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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깨달음'이라는 세 글자는 쉬 범접할 수 없는 비밀이었고 궁금증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불교 최대 종단인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장인 현응 스님이 '깨달음=이해'라는 돌을 던졌습니다. 그러자 불교계에서 물결 같은 파장이 일었습니다. 그냥 그렇고 그런 잔잔한 파장이 아니라 파고가 높은 파도 같은 반응이었습니다.

부산 범어사 주지, 안국선원 선원장인 수불 스님은 '깨달음은 이해'라는 현응스님의 주장에 "성철 스님이 계셨다면 '마구니'라며 주장자를 내려쳤을 것"이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를 주제로 한 세미나도 열려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으니 만만치 않은 반응입니다.(* 주장자 : 선사(禪師)들이 좌선할 때 또는 설법할 때 지니는 지팡이)

사실 그동안 오도송(悟道頌, 고승들이 부처의 도를 깨닫고 지은 시가)이라는 걸 읊은 스님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도송이라는 걸 아무리 읽어봐도 뭘 깨달았다는 것인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원래 일반인들이 쉬 알 수 없는 게 '오도송'이라고 방어벽을 치면 딱히 할만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깨달음'이란 결국 출가 수행자들만의 전유물이며 스님들만의 영역이라는 이기적 해석이 될 것입니다.

논쟁 속 정의 <깨달음과 역사>

<깨달음과 역사>(지은이 현응 / 펴낸곳 불광출판사 / 2016년 8월 12일 / 17,000원)
 <깨달음과 역사>(지은이 현응 / 펴낸곳 불광출판사 / 2016년 8월 12일 / 17,000원)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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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과 역사>(지은이 현응, 펴낸곳 불광출판사)의 저자인 현응 스님은 율장의 하나인 마하박가(大品律藏), 성도(成道) 직후 깨달음의 내용을 정리하는 부처님의 생각과 첫 설법(초전법륜) 과정을 서술하는 것으로 시작한 <마하박하>를 '깨달음 = 이해'라고 하는 주장의 전거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모든 삼라만상은 그것이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개념적이든 그 어떤 것이든 연기적(緣起的)으로 드러나 있으며(존재하는 것이 아닌), 그러한 상태를 이해하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한다." -107쪽-

불교에서는 누구나 깨달으면 각자(覺者, 부처)가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깨닫는다는 게 참 요원합니다. 깨달음에 대한 정의가 불분명한 비밀에 가려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깨달을 수 없으니 누구나 부처가 된다는 말은 허언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깨달음 = 이해'로 정의 된다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세속인이라고 해서 깨닫지 못할 것 없고,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이 이해로 정의되고, 깨달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그 범위와 정도가 목적과 목표로 설정된다면, 누구나 깨달으면 부처가 된다는 말이 현실적으로도 가능하게 됩니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고도로 수련된 높은 정신세계를 이루는 것이라 하지 않았다. 깨달음은 '잘 이해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깨달음이란 '잘 이해하는 것(understanding)'이라 말하면 수준이 떨어지는가?  깨달음을 '∼에 대한 이해'로 볼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몸과 마음의 완성된 그 어떤 경지'로 볼 것인가에 따라 깨달음을 이루고자 하는 방법도 크게 달라질 것이다. 깨달음을 얻는 데 소요되는 시간이나 기간은 말할 것 없이 크게 차이날 것이다. -315쪽-

사실 일부 스님들이 주장하는 깨달음은 좇고 쫒아도 잡히지 않는 파랑새이고 무지개일지도 모릅니다. 뜬구름 같은 깨달음은 무엇을 어떻게 깨달았다는 것인지 감조차 잡히지 않습니다. 천안통이 터졌다는 건지, 숙명통이 터졌다는 건지… 아니면 신이라도 내려 어떤 초능력을 갖게 되었다는 것인지를 가늠할 수 없으니 막연히 짐작하고 미루어 어림할 뿐입니다.

하지만 깨달음보다 더 중요한 건, 저자가 '7월에 보낸 편지'에서 언급하고 있는 '지행합일', 아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삭발을 하고 염의를 입고 사는 스님들 중에 '육바라밀'과 '오계', '하심'과 '방하착', '자비'와 '보시' 등등이 뭔지를 모르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책에서 저자가 정의하고 있는 깨달음, 연기적 상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분도 아마 거의 없을 겁니다. 그런데 작금의 승가는 세속인들 세계 못지않게 잡다한 사건들로 시끄럽습니다.

승가가 깨달음을 파랑새나 무지개처럼 정의하지 말고, 아는 만큼 실천하며 살아간다면, 작금 세속인들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는 부끄럽고 또 부끄러운 잡다한 이야기들은 아예 생기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성철 스님이 살아 계셨다면 '마구니라며 주장자를 내려쳤을 것'이라는 혹평을 받고 있는 현응 스님의 주장 "깨달음=이해"가 왠지 반갑기만 한 것은 막막하기만 했던 깨달음이 결코 이룰 수 없는 난공불락의 '도'가 아니며, '누구나 깨달으면 부처'라는 말이 결코 헛소리가 아니었음을 실감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기대됩니다.

덧붙이는 글 | <깨달음과 역사>(지은이 현응 / 펴낸곳 불광출판사 / 2016년 8월 12일 / 17,000원)



깨달음과 역사 - 개정증보판

현응 지음, 불광출판사(2016)


태그:#깨달음과 역사, #현응, #불광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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