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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열넷. 여름궁전과 겨울궁전

아침부터 부산스럽다. 여름궁전이 있는 페트로고프(Петергоф)까지는 대중교통으로 1시간 30분 이상 잡아야 한다. 배를 타면 50분 만에 갈 수 있지만 비용이 적지 않다. 오후에 겨울궁전을 가야하므로 돌아올 때 배를 타기로 하고 지하철과 버스를 이용하기로 한다.

어제 저녁부터 날리던 비 때문에 은근히 걱정했는데, 오늘은 눈부시게 파란 하늘을 보여준다. 처음 만난 궁전 윗공원(upper park)의 인상은 거대하고 깔끔한 정원이다.

이 물길이 바다까지 이어져 있다.
▲ 궁전 건물에서 내려다 본 분수와 물길 이 물길이 바다까지 이어져 있다.
ⓒ 권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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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궁전을 통과하여 아랫공원(lower park)으로 들어서니 말로만 듣던 화려한 정경이 펼쳐진다. 아직 베르사유 궁전을 못 가봐서 실감은 안 나지만 러시아의 베르사유 궁전으로 불린단다.

검소한 실용주의를 추구했던 표트르 대제가 건설한 건축물 가운데 유일하게 호화로운 건축물이다. 표트르 대제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크고 호화로운 베르사유 궁전에 버금가는 거대한 궁전을 건축하도록 지시했다. 7층의 계단으로 이루어진 폭포, 64개의 분수, 금으로 도금한 조각과 장식품으로 꾸며 놓은 궁전은 그 면적만 800만㎡가 넘는다.

분수의 대표적인 조형물로서 역동적인 모습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 여름궁전 분수의 삼손이 사자 아가리를 찢는 동상 분수의 대표적인 조형물로서 역동적인 모습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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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하늘과 흰구름을 배경으로 시원스러운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 여름궁전 분수의 황금빛 동상들 푸른 하늘과 흰구름을 배경으로 시원스러운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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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길을 따라 가면 가장 많은 관광객을 모으는 삼손 분수대가 있다. 그 좌우로 아담 분수와 이브 분수가 균형을 맞추고 있다. 삼손이 사자의 아가리를 찢고 있는 황금 동상은 스웨덴을 물리친 상징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아가리가 찢기는 사자는 스웨덴이라는 말인데, 스웨덴 관광객이 보면 썩 좋은 기분은 아니겠다.

조경미가 있는 이런 분수들 외에 예상치 못한 장소에 장난스러운 분수들이 매우 많아서 즐겁게 더위를 날릴 수 있다.
▲ 여름궁전 안의 분수 조경미가 있는 이런 분수들 외에 예상치 못한 장소에 장난스러운 분수들이 매우 많아서 즐겁게 더위를 날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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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분수 안에 갇힌 아이들
▲ 여름궁전 안의 분수 스스로 분수 안에 갇힌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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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수 양편의 넓은 정원에도 갖가지 분수들이 있다. 특히 산책로나 벤치 화단 등에 표시 없이 설치된 분수들이 불쑥불쑥 뿜어져 나와 관광객들을 놀라게 만든다. 마치 분수들이 사람들에게 장난을 거는 것 같다.

쉬 마르는 여름옷이 조금 젖은들 무슨 대수랴. 불시에 맞은 관광객 누구 하나 인상을 찌푸리는 사람이 없다. 아예 수영복 차림으로 분수와 노는 아이들도 눈에 띤다. 백야의 긴 여름 한 철을 이렇게 보냈겠다. 표트르 옆에서 까르르 하며 자지러지는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여름궁전으로 올 때는 버스를 타고 왔는데, 돌아갈 때는 배를 탔다. 선착장 티켓팅 박스 모습.
▲ 여름궁전 선착장 여름궁전으로 올 때는 버스를 타고 왔는데, 돌아갈 때는 배를 탔다. 선착장 티켓팅 박스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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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궁전에서 돌아오는 배를 타고 도착한 곳이 바로 지금은 에르미타주(Эрмитаж) 미술관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 겨울궁전이었다. 1711년, 겨울 궁전이 처음 지어졌을 때에는 지금의 모습과 좀 달랐다. 표트르 대제는 철저하게 실용주의를 추구했기 때문에 처음 지어진 궁전은 조금 평범해 보였다.

