를 졸업한 다카하시 마쓰리는 지난해 4월 대형 광고회사 덴쓰(電通)에 입사했다. 100년이 넘는 역사와 세계 최대 수준의 매출을 자랑하는 덴쓰는 일본에서 광고 전문가를 꿈꾼다면 누구나 선망하는 기업이다.

그러나 덴쓰는 다카하시의 꿈을 이뤄주는 대신 죽음으로 몰았다. 수습 기간을 끝내고 인터넷 광고 부서로 발령받은 다카하시는 살인적인 업무량에 시달렸다. 부서 인원이 14명에서 6명으로 줄면서 밤샘 야근과 휴일 출근은 일상이 됐다.

지난해 10월 한 달 동안 다카하시의 초과 근무는 무려 130시간에 달했다. 하지만 초과 근무 상한선인 70시간을 넘지 말라는 회사 방침에 따라 근무 보고서에는 69시간으로 적어야 했다. 급기야 우울증에 걸린 다카하시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소셜미디어에 "자고 싶다는 본능 말고 모든 감정을 잃어버렸다" "죽는 것이 더 행복하다"라고 쓰는 넋두리뿐이었다.

상사의 폭언도 다카하시를 괴롭혔다. 상사는 그녀에게 "충혈된 눈으로 출근하지 말고, 단정한 옷차림을 해라" "여자로서 매력이 떨어진다" 등의 비난을 퍼부었다. 결국 다카하시는 크리스마스인 지난해 12월 25일 아침, 어머니에게 "지금까지 고마웠어"라는 문자를 보낸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4세 딸을 잃은 다카하시의 유족은 억울함을 호소했고, 기업의 노동 실태를 감독하는 후생노동성 산하 노동기준감독서가 지난 7일 다카하시의 자살이 과로로 인한 산업 재해라는 결정을 내리면서 10개월 만에 진실이 밝혀졌다.

다카하시의 죽음은 일본 사회를 뒤흔들었다. 재택근무, 탄력 출퇴근 등 파격적인 근무 형태를 유도해 기업의 생산성을 높여 고령화와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큰소리를 쳤던 아베 정권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딸 잃은 엄마 "국가가 노동자의 생명 지켜달라"

살인적인 초과 근무에 시달리던 광고회사 '덴쓰'의 여사원 다카하시 마쓰리의 자살 사건을 보도하는 NHK 뉴스 갈무리.
 살인적인 초과 근무에 시달리던 광고회사 '덴쓰'의 여사원 다카하시 마쓰리의 자살 사건을 보도하는 NHK 뉴스 갈무리.
ⓒ NH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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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하시의 죽음을 계기로 후생노동성의 조사와 언론의 취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그동안 숨겨진 죽음들이 드러났다. 일본 NHK에 따르면 덴쓰에서는 2013년 6월에도 당시 30세의 남성 사원이 돌연사했다. 조사 결과 입사 2년 차였던 이 남성도 과로에 시달린 것으로 나타났다.

덴쓰는 성명을 통해 "다카하시 사원의 자살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며 엄숙하게 받아들인다"라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2013년 남성 사원의 사망 사건에 대해서는 "해당 사원이 사망한 것은 사실이지만, 유족의 뜻에 따라 더 이상 자세한 내용은 공개하기 어렵다"라고 밝혔다.

덴쓰는 초과 근무 상한선인 70시간을 5시간 단축하고, 오후 10시부터 본사 건물 전체를 소등하겠다는 방침을 내놨다. 그러나 후생노동성은 "지금껏 지켜지지 않았던 초과 근무 상한선을 5시간 단축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라며 근본적인 개혁을 촉구했다.

다카하시의 어머니는 기자회견에서 "(딸이) 취직해서 엄마를 편하게 모시겠다고 말했었다"라며 "성격이 밝아 친구도 많은 딸이었다"라고 눈물을 흘렸다. 이어 "딸이 목숨을 끊기 전까지 왜 기업이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느냐는 원망을 떨쳐버릴 수 없다"라며 "노동자의 소중한 생명을 위해 국가에서 기업을 확실히 감독하고 지도하기를 바란다"라고 강조했다.

후생노동성은 지난 20일에도 월 평균 100시간 이상 초과 근무에 시달리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간사이전력 40대 과장의 죽음도 산업 재해로 인정했다. 그는 다카하마 원전 1, 2호기의 운전 연장 심사를 대비하기 위해 살인적인 업무 강도를 견뎌야 했다. 그러나 원전 심사 작업은 '공익을 위한 것'이라는 이유로 노동기준법의 초과 근무 규정을 적용받지 않는다.

NHK 취재 결과 도쿄전력, 홋카이도전력, 간사이전력, 시코쿠전력, 규슈전력 등 일본의 5대 전력 회사 모두가 노동기준법을 훨씬 넘어서는 초과 근무를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규슈전력이 운영하는 센다이 원전은 한 달에 170시간까지 초과 근무가 가능하도록 내부 규정까지 마련해놨다.

선진국 최악의 노동시간... 팔 걷고 나선 일본

일본 정부의 기업 초과 근무 상한선 규제를 보도하는 NHK 뉴스 갈무리.
 일본 정부의 기업 초과 근무 상한선 규제를 보도하는 NHK 뉴스 갈무리.
ⓒ NH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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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부는 덴쓰를 넘어 모든 기업의 초과 근무 실태를 파악하기 위한 전방위적 조사에 착수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다카하시의 죽음에 대해 "매우 슬프고,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라며 "장시간 근무를 당연히 여기는 일본 기업의 관행을 개혁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후생노동성이 20일 발표한 '과로사 방지대책 백서'에 따르면 일본의 연간 노동시간은 2015년 기준 1734시간으로 지난 25년 동안 330시간 줄었다. 하지만 이는 파트타임 근로자가 늘어난 것으로 인한 착시 효과에 불과하며, 실질적인 노동시간은 이보다 훨씬 많은 2026시간으로 나타났다.

또한 장시간 노동으로 스트레스나 우울증 등의 정신질환을 겪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미수를 포함해 2015년 93건, 2014년 99건에 달했다. 하지만 지나친 초과근무를 자제하라는 후생노동성의 시정 권고를 기업들이 무시한다고 지적했다.

NHK는 "일본의 노동시간은 선진국 가운데 최악의 수준"이라며 "일주일에 49시간 이상 일하는 노동자 비율이 일본은 21.7%로 미국(16.4%)과 영국(12.3%)보다 높으며, 10% 남짓인 프랑스와 독일보다는 두 배 이상 높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일본 기업의 초과 근무는 사실상 무제한이며, 정부가 초과 근무 상한선을 법제화해서 확실하게 지키도록 나서야 한다"라며 "최저임금 인상, 동일노동·동일임금 등을 위해 노사 양측이 의식을 개혁하고 협력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일본 언론은 노동자가 짧은 시간에 효율적으로 업무를 처리해야 직장과 가정을 모두 지킬 수 있다며 일본 경제가 고령화와 저출산을 극복하고 성장을 이어가기 위해서라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사회적 과제라고 강조했다.


태그:#일본, #덴쓰, #아베 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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