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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가 한국전쟁에서 유엔군에게 "Go!"라고 공격명령을 내리고 있다.
 맥아더가 한국전쟁에서 유엔군에게 "Go!"라고 공격명령을 내리고 있다.
ⓒ 맥아더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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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국 버지니아 주 남단 노퍽(Norfolk) 항구도시를 두 차례나 방문했다. 그 도시에는 맥아더기념관이 있기 때문으로, 첫 번째는 2004년 2월 25일 재미동포사학자인 이도영 박사의 안내로, 두 번째는 2007년 3월 6일 재미동포 박유종(임시정부 박은식 대통령 손자) 선생의 안내로 그 먼 곳을 찾아가서 한국전쟁 관련 사진을 수집해왔다.

맥아더는 미국 아칸소 주 리틀록에서 태어났으나, 그의 어머니 고향인 노퍽에 자주 들렀다. 1960년 노퍽 시장은 맥아더기념관을 유치하기 위해 유서 깊은 옛 노퍽 시청 석조건물을 기념관으로 제공했다고 한다. 맥아더는 어머니의 고향에 기념관이 세워질 만큼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으며 자랐다.

노퍽에 이르자 시가지 곳곳에 맥아더 장군의 흔적이 많이 보였다. 맥아더기념관이 있는 일대는 '맥아더 스퀘어'라고 명명했는가 하면, 언저리 거리와 건물 벽 곳곳에는 미국 역사상 몇 되지 않는 오성(五星) 장군 맥아더를 상징하는 별 다섯 개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맥아더기념관 정면에는 맥아더의 동상이 서 있었고, 기념관 꼭대기에는 커다란 미 성조기가 바람에 펄럭였다.

미국 버지니아 주 노퍽에 있는 맥아더기념관 전경
 미국 버지니아 주 노퍽에 있는 맥아더기념관 전경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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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한 처형 장면들

기념관 자료실에는 맥아더가 생전에 소장했던 도서와 선물들이 잘 진열돼 있었고, 자료실에는 수많은 자료 파일들이 잘 갈무리돼 있었다. 맥아더기념관의 진열된 대부분의 선물들은 일본인에게 받은 것이었다. 태평양 전쟁에서 패전한 일본이 맥아더를 구워삶아 천황제를 유지하고, 전범 처형의 확대를 막았다는 이야기가 틀린 말은 아닌 듯했다.

맥아더기념관 자료실에 놓인 비디오를 틀자 1950년 한국전쟁 직전 서울 근교에서 벌어진 좌익사범을 처형하는 장면이 화면에 나왔다. 마흔 명 정도의 사수가 스무 명 정도의 좌익사범들을 나무기둥에 묶어놓은 채 가리개로 눈을 덮고는 가슴에 사격 표지판을 붙인 다음, 20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일제히 방아쇠를 당겼다.

총살이 끝나자 검열관이 나무기둥에 묶인 좌익사범들의 사망 여부를 일일이 확인하고는 미처 죽지 않은 죄수에게는 그 자리에서 머리에다 권총으로 다시 확인 사살했다. 나는 그 장면은 차마 볼 수 없어 눈을 감았다.

한국전쟁 직전 좌익사범 총살형 동영상 장면
 한국전쟁 직전 좌익사범 총살형 동영상 장면
ⓒ 맥아더기념관/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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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국전쟁 사진 파일을 신청하자 맥아더기념관 학예사(James w. Zobel)가 여러 문서 상자를 내놨다. 맥아더의 전 생애를 살펴볼 수 있는 사진자료들도 많았다. 나는 수많은 사진자료 가운데 한국전쟁 관련 사진만을 골라 일일이 스캔했다.

한국전쟁 발발한 지 나흘만인 1950년 6월 29일 맥아더가 도쿄에서 한국으로 날아와 최전선인 시흥 일대를 시찰하는 장면, 1950년 9월 15일 마운트맥킨리 호 함상에서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는 장면, 1950년 9월 29일 중앙청 현관 서울수복기념식에서 맥아더가 이승만 대통령과 나란히 참석한 장면, 1950년 10월 15일 웨이크 섬에서 맥아더가 트루먼 대통령과 만나는 장면, 1950년 11월 24일 신의주 상공에서 맥아더가 적정을 살펴보는 장면, 1951년 4월 16일 만주 폭격을 주장하다가 투르먼 대통령의 해임 명령을 받고 맥아더가 도쿄 하네다 공항을 떠나는 장면 등을 스캔했다.