겨울 궁전을 오늘날의 모습으로 바꾼 것은 표트르 대제의 딸인 여제 엘리자베타였다. 엘리자베타는 크고 화려한 바로크 양식의 궁전을 짓고 싶어했다. 10년에 걸친 공사 끝에 모습을 드러낸 겨울궁전은 크고 화려했다. 건물의 둘레만도 2km나 되고, 실내는 1050개의 방과 120개의 계단, 그리고 1100개에 이르는 창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양각색의 대리석과 금으로 도금된 천장과 벽, 고급 목재를 이용한 바닥, 화려한 샹들리에는 보는 것조차 부담스러울 정도로 화려하다.

멀리 바라보이는 건물이 에르미타주 미술관이다.
▲ 겨울궁전 광장 멀리 바라보이는 건물이 에르미타주 미술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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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궁전은 세계 3대 미술관으로 꼽힐 만큼 270만 점이 넘는 소장품이 있다. 엘리자베타 여제의 수집품에서부터 시작된 소장품은 수 세기에 걸친 러시아 왕가의 소장품이 더해져 바티칸, 루브르, 대영 박물관에 비견할 정도로 수준 높은 작품이 가득하다. 소장 작품이 너무 많아 중요한 작품을 제외한 나머지 작품들은 매년 바꿔 가면서 전시를 한다. 소장품의 수도 놀랍지만, 다빈치부터 피카소까지를 아우르는 소장품의 질 또한 감탄을 금할 수 없다.

높은 천정과 화려한 장식이 사람을 압도한다.
▲ 에르미타주 출입구의 중앙홀 높은 천정과 화려한 장식이 사람을 압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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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4시에 입장했지만 오늘은 폐관 시간이 10시여서 웬만큼 여유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늘 가장 힘들지만 지나고 나면 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박물관이나 미술관 여행이다. 지난해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도 그랬다. 서 있을 힘도 없을 정도로 힘들었지만 돌아와서 자주 어른거리는 기억들은 다빈치의 조각과 피카소의 초기 데생 같은 것들이었다. 에르미타주도 예외가 아니다. 시대 순으로 진열된 그림을 따라가다 보니 문외한인 내게도 시대적 맥이 보이는 듯했다.

에르미타주의 레오나르드 다빈치 그림.
 에르미타주의 레오나르드 다빈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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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빈치와 미켈란젤로로 대표되는 르네상스 시대 그림은 대부분 귀족의 초상화나 종교적 성화이다. 요즘으로 치면 목적이 분명한 '사진'이 아닐까? 엘 그레코와 렘브란트, 루벤스로 대표되는 바로크 시대로 오면 보다 어두워지고 균형을 깨뜨린 화면에 시민계층과 민초들의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어두운 톤에 일그러진 표정을 한 화폭 속의 사람들이 그 고단한 삶을 반추하게 한다.

특히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아'에 숨겨진 큰 아들의 무서운 표정이나 아사형에 처해진 아버지에게 가슴을 열고 젖을 물리는 딸의 모습을 담은 루벤스의 <Roman Charity>는 단연 압권이다. 그림을 예술로 인식한 것은 이 때부터가 아닐까하는 근거 없는 상상을 해본다.

에르미타주 소장 루벤스 그림.
 에르미타주 소장 루벤스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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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에 쫓기다보니 마음도 더 급하다. 고흐를 보고 싶어 신관 갤러리로 이동한다. 자연주의나 낭만주의 화파의 풍경화에서 마네, 모네, 르노와르의 인상파, 세잔, 고흐, 고갱의 후기 인상파, 포비슴(야수파) 운동을 주도한 마티스에서 큐비즘의 피카소까지, 미술사를 꿰뚫을 명작들에 눈이 호강이다. 

피카소는 그림 외에도 도자기를 비롯하여 조각, 동판화, 석판화 등 다방면에서 엄청난 양의 작품을 남겼다. 에르미타주에는 그의 도자기 작품들이 꽤 많이 전시되어 있다.
▲ 피카소의 도자기 작품들 피카소는 그림 외에도 도자기를 비롯하여 조각, 동판화, 석판화 등 다방면에서 엄청난 양의 작품을 남겼다. 에르미타주에는 그의 도자기 작품들이 꽤 많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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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열다섯. '소문'난 예카테리나 궁전

8월 20일(토), 오늘은 푸쉬킨(Пушкин)의 예카테리나 궁전(Экатерининский Дворец)을 가는 날이다. 아침부터 굵은 빗줄기가 그칠 줄을 모른다. 더 기다릴 수 없어 빗속을 뚫고 버스를 탄다. 러시아 사람들은 예카테리나 궁전을 'Царское Село(황제의 마을)'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우리가 도착한 곳은 이러한 명성과 달리 소박한 소도시이다. 조금 가니 단체 관광객들의 북적이는 모습이 보인다.

