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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일 밤 7시 68년 전 여순사건이 발발한 비슷한 시간대에 시민들과 마주앉아 토크콘서트를 갖는 주철희 박사
 19일 밤 7시 68년 전 여순사건이 발발한 비슷한 시간대에 시민들과 마주앉아 토크콘서트를 갖는 주철희 박사
ⓒ 오병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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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 68주기를 맞아 역사학자 주철희 박사(51는 "여순사건은 '반란'이 아니었다"라고 강조했다.

지난 19일 여수해양공원 카페에서 150여 명의 시민들이 참석한 토크콘서트에서 주 박사는 사료와 자신의 연구 자료를 바탕으로 여순사건은 '항쟁'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날 토크콘서트는 똑소리닷컴(대표 한창진) 2주년 기념행사로 열렸다(관련 기사 : "여순사건은 결코 '반란' 아니다, 증명할 것).

그는 역사적으로 '반란'의 사례를 들어 "반란의 목적은 '정부 전복'이고 '권력 찬탈'이었다"라고 그 특성을 설명하면서 "여순사건은 권력 찬탈 목적이 아니었다"라고 밝혔다. 이괄의 난, 이성계, 전두환 등 역사에서 반란으로 규정한 사례를 보면 분명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반란이 성립하려면 "수도를 점령하고, 현 권력자를 축출하거나 제거하려는 계획이 있어야 하고, 새로운 권력자가 미리 정해져 있고, 반란 주체가 요직이거나 군사적인 지위가 있어야 한다. 또 계획의 구체성과 철저한 준비가 있어야 하는 반란의 조건들을 갖추어야 한다"라고 주 박사는 설명한다.

여순사건에서 주동자들인 14연대 군인들의 목적은 정부 전복도 권력 찬탈도 아니었으며, 그들은 반란의 조건들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토크콘서트 무대에 장식된 국화가 여순사건 68주기를 추모하고 있다.
 토크콘서트 무대에 장식된 국화가 여순사건 68주기를 추모하고 있다.
ⓒ 오병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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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지금까지는 정부발표대로 '여순반란사건'이었다. 점차 지역 주민들의 반란이 아닌 14연대 주둔군의 반란이었다고 연구됐다. 우리의 인식 속에는 '반란'이 뿌리깊이 박혀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이러한 인식에서 벗어나려면 "제대로 된 역사의 기억들을 되살려야 한다"라고 역설했다.

그는 "14연대 일부 군인들은 권력찬탈의 목표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수도를 점령해 이승만을 무너뜨리려고 하지도 않았다"라며 자료를 제시해 나갔다.

여수는 수도권과는 먼 곳이다. 당시 열차로 18시간 걸리는 곳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서울을 점령하고, 수도 서울에 거주하는 최고 통치자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도저히 세울 수가 없었다. 이들의 목적지는 지리산이었다.

주동자들이 요직에 있거나 미래 권력자가 정해지지도 않았다. 주동자 김지회와 지창수는 중위와 상사였다. 14연대 군인들은 목적이 분명했다. 그들은 "동족상잔 결사 반대"였고, "미군 즉각 철퇴"였다. 정권찬탈이 아니었다.

이는 주 박사가 제시한 당시 10월 24일 자 <여수인민보>에 실린 '제주도출동거부병사위원회' 명의의 호소문에 정확히 나와 있다. 주체의 명칭에서부터 목적이 분명하다. '제주도 출동 거부 병사들'인 것이다.  
 당시 여수인민보에 게재된 14연대 군인들의 호소문.
 당시 여수인민보에 게재된 14연대 군인들의 호소문.
ⓒ 주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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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소문은 "조선인민의 아들인 우리는 우리 형제를 죽이는 것을 거부하고 제주도 출병을 거부한다. 우리는 조선인민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싸우는 진정한 인민의 군대가 되려고 봉기한다"라고 명확히 밝혔다.

또 1948년 11월 미국정보당국의 보고 자료도 제시했다. 거기에는 "반란 지도자들은 투쟁목표가 외세제국주의에 맞서 나라를 지키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중략) 그들은 여수의 군인들이 제주도 주민들을 살해하기를 거부하며 제주도로 파병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라고 기록돼 있다.

주 박사는 이런 자료가 없었다면 '반란'을 지우기가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한다. 정부 제공의 자료는 철저히 반공에 입각한 자료들이었고, 당시 정부는 여순사건을 철저하게 언론에서 통제했다.

 여순사건 전문 연구가인 주철희 박사가 동부매일신문 서양희 기자(왼쪽)와 함께 토크콘서트를 진행하고 있다.
 여순사건 전문 연구가인 주철희 박사가 동부매일신문 서양희 기자(왼쪽)와 함께 토크콘서트를 진행하고 있다.
ⓒ 오병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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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령을 거부한 14연대 군인들은 여수 점령도 순천 점령도 사실과 다르다고 설명했다. 그들은 지리산으로 입산하기 위해 북상할 계획을 세웠고, 당시 여수역으로 가는 과정에서 전투가 있었다. 즉 신월리 14연대에서 여수역까지 가는 통로인 여수시내 한 복판을 지날 수밖에 없었으며 그로 인해 전투가 벌어졌다. 순천서도 마찬가지다. 거의 무혈 입성이었는데, 이는 조직이 덜 갖춰진 경찰들이 일부 퇴각해 버린 탓도 컸다.

그리고 막바지에 진압된 이후 14연대 군인들과 여수의 인민위원회가 따로 입산을 한 사례를 들어, 군인들의 제주도 출동 거부와 여수에서의 인민위원회 봉기가 사전에 철저한 계획 하에 이뤄진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진압군에 쫒긴 14연대 군인들은 지리산으로, 여수인민위원회는 광양 백운산으로 입산했다. 이는 사전에 준비됐거나 연락된 상황이 아니라는 걸 증명한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여순사건에 동학혁명을 대비시켜 설명했다. 두 시기의 민중들의 삶이 과연 얼마나 큰 차이가 있었는지 의문이라며 "아마도 두 시기 모두 권세 있는 자들의 득세나 약한 자들의 수탈에는 큰 차이 없었을 것"이라고 가정했다.

힘든 시민들에게 역사적인 상황에서 명분 있는 봉기는 사회적 영향력을 갖기 마련이다.  건준활동하다 지하로 잠적한 인민위원회가 군인들의 봉기에 쉽게 합세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구조적인 불합리로 인한  사회의 취약성에 시민들의 내재된 불만도 한몫했다.

그런 점에서 주 박사는 "서민들에게 동학혁명때나 여순사건때나 힘들긴 마찬가지였다"고 주장한다. 

정통성이 약한 정권의 폭압은 연쇄적이고, 언론통제와 정보가 차단된다. 이때 강력한 진압의 명분은 '반란'일 수 밖에 없다.

 토크콘서트를 경청하는 시민들
 토크콘서트를 경청하는 시민들
ⓒ 오병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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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소문에서 14연대 군인들은 동족을 죽이라는 불합리한 명령을 거부하고 진정한 군인이 되려고 했다. 그러므로 주 박사는 여순사건에 대해 "최소한 '여순봉기사건'이어야 하고, 개인적으로는 '여순항쟁'이라고 본다"라면서 콘서트를 마쳤다.

주철희 박사는 순천대학교 지리산권문화연구원 여순연구센터장을 역임했으며, 여순사건 관련 여러편의 논문과 두 권의 저서를 낸 진보적인 역사학자다.

덧붙이는 글 | <여수넷통>에도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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