1945년부터 한국전쟁 직전까지 미군정 및 정부수립 직후, 한국 내 게릴라를 체포하거나 처형한 뒤 목 자른 사진 등을 담은 앨범이 있었다. 이들 사진을 스캔하고 싶었지만 학예사는 그 앨범의 사진만은 한 장당 복사값으로 100달러나 요구해 디지털카메라에 담는 걸로 대체했다. 맥아더기념관에서 너무나 끔찍한 장면을 많이 본 탓인지 돌아오는 길에는 두 번 모두 한동안 말을 잊었다. 

맥아더기념관에 있는 한국인 처형 장면 앨범
 맥아더기념관에 있는 한국인 처형 장면 앨범
ⓒ 맥아더기념관/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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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의 빛

1880년에 태어난 맥아더는 1898년 18세에 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그의 인생행로는 순풍으로 1925년에는 미 육군 역사상 가장 젊은 나이에 소장이 됐고, 10년 후에는 미 육군참모총장으로 그 명성을 날렸다. 태평양전쟁 중인 1944년 12월에는 육군 원수가 되고, 곧 이어 태평양지역 미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됐다.

1945년 태평양전쟁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자 맥아더는 그해 9월 2일 도쿄 만 미조리호 함상에서 일본군 항복조인식에 승전국 대표로 참석해 항복문서를 받았다. 이후 일본군 점령사령관으로 일본군의 해산, 일본의 군국주의 해산 등 그는 일본에서 절대 권력을 휘둘렀다.  

미 미조리호 함상에서 일본대표로 시게미스 마모루 외무대신에 이어 우메스 미치로 육군참모총장이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이 광경을 맥아더 미 극동사령관이 지켜보고 있다(도쿄, 1945. 9. 2.).
 미 미조리호 함상에서 일본대표로 시게미스 마모루 외무대신에 이어 우메스 미치로 육군참모총장이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이 광경을 맥아더 미 극동사령관이 지켜보고 있다(도쿄, 1945. 9. 2.).
ⓒ 맥아더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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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즉시 그는 주한 유엔군사령관으로 임명됐다. 그해 8월 말에 이르러 낙동강 남쪽으로 밀렸던 국군과 유엔군은 맥아더의 인천상륙으로 단박에 전세를 뒤집어 놓아 그의 이름을 세계에 떨쳤다. 더욱이 인천상륙작전은 조수 간만의 차와 협소한 지형을 문제 삼아 미 합참의 끈질긴 반대와 전문가들의 성공률 1/5000이라는 비관적인 견해가 있었음에도, 맥아더는 이를 감행해 2주 만에 수도 서울을 수복케 했다. 이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간 인민군은 허리가 끊어지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반면, 유엔군은 전세를 일순간에 역전시키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고, 10월 1일에는 국군이 38선을 돌파했다. 국군과 유엔군의 북진은 인민군들의 남하보다 더 빠른 속도로 북상했다. 그해 10월 10일에는 원산을 점령하고, 17일에는 함흥과 흥남, 19일에는 북한의 수도인 평양까지 손아귀에 넣었다. 10월 26일에는 국군 제6사단이 압록강 초산에 이르는 등, 10월 말에는 유엔군 측이 북한의 대부분을 점령했다. 유엔군의 이렇게 빠른 북상은 결과적으로 인민군과 똑같은 욕속부달의 치명적 시행착오를 답습했다.

맥아더 장군이 Mount Mckinley 함상에서 상륙지점을 바라보고 있다(1950. 9. 14.)..
 맥아더 장군이 Mount Mckinley 함상에서 상륙지점을 바라보고 있다(1950. 9. 14.)..
ⓒ 맥아더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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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앙청에서 열린 서울수복기념식에서 기도하는 맥아더 장군(1950. 9. 29.).
 서울 중앙청에서 열린 서울수복기념식에서 기도하는 맥아더 장군(1950. 9. 29.).
ⓒ 맥아더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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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의 오만

그 무렵 태평양의 웨이크 섬에서는 트루먼 미 대통령과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 사이에 회담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맥아더는 트루먼에게 자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미국은 한국전쟁에 승리할 것이며, 추수감사절인 11월 23일까지는 인민군의 저항을 잠재울 것입니다. 한국에 파병된 미군은 크리스마스 이전에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자 트루먼은 맥아더에게 물었다.