비오는 날임에도 관광객의 줄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이어져 있다. 관람객이 너무 많아 입장을 제한하므로 대기 시간이 매우 길다. 우리 일행도 거의 두 시간 가까이 기다려서야 입장할 수 있었다.
▲ 에카테리나 궁전에 입장하기 위해 늘어선 줄 비오는 날임에도 관광객의 줄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이어져 있다. 관람객이 너무 많아 입장을 제한하므로 대기 시간이 매우 길다. 우리 일행도 거의 두 시간 가까이 기다려서야 입장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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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시 남짓한 시간인데도 발 디딜 틈이 없다. 정원 입장료만 150루블, 게다가 궁전 입장료는 1000루블이다. 정원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야 궁전 입장료를 끊을 수 있단다. 정원 안에는 벌써 몇 겹의 줄이 서 있다. 줄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수용 인원을 고려해 입구에서부터 통제를 한다. 거의 두 시간 가까워서야 겨우 입장할 수 있었다.

건물 길이만 해도 306미터에 달하고 55개의 방이 있으며, 궁전 앞에는 프랑스식 정원이 펼쳐져 있다.
▲ 예카테리나 궁전 건물 길이만 해도 306미터에 달하고 55개의 방이 있으며, 궁전 앞에는 프랑스식 정원이 펼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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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대부분에 걸쳐 러시아 황제들의 여름 별장으로 사용되었던 이 궁전은 그 사치스러운 내부 장식으로 명성이 높았는데, 특히 방 전체를 호박(琥珀)으로 치장한 '호박 방'이 유명하다. 한때는 세계의 여덟 번째 불가사의라고도 불렸던 이 방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에게 완전히 약탈당했다. 2003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의 300주년을 맞아 궁전 대부분은 재건축되었고, 이 호박 방도 새로운 호박으로 재단장했다.

그러나 명성과는 달리 개인적으로 그다지 큰 감흥이 없었다. 화려한 금박 장식을 한 넓은 중앙 홀이 인상적이기는 했지만 두 시간을 기다릴 만큼 감동적이지 않았으며, 호박방도 그랬다. 특히 개방된 방이 몇 되지 않아 정작 30분 정도 돌고 나면 곧 출구로 나와야 했다. 그러면서 입장료를 이렇게 받으니, 관광객들에게 보수비용을 전가하는 기분이다.

천정의 이콘화와 사방의 금박 장식이 눈부시다. 예카테리나 궁전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호박방이지만 그곳은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기대 때문인지 호박방을 실제로 보았을 때 조금 실망스러웠다.
▲ 예카테리나 궁전의 중앙홀 천정의 이콘화와 사방의 금박 장식이 눈부시다. 예카테리나 궁전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호박방이지만 그곳은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기대 때문인지 호박방을 실제로 보았을 때 조금 실망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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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카테리나 궁전을 위해 하루를 비워 놓았는데... 차라리 에르미타주 미술관을 한 번 더 갔어야 했는데... 우리의 실망은 온갖 후회로 터져 나왔다. 오늘 저녁에는 다시 밤 버스를 타고 국경을 넘어야 한다. 그러자면 이렇게 구시렁거릴 시간 여유가 없다. 서둘러 시내로 돌아와 먹는 것으로 기분을 회복하자고 의견을 모은다.

러시아에서 첫날 호텔 조식 까샤 외에는 한 번도 만족스러운 음식을 맛보지 못한 터라 중국음식점을 가기로 한다. 네프스키 대로변에 있는 중국집 '唐人酒樓'는 작은 입구와는 달리 꽤 넓고 화려한 실내를 갖고 있었다. 게다가 요리도 300루블 내외의 착한 가격이다. 탕과 각종 요리를 주문하고 내친 김에 보드카도 한 병 주문한다. 여사들도 은근 술 한 잔이 생각나는 눈치이다. 음식도 맛있다. 두 시간 넘게 실컷 먹었지만 가격은 3500루블. 우울한 기분이 싹 가신다. 호텔에서 짐을 찾아 가벼운 걸음으로 발틱역으로 향한다.


태그:#상트페테르부르크, #여름궁전, #에르미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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