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제규는 일반 고등학교에 다닙니다. 날마다 해야 하는 보충수업과 야자, 두 달 반 동안 고민한 제규는 담임선생님을 찾아갔습니다. 정규수업 끝나면 집에 가서 밥을 하고 싶다고요. 고등학교 1학년 봄부터 식구들 저녁밥을 짓는 제규는 지금 2학년입니다. 이 글은 입시공부 바깥에서 삶을 찾아가는 고등학생의 이야기입니다. - 기자 말 

남편이 차린 일요일 저녁 밥상. 제규는 밥상 치운 뒤에 오이 피클을 담기 시작했다.
 남편이 차린 일요일 저녁 밥상. 제규는 밥상 치운 뒤에 오이 피클을 담기 시작했다.
ⓒ 배지영

관련사진보기


"한을 품고 죽으믄 귀신이 된다이. 알고 보믄 짠한 사람들이어야."

어른들 말은 맞았다. 뜻하지 않은 일로 죽음을 맞은 젊은 사람들(처녀나 총각)은 귀신이 되어 나타났다. <전설의 고향>에서 그랬다. 스물두 살에 빨갱이로 몰려서 집단 학살당한 우리 할아버지도 그랬을지 모른다. 당신의 첫 아기가 백일을 맞는 것도 못 보고 세상을 떠났으니까. 그런 생각이 들고 나서는 귀신이 출몰하는 무덤이나 연못이 덜 무서워졌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곳에서 공포를 느꼈다. 제규가 유치원에 다닐 때, 금요일마다 영화 한 편씩을 빌렸다. <보노보노>처럼 보들보들한 이야기를 좋아했지만 <몬스터 주식회사>도 자주 봤다. 제규와 10년 터울로 낳은 꽃차남하고도 <몬스터 주식회사>를 보았다. 아이들의 비명을 채집해서 에너지를 만드는 괴물들은 벽장에서 튀어나왔다. 

남편이 출장 가고, 꽃차남이 시후(위층 사는 꽃차남 친구)네서 자면, 안방의 옷장 문이 신경 쓰였다. 제규 방으로 가서 "같이 자자"고 매달렸다. 10대 소년은 퉁명스럽게 "싫어요!"라고 했다. 거절당했다고 상처받으면 미성숙한 사람, 거실 소파에서 때를 기다렸다. 귀신의 활동시간은 오전 2시부터. 그때쯤에는 반드시 잠든 제규 옆에 누웠다. 

"엄마, 식구들 자는 새벽 2시에 요리하면 '우주의 기운'이 느껴진다니까요. 진짜 좋아요."
"귀신 돌아다니는 시간이야. 자라고, 쫌!"   

일요일 밤, "내일 학교 가기 싫다"면서도 제규는 오이 피클을 담갔다. 원래는 새벽 2시에 만들어야 하는데... 일찍 자야 학교 간다.
 일요일 밤, "내일 학교 가기 싫다"면서도 제규는 오이 피클을 담갔다. 원래는 새벽 2시에 만들어야 하는데... 일찍 자야 학교 간다.
ⓒ 배지영

관련사진보기


제규가 피클 담고 나서 만든 샐러드. 냉장고에 오래 둔 재료를 써서 만든 거라 먹지는 말라고 했다. 사진만 찍었다.
 제규가 피클 담고 나서 만든 샐러드. 냉장고에 오래 둔 재료를 써서 만든 거라 먹지는 말라고 했다. 사진만 찍었다.
ⓒ 배지영

관련사진보기


제규는 개학하자마자 '우주의 기운'과는 멀어졌다. 학교 가려면 일찍 자야 하니까. 그래서 피클은 일요일 저녁 9시쯤에 담갔다. 고요하게 작업하지는 않았다. "진짜 내일 학교 가기 싫다"고 하면서 피클 담을 유리병을 열소독 했다. 학교 끝나고는 바로 요리학원과 헬스클럽에 갔다. 집에 오면 오후 10시쯤, "이건 사람 사는 게 아니야"라고 했다.  
 

요리학원은 좀 쉬기로 했다. 학교에서 극기 훈련을 가고, 한식조리사 필기시험도 봐야 하니까. 나는 제규에게 '널널함'을 선사하고 싶었다. 그래서 학교 끝나는 시간에 데리러 갔다. 금요일(8월 26일) 오후였다. 1시간 동안 시내버스를 타지 않아도 되는 제규 표정은 온화해졌다. 집에 와서는 온라인 게임이나 걸그룹 트와이스의 멤버 '사나' 동영상도 찾아보지 않았다.    

