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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 제목이라기엔 너무 낭만적인 '끝없는 밤(Endless Night)'은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순수의 예언'의 구절에서 따 온 표현이다.

"어떤 이는 달콤한 기쁨의 운명으로 태어나고,
어떤 이는 끝없는 밤의 운명으로 태어나고."

애거서 크리스티의 '끝없는 밤'
 애거서 크리스티의 '끝없는 밤'
ⓒ 해문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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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끝없는 밤의 운명'으로 태어난 남자가 '달콤한 기쁨의 운명'으로 태어난 여자를 만나면서 살고 사랑하고 죽는 이야기이다. 1967년에 이 작품을 발표한 애거서 크리스티는 자신의 작품 중 이 '끝없는 밤'에 가장 애착이 간다고 했다 한다.

왜 그런지까지는 잘 알 수 없지만, 다 읽고난 후 미루어 짐작해 보건대, 추리소설이라기엔 너무 슬프고 사랑에 대한 심리 묘사가 매우 디테일해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다른 크리스티의 소설과 다르게, 읽고 난 후 이 소설은 이야기의 잔상이 오래 남았고, 한편으로는 슬프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 불쾌한 느낌도 있어서, 하루 정도 가벼운 우울증을 얻었을 정도였다.

이 소설은 로맨스적 성격 이외에도 오컬트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다. 저주에 걸린 땅인 '집시의 땅'에서 주인공들은 만나고 사랑하고 함께 삶을 건설한다. 그러나 '집시의 땅'에선 누구나 불행해진다는 저주가 내려온다. 그 곳에서 만난 집시 여인은 남자와 여자에게 끔찍한 일이 벌어지기 전에 어서 이 땅을 떠나라는 예언을 한다.

땅에 관한 오컬트적 미신 요소는 크리스티의 다른 소설 '열세 가지 수수께끼' 중 하나인 '아스타르테의 신당'에도 나오는데, 그 곳은 라치스 저택으로 오는 사람들마다 크게 다치거나 수술을 받는다. 그 곳에는 아스타르테의 신당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침묵의 숲'이 있다. 그리고 결국 그 곳에서 살인이 벌어진다.

또 이 소설은 3인칭을 즐겨 쓰는 크리스티의 작품으로선 드물게 일인칭 화자에 의해 진행되어 간다. 이는 크리스티가 예전에 썼던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에서 등장했던 기법으로, 사건과 인물에 대한 묘사가 일인칭 화자에 의해 펼쳐지므로 객관적이지 못한 대신에 좀 더 깊이 있게 서술이 진행되고, 사물과 과정에 대한 감정이 더 직접적으로 드러난다는 특징이 있다.

범인이 밝혀지는 과정과 기법도 '끝없는 밤'과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이 거의 일치한다. 일인칭 시점 기법의 한계점으로 인해서일 텐데, '끝없는 밤'은 이로 인해 서정성을 획득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소설이 슬프게 읽히는 이유는 사랑과 위선, 증오와 배신이 한데 얽혀서 일어나고,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가운데에서도 '달콤한 기쁨의 운명'은 의심 없이 흘러가기 때문이다. 사랑은 이 슬프고 믿을 수 없는 세상에서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남자와 여자를 찾아오기 때문이다.

이 소설이 발표되던 한 해 전 1966년에 태어난 세라 워터스는 2002년에 '핑거스미스' (나중에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의 원작이 된 작품)를 발표하는데, 두 소설의 얼개가 놀랍도록 서로 닮아 있다.

세라 워터스 원작의 영화 '핑거 스미스'(2005)
 세라 워터스 원작의 영화 '핑거 스미스'(2005)
ⓒ 핑거스미스(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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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라 워터스가 이 작품의 플롯을 차용했다고 밝힌 바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인물들의 기본 관계, 그리고 그 관계의 시작점, 인물과 인물이 서로에 대해 품는 의도 등 기본 골격은 매우 흡사하다. 다만 이야기를 끝에서 풀어나가는가, 시작에서 출발하는가 그 차이 정도만 있다. '끝없는 밤'에서는 크리스티의 작품들이 으레 그렇듯이, 맨 마지막에 가서야 진짜로 벌어진 일들은 어떤 일들이었는지 설명을 해 준다. 

'아가씨'를 포함한 세 작품 모두 '욕망과 진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을 다룬다. 갈등이 빠른 속도로 전개되다가, 처음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는 시점이 찾아온다. 사람의 마음은 목적에 의해서만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음은 진실에 저도 모르게 대답을 하게 되고, 불순했던 의도마저 인간의 본성 아주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가느다란 한 줄기 선한 의지를 따라가게 되기 때문이다.

인물들은 자신이 처음 의도했던 바와 다르게 움직이는 자신의 마음을 느끼면서 당황하게 된다. 마음은 내 것이되 내 맘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사실 마음은 운명을 따르게 되는, 신의 영역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아, 사랑이 가장 충만한 그 시간에, 모든 걸 멈춰 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 그러나 신은 보통 사랑을 계속 끝까지 밀어붙이고, 그렇게 사랑의 가장 아름다웠던 시간은 퇴색하게 마련이다. 마치 '집시의 땅'을 떠날 수 없고 '침묵의 숲'에 자꾸 발을 들여놓게 되는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향해 나아가게 되는 어리석은 사람들 같으니!


끝없는 밤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석환 옮김, 해문출판사(1989)


태그:#애거서크리스티, #끝없는밤, #핑거스미스, #아가씨, #추리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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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작가, 임학박사, 연구직 공무원, 애기엄마. 쓴 책에 <착한 불륜, 해선 안 될 사랑은 없다>, <사랑, 마음을 내려 놓다>. 연구 분야는 그린 마케팅 및 합법목재 교역촉진제도 연구. 최근 관심 분야는 환경 정의와 생태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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