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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도 부흥리에 있는 숭모사 모습으로 매년 음력 3월 3일에 귤은 김유선생을 모시는  제사를 지낸다.
 청산도 부흥리에 있는 숭모사 모습으로 매년 음력 3월 3일에 귤은 김유선생을 모시는 제사를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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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들과 동행해 청산도 양지리 마을 임화규(84세)씨 댁을 방문했다. 마을유래와 구비문학에 대한 얘기를 들으며 기록하던 중 임화규씨가 김유 선생에 관한 기록이 적힌 오래된 고서 복사본을 들고 나왔다.

곰팡이가 슬고 복사본의 질도 떨어졌지만 세심하게 조사해 판독하면 글 내용을 판단하는 데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혹시 고서가 더 있지 않을까?" 하며  광을 뒤지니 집안 대소사를 기록한 장부와 문집도 나왔다. 연구원들은 판독을 위해 조심스럽게 한 장 한 장을 촬영했다.

청산도 역사와 문화에 정통한 임화규씨 댁에서 나온 고문서들. 부친의 스승인 김유 선생에 관한 글과 집안 대소사가 적힌 문서도 있었다
 청산도 역사와 문화에 정통한 임화규씨 댁에서 나온 고문서들. 부친의 스승인 김유 선생에 관한 글과 집안 대소사가 적힌 문서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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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와 가까운 거문도에서 김유 선생의 귤은당을 취재했던 필자는 청산도에 김유 선생 흔적이 있다는 것에 깜짝 놀랐다. 지도 검색을 해보니 두 섬 간의 직선거리가 40㎞ 밖에 안 돼 수긍이 갔다.

귤은(橘隱) 김유 선생(1814~1884). 1814년 거문도 동도의 유촌리에서 출생한 선비로, 조선조 6대 성리학자로 손꼽혔던 노사 기정진의 수제자이기도 하다. 거문도는 영국이 섬을 점령해 '해밀턴'으로, 중국에서는 '거마도(巨磨島)' 등으로 불렀다.

거문도는 군사적 요충지에 자리해 강대국들이 탐냈던 섬이다. 1885년 영국군이 거문도를 불법 점령하자 조선의 유사당상 엄세영은 청나라 수군 제독 정여창과 함께 거문도를 방문해 엄중 항의했다.

이때 청나라 수군 제독 정여창이 김유의 제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중에 그들의 필담에 감탄하여, 이 섬은 문장가가 많은 곳임으로 삼도(三島)를 클거(巨) 글월문(文) '거문도(巨文島)'로 명명해 줄 것을 조정에 건의함으로써 이때부터 거문도라 부르게 된 것이다.

자신의 학문에 자부심이 있어 과거시험을 보고자 했었던 그는 장성에서 성리학의 대가 노사 기정진을 만나 문하생으로 공부한 후 거문도로 돌아와 '낙영재(樂英齋)'를 세워 후학을 양성하다 청산도로 옮겼다.

거문도에는 제자 박규석 등이 동도에 귤은당을 세웠고(1904년), 청산도에는 제자 김낙인 등이 부흥리에 숭모사를 세워(1885년) 귤은의 뜻을 기려오고 있다.

귤은 정신 이어받은 거문초 서도 분교, 대한민국 섬 학교 중 가장 오래돼

귤은의 뜻을 이어 거문도에 근대교육을 시작한 이는 김상순 선생이다. 거문도 서도에서 출생해 1899년에 일본 메이지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정부 관리로 재직하던 그는 일사늑약이 체결되자 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해 고향으로 돌아와 사립 '낙영학교'를 설립했다.

111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거문초등학교 서도 분교 모습. 대한민국 섬 학교 중에서 역사가 가장 깊다
 111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거문초등학교 서도 분교 모습. 대한민국 섬 학교 중에서 역사가 가장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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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도 동도에 있는 귤은사당 모습
 거문도 동도에 있는 귤은사당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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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영학교는 광주 송정리와 목포에 이어 전남에서 세 번째로 세워진 근대교육기관이다. 세월이 감에 따라 여러 차례 교명이 바뀌고 거문초등학교 서도 분교로 교명이 변경됐지만 대한민국 섬 학교 중에서 역사가 가장 깊은 학교다.

청산도에 교육열 지핀 귤은 선생업적..."청산가면 글 자랑 말라"

연구원들의 조사연구에 응한 임화규씨 부친은 김유 선생의 제자이다. 청산 중학교 국어교사로 퇴직한 임씨는 지역 역사와 문화에 해박하고 김유 선생을 모시는 숭모사 행사에 부부가 참여한다.

임화규씨가 보여준 <귤은당차운>집도 부친의 제자가 보관해오던 것을 우연히 발견해 교사재직 시절에 복사해놓은 것이다. <귤은당차운>집 중간을 살펴보면 임화규씨의 부친이름과 호가 적혀 있었다.

<귤은당차운> 모습. 임화규씨가 청산중학교 국어교사로 재직시절 지인으로부터 김유 선생과 부친의 글이 기록된 책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복사했다.
 <귤은당차운> 모습. 임화규씨가 청산중학교 국어교사로 재직시절 지인으로부터 김유 선생과 부친의 글이 기록된 책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복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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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3년 30세의 젊은 나이로 거문도에서 청산도로 이주한 귤은 선생은 부흥리에 서재를 설치하여 40여 제자를 가르치다가 71세에 타계했다. "청산가면 글 자랑 말라"는 말은 청산도의 문명 수준을 동경하는 말이다. 

청산 사람들은 비록 누더기를 걸치고 있어도 문예가 대단해 속담에 "장고를 지고 다녀도 시 한 두 수는 능히 지었다"고 전해진다. 주민들은 매년 음력 3월 3일에 귤은 선생을 기리는 제사를 지낸다.

덧붙이는 글 | 여수넷통에도 송고합니다



태그:#김유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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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 인권, 여행에 관심이 많다. 가진자들의 횡포에 놀랐을까? 인권을 무시하는 자들을 보면 속이 뒤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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