'틀에 박히지 않은' 로제 파스타

로제 파스타. 크림과 토마토소스를 졸여서 만든 거라고 한다. 사진은 그저 그렇게 보이지만 무척 맛있었다.
 로제 파스타. 크림과 토마토소스를 졸여서 만든 거라고 한다. 사진은 그저 그렇게 보이지만 무척 맛있었다.
ⓒ 배지영

관련사진보기


"갑자기 로제 파스타가 생각난 거예요. 한 번도 안 해봤거든. 시장에 가서 2500원 주고 오징어 한 마리를 샀어요. 새우는 7500원어치 샀고요. 마트에서는 생크림만 사고요. 토마토소스는 만들어놓은 게 있잖아요. 그거하고 생크림하고 졸였어요. 파스타 면도 삶아요. 손질한 오징어랑 새우는 팬에 기름 두르고 볶아요. 마늘 조금 넣고요."

로제 파스타는 크림 파스타와 토마토소스를 합쳐서 만드는 파스타라고 한다. 베이컨이나 햄을 넣고 만드는 사람도 있고, 오징어나 새우 같은 해산물을 넣어서 만드는 사람도 있다. 제규는 "전문가가 아니라서 잘 몰라요"라고 하면서도 "파스타는 음식 자체가 얼마든지 변형할 수 있어요. 들어가는 식재료를 달리하면요"라고 했다.

"제규야, 진짜 맛있다잉."
"(웃음) 나도 알아요. 만들 때 너무 행복했어. 요리학원에서는 규정을 지키면서, 틀에 박힌 요리를 하잖아요. 그게 싫어. 엊그제는 찹쌀가루로 화전 만들었는데 맛이 없어. 만드는 것도 재미없고요. 유교 같아. 필요 없는 것도 해야 해요. 음식은 맛있게 해서 먹는 거잖아요."

요리학원에서 만든 화전.
 요리학원에서 만든 화전.
ⓒ 배지영

관련사진보기


훈훈한 분위기는 시후네 집에서 놀다 온 꽃차남 덕분에 깨졌다. 초등학교 1학년 2학기에 접어든 꽃차남은 받아쓰기 시험을 본다. 입학 직전에야 보름쯤 한글 공부를 하고서 초등생이 된 꽃차남, 글자를 읽을 줄만 안다. 맞춤법을 잘 모른다. 10년 전에 제규도 그랬다. 무척 고생했다. 그래서 동생만큼은 '받아쓰기 세계의 꽃길'을 걷게 하려고 한다.

1번부터 10번까지 있는 받아쓰기. 띄어쓰기 포함해도, 최고 긴 문장이 15자를 넘지 않는다. 후딱 쓸 것 같다. 그러나 꽃차남은 한 문장 쓰고 나면은 몸이 배배 꼬인다. "힝~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할 거야"라는 만고의 진리를 내세운다. 태연하게 딱지를 치고, 색종이를 접고, 레고를 조립하고, 그림을 그린다. 온 집안을 어지르고 다닌다.           

"엄마, 우리 그냥 <길버트 그레이프> 봐요. 보고 싶었거든요. 지금 켤게요."

제규가 태어나기도 전에 나온 영화. 학생 시절에 참 좋아했던 영화를, 소년이 된 아들과 IPTV로 봤다. 예전에는 청년 가장이던 길버트와 지적장애 동생 어니, 캠핑카 여행자 베키만 보였다. 아이 둘을 키우는 엄마라서 그럴까. 길버트의 (고마운) 동네 친구들도 보이고, '사랑하는 내 새끼들'에게 '짐'이 되고 만 어머니도 보였다.       

나도 제규에게 '짐'을 지워주고 있다. 4년 전부터 영어학원에 다닌다. 밥벌이와 육아뿐인 세상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주 1회, 일 끝나고 가는 거라 부담 없을 줄 알았다. 웬걸! 똥 누고 뒤처리를 못 하는 애를 둔 처지라서 매번 '갈까 말까' 고민했다. 남편은 밤에 더 바쁜 사람, 그러니 "1일 1똥 모닝똥을 싸자"는 가훈을 만들어서 꽃차남에게 호소까지 해봤다. 

"공부하고 오세요. 동생 안 울리고 진짜로 잘 볼게요."      

제규 덕분에 첫 발을 내디딜 수 있었다. 중간에 그만두지 않고, 계속 공부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의 관계는 쌓이지 않을 때가 있다. 저축되지 않는다. 갚아야 할 '은혜'가 엄청나게 많은데도, 어느새 부탁하고 있다. 나는 또 입을 뗐다. 매주 토요일은 제규가 친구들 만나서 온종일 노는 날, 그런데 우리 부부는 아침 일찍 서울에 가야 한다.

