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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를 피해 양을 만나다

우리나라 속담에 "오래 살면 시어미 죽을 날 있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오래 살다보면 속 시원한 일도 맞을 때가 있다는 말이다. 해가 바뀐 1970년 봄, 강철 중대장은 다른 부대로 전출을 갔다. 나는 그와 무사히 헤어짐에 안도의 숨을 쉬었다. 이는 아마도 조상님이 돌보아주신 덕분일 것이다.

때가 되니까 강철 중대장뿐 아니라, 그동안 같이 근무했던 다른 소대장들도 모두 상급 부대나 다른 부대로 떠나고, 중대 장교 가운데 나만 남게 되었다.

제73연대 1대대 3중대 부중대장 시절 부대 초가 중대본부 막사 앞에서의 기자로, 뒤편은 파주 심학산이다(1970. 4.).
 제73연대 1대대 3중대 부중대장 시절 부대 초가 중대본부 막사 앞에서의 기자로, 뒤편은 파주 심학산이다(1970. 4.).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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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부임해 온 중대장은 월남에서 갓 귀국한 신천식 대위로, 강철 중대장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그는 다행히 합리적으로 부대를 운영했으며, 자기 직위로 중대원을 갈취하거나 편취하지 않는, '젠틀맨'이었다. 

사실 장교는 어느 나라나 '국제 신사'로 통할 만큼 어느 정도 수준 이상의 인격자이기 마련이다. 그런데 어찌 된 셈인지 지난날 대한민국 국군에는 저질 부패 장교들이 숱하게 많았다. 아마도 한국전쟁 중이나 직후 혼란기에 마구잡이로 수개월 만에, 심지어는 현지 임관으로 장교를 양산한 결과라고 생각된다. 게다가 일부 장교는 일군이나 만군 출신 선배들의 잘못된 인습만 고스란히 물려받은 결과로 짐작된다.

신임 중대장 신 대위 밑에서 지내니까 군대생활도 할만 했다. 결국 군대사회도 사람이 문제였다. 아마도 나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무튼 어리석은 백성들은 지도자를 잘 만나야 한다. 사람이 마냥 죽으라는 법은 없는 양, 나는 천만 다행으로 여우를 피해 양을 만난 셈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신 대위 사진은 내 수중에 없다.

그 무렵에는 3사 출신 장교들이 많이 배출돼 부대로 전입을 와서 장교 자원이 남게 되자 가장 선임인 나는 그때부터는 중대에서 부중대장 직책을 맡게 됐다. 그러자 내가 하는 일은 중대 행정병들을 장악하고, 취사와 보급 및 일일결산 간부회의 때 사회 등 안방살림을 맡았다.

어느 하루 취사병들의 애로사항을 들으니까 상급부대에서 취사용 연료로 보내준 기름(벙커시유) 드럼통에 물을 넣고 보내준다고 했다. 그래서 그 기름을 쓰면 버너가 자주 고장이 나기에 아예 기름에 물을 붓지 말고 차라리 적은 양을 그대로 하급부대에 보내달라는 건의였다.

마침 중대장이 사단 일선 중대장 회의에 참석한다기에 나는 사단장에게 그 취사용 연료 문제를 건의하라고 일러드렸다. 그날 늦게 돌아온 중대장의 말이었다. 마침 유학성 사단장이 회의 말미에 건의사항이 있으면 말하라고 하기에 당신이 발언하고자 하는데 4중대장이 먼저 손을 번쩍 들고 바로 그 점을 건의하더란다.

그 얘기를 다 듣고 난 사단장은 즉각 군수참모에게 시정명령을 내렸다고 했다. 그런데 회의가 끝난 후 4중대장은 연대장과 군수참모에게 불려가 조인트(군화발로 정강이를 맞는 것)를 까였다고 전해졌다. 그때 그들이 4중대장에게 한 말까지도 전했다.

"야, 이 새끼야! 너 그런 건의사항은 지휘계통을 밟아야 되는 것 아냐? 너 군대생활 하루이틀 했나?"

군부대의 비리

사실 군부대의 보급 비리는 그 뿌리가 매우 깊다. 각종 보급품이 정량대로만 하급부대에 내려오고, 그것을 규정대로만 지급하면 병사들은 배가 고프지도 않을 뿐더러, 군대 일상생활에 큰 불편함은 없다. 그런데 당시 군대 실정(사실은 창군 이래부터)은 그렇지 못했다.

취사용 연료의 예만 들자면 소정의 취사용 기름 드럼통이 각 중대로 배달됐는데, 그 드럼통에는 정량의 2/3 정도만 찼을 뿐이라고 했다. 이의 시정을 상급부대에 요청하자 그 뒤로는 드럼을 가득 채워주는데 기름을 쓰다보면 바닥 1/3 정도는 물이라고 했다.

내가 직접 현장을 확인하자 취사장 하수구는 기름 반 물 반으로 그 오염이 매우 심각했다. 그런데 그런 부정부패 비리의 진원지를 거슬러 올라가면 거의 상부 층과 연결돼 있기 마련이었다.