"중국이 한국전쟁에 개입치 않겠는가?"
"우리는 그들의 개입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공군이 없습니다. 만약 그들이 한국전에 개입한다면 대량 살육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트루먼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이 Wake 섬에서 한국전에 대하여 논의하고 있다(1950. 10. 15.).
 트루먼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이 Wake 섬에서 한국전에 대하여 논의하고 있다(1950. 10. 15.).
ⓒ 맥아더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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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한 맥아더는 트루먼에게 아주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중국군을 몹시 깔보았다. 하지만 곧 맥아더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트루먼과 맥아더의 웨이크 회합이 있은 지 열흘 뒤 10만 명의 중국군이 압록강을 건너 대규모로 한국전쟁에 개입했다. 그때부터 한국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사실 중국은 한국전쟁 개전 이래 소극적인 입장을 취해 오다가 미군의 38선 돌파가 임박하자 미국에 여러 차례 경고했다. 그들은 10월 9일 북경방송을 통해 한국전쟁 개입을 시사했다. 

"미군의 38선 돌파는 중국의 안전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다. … 중국 인민은 평화를 지키기 위해 미국의 침략전쟁에 맞서게 됨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미 24사단을 사열하는 맥아더 장군(1951. 2. 13.).
 미 24사단을 사열하는 맥아더 장군(1951. 2. 13.).
ⓒ 맥아더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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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모한 맥아더 '크리스마스 공격작전'

오만한 맥아더는 이 경고를 허풍으로 여긴 채 깡그리 무시하고는 북진을 감행했다. 그러자 중국은 자국 국방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마침내 한국전에 참전했다. 미군과 중국군의 첫 교전은 10월 하순에 이뤄졌다. 미국은 첫 전투에서 생포한 중국군 포로를 통해 참전이 확인됐지만, 이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미국은 원시적인 중국군이 감히 세계 최강 미군에 대항키 위해 한국전에 참전한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무모한 도전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맥아더는 중국군이 참전하더라도 전쟁의 양상은 크게 바뀌지 않으리라고 판단했다. 그리고는 크리스마스 이전에 한국전을 끝내고자 최후의 대공세로 '크리스마스 공격작전'을 준비했다.

유엔군의 크리스마스 공격작전은 11월 초 한만 국경 폭격으로 시작했다. 2주 동안  미군 폭격기는 북한 대부분 지방을 초토화시켰다. 1950년 11월 8일 한만 국경 신의주 일대는 미 B-29의 대폭격으로 도시 전체가 완전 폐허로 변했다. 맥아더는 이 폭격으로 크리스마스 공격의 사전 정지작업이 완료된 것으로 판단했다. 그리고는 11월 하순, 유엔군 총병력 42만 명에게 크리스마스 총공격을 명령했다.

"적은 재기할 능력이 없으니 압록강까지 진격하라! 크리스마스에는 가족과 재회할 수 있을 것이다."

맥아더의 그늘

1950년 11월 25일부터 유엔군의 크리스마스 총공격이 시작됐다. 당초 자신만만했던 유엔군은 복병 중국군과 벼랑 끝 전술로 나온 인민군의 반격에 몹시 당황했다. 유엔군은 의외의 장소에서 북과 꽹과리를 치며 불쑥불쑥 나타나는 중국군의 원시적이고, 고전적인 공세에 공포감에 질려 혼비백산한 채 제대로 대항하지도 못하고 허둥지둥 퇴각하기 바빴다. 날씨조차도 유엔군 편이 아니었다. 영하 30~40℃를 오르내리는 북부지방의 강추위가 유엔군에게는 또 하나의 무서운 적이었다. 이런 혹한의 악조건 속에서 유엔군은 2주일 동안 약 250킬로미터를 후퇴했다.

한국전쟁 전세는 또다시 대역전이었다. 인민군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후퇴 일로에서 중국군의 참전으로 일대 공세로 전환했다. 인민군에게 중국군의 참전은 천군만마의 원군을 얻은 셈이었다. 이들 공산군은 1950년 11월 말에는 청천강 일대와 장진호에 이르는 동해안 지역까지 진출하였고, 12월 6일에는 평양을 탈환했다.

12월 25일에는 공산군이 38선 이북의 거의 전 지역을 다시 장악해 오만불손하던 맥아더의 코를 아주 납작하게 만들었다. 공산군은 38선에서 잠시 전열을 재정비한 다음, 12월 31일 밤 전 전선에서 다시 38선을 돌파한 뒤 남하했다. 이듬해 1951년 1월 4일에는 서울을 다시 점령했고, 1월 중순에는 37도선 이북 지역을 다시 장악했다. 그러자 맥아더는 원자탄 사용을 강력히 요구하며 대만군의 본토 진격을 기도했다.