"제규야, 미안해. 토요일은 너도 약속 있잖아. 근데 꽃차남 볼 수 있어?"
"어차피 한식조리사 공부하려고 했어요. (웃음) 엄마 어디 가면, 나도 좀 좋잖아요."    

제규와 꽃차남, 고성과 '터치'가 오가는 형제 사이. 엄마 아빠가 모두 집에 없으면, 꽃차남은  태세전환에 들어간다. 제규를 "형형"이라고 하지 않고 "형형님"이라고 부른다. 사람 신경이 곤두서게 징징대는 태도도 거의 버린다. 제 형이 시키는 대로 한다. 텔레비전 끄라면 그만 보고, 장난감 치우라면 정리하고, 밥을 먹으라면 군말 없이 식탁에 앉는다.

열여덟 소년의 밥상, 단촐했다

로제 파스타.
 로제 파스타.
ⓒ 배지영

관련사진보기


그날 제규는 동생에게 "숙제부터 해"라고 했다. 꽃차남은 받아쓰기 문장을 1번부터 10번까지 두 번 썼다. 꽃차남은 생각했을지 모른다. '엄마 아빠 올 때까지 이러고 있어야 해?'라고. 제규가 지시하는 대로 글자가 아주 많은 책도 두 권 읽었다. 꽃차남의 번뇌는 그치지 않았겠지. 형의 '폭정'이 없는 곳, 친구 시후네 집으로 가고 싶었겠지.       

"꽃차남이 시후네 집 간다고 찡찡댔어요. 가라고 했어. (오전) 11시니까 폐 끼칠 만큼 이른 시간은 아니잖아. 사실 엄마 편하라고 숙제시켰는데 너무 힘들었어요."
"말 안 듣는다고 때렸어? 엄마 없을 때는 그러지 마."
"안 때려요. 엄마 없으면 꽃차남도 엄청 노력해요. 그래야 내가 만화 틀어주거든."

집에 혼자만 남은 제규. 먼저 음하하핫! 웃었다. 영어 동아리 시간에 필요한 '패스트푸드가 우리 몸에 미치는 영향'을 프레젠테이션 문서로 만들었다. 레시피 노트를 썼다. 게임도 좀 했다. 낮잠도 잤다. 반 친구가 "(극기 훈련) 장기자랑 춤 연습하자"고 전화했을 때는 오후 4시. 마음에 걸리는 사람은 꽃차남 뿐이었다. 시후네 집에 너무 오래 있었으니까.

제규는 꽃차남을 데리러 갔다. 반가워하지 않았다. 마음이 급해진 제규는 무작정 "이리 와. 갈 데 있어"라고 했다. 제규가 깜빡한 게 있다. 열 살 미만의 어린이들 몸에는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는 무기가 장착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건 바로 '쌩 울음'. 꽃차남은 울고 불며 버텼다. 제규는 할 수 없이 혼자서 춤 연습하러 갔다.  

"친구들이랑 만나서 춤 좀 맞춰보고 바로 꽃차남 데리러 갔어요. 그때는 순순히 따라왔어. 책 두 권 읽히고는 텔레비전 보라고 했어요. 나는 밥 차리고요. 친구도 데려왔거든요. 일본식 돈가스를 만들었어요. 맛있게 됐지. 반찬 필요 없어서 피클 만들어놓은 것만 꺼내서 차렸어요. 밥통에 있는 밥도 다 먹었고. 사진도 찍어놨어요."

8월 27일 토요일 저녁, 제규랑 친구랑 둘이 먹은 밥.
 8월 27일 토요일 저녁, 제규랑 친구랑 둘이 먹은 밥.
ⓒ 강제규

관련사진보기


열여덟 살 소년 둘이 마주 앉아서 먹은 밥상. 단출하다. 꾸밈없어 보인다. 자세히 보니까 평상시에 먹는 밥그릇이 아니다. 일본식 분위기를 내려고 찬장에 둔 그릇을 꺼내서 썼다. 그렇게 친구 대접을 할 줄 아는 근사한 내 아들은 돈가스 튀긴 그릇이랑 조리도구를 설거지통에 쌓아두었다. 엄마가 할 말은 뻔할 뻔자겠지. 제규는 선수를 쳤다.

"엄마! 내일 아침에 설거지 할 거예요. 오늘 토요일이잖앙~." 


태그:#로제 파스타, #오이 피클, #초딩 1학년 받아쓰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소년의 레시피』 『남편의 레시피』 『범인은 바로 책이야』 『나는 진정한 열 살』 『내 꿈은 조퇴』 『나는 언제나 당신들의 지영이』 대한민국 도슨트 『군산』 『환상의 동네서점』 등을 펴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