장제스 총통이 대만으로 쫓겨 간 뒤 국부군이 공산군에게 밀린 원인의 하나인 부정부패의 근원을 추적했다. 그러자 자기 며느리가 거기에 관련됐다는 일화처럼, 결국은 윗물이 흐렸기 때문에 아랫물이 맑을 수가 없었다.

대한민국의 부정부패 비리는 군에서 시작했다고 할 만큼 그 부정부패 비리의 골과 그 역사는 징그럽게 깊다. 물론 창군 당시 국가 예산도 부족한 점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부정부패 비리가 만연한 것은 창군 주요인사 가운데 일제 패잔병 등이 국가나 민족에 대한 충성심보다 단지 생계수단으로 군에 입대한 자들이 많았던 때문으로 추정된다. 그들은 부하들에게 지급할 각종 보급물자에다 빨대를 대고 마구 들이켰다. 처음에는 생계 때문이었을 테지만 나중에는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말처럼 군량미는 물론, 심지어 탱크의 포신까지 잘라 착복했다. 게다가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투명하거나 정의롭지 못한 탓도 있었다.

한국전쟁 중, 대구 근교 훈련소에 신병 입대자들이 입소하고 있다(1951. 4. 20.).
 한국전쟁 중, 대구 근교 훈련소에 신병 입대자들이 입소하고 있다(1951. 4. 20.).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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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방위군 사건

"한국전쟁 당시 중국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1950년 12월 21일 정부는 '국민방위군 설치법'을 공포했다. 그 설치법에 따라 방위군 징집자를 소집하자 서울에서만 50만 명에 이르렀다. 그때는 혹한인 데도 국민방위군사령부는 이들 50만 명을 천 리나 되는 후방 교육대로 후송케 했다.

이들은 군에서 군복을 줄 줄 알고 홑바지와 저고리 차람이었는데 당국에서는 아무것도 나눠주지 않았다. 잠잘 때 2명당 가마니 한 장이 고작이었다. 이들 방위군 소집자는 행군이 계속 되는 동안 동사·아사·병사 등과 함께 낙오자들이 속출했다. 그야말로 '죽음의 행렬' '해골의 행렬'이 이어졌다.

최종 집결지인 영남에는 당시 51개 교육대가 있었다. 그러나 수용소군도를 방불케 하는 참상이 각 교육대에서 벌어졌다. 제1진이 김해교육대에 도착한 것은 1월 초순이었다. 이들은 피골이 상접한 거지들의 몰골 그대로였다.

이날 이후 김해교육대에서는 하루에도 몇 명의 장정들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어나갔다. 인근의 경산교육대에서도 많을 때는 하루에 20명 이상이 죽어나갔다.

그런데도 당시 국민방위군사령부 고급간부들은 국민방위군 장정 5만여 명이 죽거나 말거나 무려 50여억 원의 예산을 횡령했다. 그 뒤 이런 참상과 부정이 폭로돼 사령관 김윤근 등 횡령 가담자 5명은 1951년 8월 13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 강준만 저 <한국현대사산책> 1950년대 편 제1권 200~209쪽, 조선일보사 <한국현대사 119대사건> 국민방위군 사건 폭로 편 106~107쪽 참조 요약정리 

국민방위군 사건 연루자 공개처형 총살장면(1951.)
 국민방위군 사건 연루자 공개처형 총살장면(1951.)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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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우도강탕(黃牛渡江湯)'

사단장 회의에서 취사장 연료 비리 건의사건 이후 사단장은 일선부대의 제반 보급비리를 파악한 듯 새로운 조치가 내려졌다. 그 조치란 매일매일 부식 보급차량이 각 중대 또는 독립소대별로 부식을 배달하는데, 그 부식차 선임탑승을 보급 하사관 대신에 일선 소대장이 매일 번갈아 탑승케 했다.

나는 그 조치에 따라 어느 날 연대 부식 보급창고로 가서 보급품을 수령해 트럭에 선임 탑승, 대대 내 전 지역에 흩어진 하급부대를 돌면서 그 부식을 나눠주었다.

그때 나는 운전병을 통해 그동안 부식 비리를 듣거나 직접 확인한 적이 있었다. 그 원인은 운전병이나 보급 하사관들을 터치할 수 있는 기관이 바로 그런 비리를 저지르게 하는 원인 제공 처임을 알게 됐다. 이들은 부식차가 지나다니는 검문소의 헌병대, 연대장이나 대대장들의 당번병, 수송부대 등으로 이들이 중간에서 가로채기 때문이었다.

특히 쇠고기나 닭고기가 나온 날은 그들이 먼저 용케 알고 부식 트럭에 접근하여 규정 외로 많이 가져갔다. 그래서 선임 탑승한 보급관은 하급부대에 정량으로 주고자 부대로 가는 도중에 트럭을 개울 옆에 세운다고 했다. 그러면 보급관은 미리 준비한 주사기를 이용하여 닭은 항문으로, 쇠고기는 살덩이 중간 중간에 물을 주입시킨다는 것이다.