워싱턴은 맥아더의 크리스마스 총공격이 참패로 돌아가자 몹시 경악했다.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가장 큰 패배를 당하자 트루먼은 맥아더의 만주 원자탄 폭격이라는 비장의 카드를 빼어들고자 했다. 트루먼은 기자 회견을 통해 한국전쟁에서 원자탄 사용을 적극 고려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이 발표에 전 세계의 여론은 들끓었다. 대부분 나라가 미국의 원자탄 사용 계획을 비난하고 나섰고, 미국 국내에서조차 반대 여론이 높았다. 미국 다음으로 한국전에 많은 지상군을 파견한 영국조차도 미국의 원자탄 사용계획에 반기를 들었다. 미국은 이 문제로 국제사회에서 사면초가에 빠졌다. 마침내 미국은 세계적인 반대 여론과 소련의 핵무기 보유량이 급증하고 있다는 정보에 투르만은 그만 원자탄 사용 카드를 접었다. 

(트루먼) 대통령이 맥아더 장군에게 보내는 해임명령 서한
 (트루먼) 대통령이 맥아더 장군에게 보내는 해임명령 서한
ⓒ 맥아더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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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가 퇴역 기념식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려고 하네다 공항 활주로를 힘차게 걷고 있다(도쿄, 1951. 4. 16.).
 맥아더가 퇴역 기념식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려고 하네다 공항 활주로를 힘차게 걷고 있다(도쿄, 1951. 4. 16.).
ⓒ 맥아더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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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의 불명예스러운 해임

1951년 4월 11일 트루먼 대통령의 맥아더 전격 해임은 미국의 이러한 분위기를 대변했다.

"미합중국 군대의 최고통수권자이며 대통령인 나의 임무가 현재 미군 참모총장이며 미 극동군 사령관이자 유엔군 사령관인 귀관을 대신할 사람을 뽑아야 하는 점이라는 것에 대해 대단히 유감으로 생각하오.

지금 이 시간부터 귀관의 모든 권한을 리지웨이 중장에게 위임하기 바라오. 위의 절차를 진행하기 위한 명령 서한은 귀관이 원하는 곳에 가서 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한 승인이 나 있소. 귀관의 직위해제 사유는 귀관에게 지난번에 보냈던 명령 서한의 내용과 일치되며 이후에 보게 될 별지에도 나와 있오(대통령인 내가 보내는 별지를 참조하기 바라오)." - 번역 ; 찰스 리(재미동포)

트루먼 대통령이 맥아더에게 해임명령서를 보낸 것은 제3차 세계대전으로 퍼질 확전의 기미를 조기에 막고, 국내뿐 아니라 우방국들의 맹렬한 비난을 잠재우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맥아더의 해임은 핵무기로부터 인류의 재앙을 구원한 복음이었으리라.

지금도 국내 일부 극우 세력들은 당시 맥아더의 만주 원자탄 투하 주장은 옳았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일찍이 <손자병법>의 제1장도 모르는 무지 무식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대만군으로 중국본토를 상륙케 한다는 맥아더의 작전은 그야말로 소도 웃을 일이었다. 이는 대만조차도 공산화시키는 매우 어리석은 작전이었으리라. 전쟁은 결코 무기력만으로 이길 수 없다. 월남전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그때 미국이 원자탄을 투하했더라면, 북한 뒤에 있는 소련이 그대로 있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의 원자탄 투하에 맞서 한반도에도 소련제 원자탄이 투하됐을 것이며, 만일 그렇게 됐다면 오늘 우리도 생명을 부지하지도 못했을 뿐더러 아예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만주뿐 아니라 삼천리 강토도 원자탄 피폭 후유증으로 아직까지도 신음하고 있을 테다.

일찍이 손자가 말했다.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 나를 알고 상대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맥아더는 이런 병법의 기본도 모르는, 불명예스럽게 해임된 오만하고 교만한 군인은 아닌가? 이즈음 우리는 나만 알고 상대를 모르는 외눈박이에서 벗어나는 이성적인 자세를 지닐 때 역사에 또 다른 죄를 짓지 않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에 들어간 사진들은 맥아더기념관에 소장된 자료로 박도 기자가 직접 리서치해 온 것입니다.



태그:#맥아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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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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