한때 우리 사회에 물 먹인 쇠고기 파동으로 크게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그 비리의 방법은 군부대에서 유래되었는지, 아니면 군부대 보급관들이 도살장의 도축사의 그런 비리를 배웠는지, 나는 지금도 거기까지는 모르고 있다.

결국 비리의 주범은 하급부대보다 상급부대나 힘있는 자에게 있었고, 바로 사단장·연대장·대대장·소대장·선임하사관 등 상급자에게 있었다. 그런 지휘관이나 지휘자들이 군 부대 내에서 특권을 당연하게 누리기에 군부대 비리는 실핏줄처럼 전체로 퍼져나갔다.

그래서 유래된 군부대에서 한때 유행한 말은 '황우도강탕(黃牛渡江湯)'이었다. 이 말은 사병들의 쇠고깃국은 누른 소가 강을 건넌 듯, 군부대 내의 쇠고깃국에는 고기는 한 점 없고. 쇠기름만 둥둥 뜨고 있다는 해학적 표현이었다.

각 소대장들의 부식차 선임 탑승이 한 달 쯤 지속되더니 어느 날부터 슬그머니 원 위치 되고 말았다. 아무튼 그런 조치 이후부터 부식은 조금 개선되었지만, 그 근본 개선은 대한민국 전체 국민들의 의식이 근원적으로 확 바꾸지 않는 한 불가능해 보였다. 내가 그동안 살어오면서 살펴 본 부정부패 비리는 위, 아래, 중간 곳곳에 암균처럼 퍼져 있었다. 가장 모범이어야 할 학교에서조차도 깊이 병들어 있었다.

닉슨 독트린

내가 현역으로 복무 중인 그 무렵이었다. 미국 대통령 닉슨은 1969년 7월 25일 괌에서 그의 새로운 대아시아 정책인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고, 1970년 2월 국회에 보낸 외교교서를 통하여 닉슨 독트린을 세계에 선포했다. 이를 '괌 독트린(Guam Doctrine)'이라고도 한다.

그 내용의 요지는 "미국은 앞으로 베트남전쟁과 같은 군사적 개입을 피한다"는 것이다. 즉 월남전에서 '미꾸라지에게 뭐 물린 격'으로 혼이 난 미국은 '태평양 국가'로서 그 지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계속하지만, 더 이상 직접적 ·군사적인 또는 정치적인 과잉개입은 하지 않겠다는 메시지였다. 이 닉슨 독트린은 한국에서 일부 미군들의 철수도 시사하고 있었다.

그래서 전방 미군들 가운데는 일부 철수케 되어 미군들이 그동안 썼던 퀀셋(Quonset) 막사를 한국군에게 이양하고 있었다. 그 무렵 우리 중대는 천막막사로 지내고 있었던 바, 이 퀀셋 자재들을 양도받게 되었다.

그런데 퀀셋 막사 본 공사는 6군단 공병들이 파견 나와 기술지원을 하지만, 그 이전 기초공사는 자대에서 하도록 시달되었다. 그래서 6군단 수송부에서 덤프차를 몇 대 중대로 보내 한탄강에서 모래를 채취하여 중대로 나르게 했다. 그런데 덤프차 운전병들이 운송 도중 연료를 팔아먹거나 태업하지 못하게 소대장들을 선임 탑승케 했다.

나는 난생처음 군 수송덤프차에 선입 탑승했는데, 운전병의 인상이 매우 화난 표정이었다. 곧 상부에서 자기들을 믿지 못하고 낯선 장교를 선임 탑승시켰다는 불만이 그의 얼굴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하지만 나 역시 상부의 명령이라 어쩔 수 없이 선임 탑승했다.

덤프차는 중대를 출발하여 한강 둑 절반 정도(이산포 부근)를 달리더니 둑 위에서 차가 멈췄다. 그러더니 운전병은 차가 고장이 났다고 판초 우의를 차 밑바닥에 깔더니 거기에 드러누워 부지하세월(不知何歲月)이었다. 

나는 그게 세상사람들이 말하는 '달구지 곤조(근성의 일본말)'라는 걸 곧 깨달았다. 나는 그를 달래고자 라면과 음료수를 사준 뒤에야 그 고장 난 덤프차를 움직일 수 있었다. 그날 헤어질 때야 그는 본심을 얘기했다. 그날 그의 태업은 자기네 수송부 하사관의 지시였다고 말했다.

이는 곧 자기들을 감시하거나 견제하는 데 대한 일종의 태업이었다. 정말 우리 사회의 부정부패 비리 구조는 암(癌)세포보다도 더 깊이 뿌리박혀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그 암 균 때문에 '대한민국호'가 침몰할 지도 모르겠다.

대한민국 호를 안전하게 운항시킬 선장은 그 어디에 있는가?

(* 다음 글에 계속)


태그:#어느 해방둥이의 삶과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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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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