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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탄광마을에 위치한 초등학교에서 4학년 친구들과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 아침 시간, 수업 틈틈이 짬을 내어 그림책을 읽고 있습니다. 그림책 같이 읽으며 나온, 아이들의 말과 글을 기록합니다. - 기자말

쿠당탕! 교무실에 다녀온 사이 교실이 한바탕 뒤집어졌다. 의자가 쓰러져 있고, 아이들이 J를 둘러싸고 있다. '또 시작이구나.' J는 사춘기다. 호르몬의 변화 탓인지 제어할 수 없는 분노가 그를 감싸고 있다.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폭력성으로 주변 사람들이 약간 긴장한다. 애들은 싸우면서 큰다지만 일상적인 욕설과 격노는 학급 운영을 참으로 힘들게 한다.

어렵게 J를 달래고 어르며, 상황을 수습했다. 뒤늦게 후회하고 반성하는 아이. 그럼에도 이미 그의 말과 주먹에 피해를 입은 친구들은 마음이 풀어지지 않는다. 상담을 하고, 사과를 시키고, 봉사활동을 하고... 벌써 다섯 번째다. J의 분노를 받아내고, 피해자들을 다독이는 일은 매우 감정 소모가 심하다. 오후 4시 학생들을 하교시키고 나니 온몸에 힘이 빠졌다. 지친 몸을 이끌고 내일 창체 시간에 읽어줄 그림책을 고르러 도서관에 간다.

한없이 우울한 손동작으로 제목을 훑어보다가 책 한 권에 시선이 꽂힌다. <친구랑 싸웠어>. 제목이 끌렸다. 망설이지 않고 꺼내 든다. 씩씩! 도끼눈을 한 꼬마가 울고 있다. 눈썹은 위로 뻗치고 입을 삐죽! 콧구멍을 크게 벌렁거리는 모양새로 보아 슬퍼서 우는 게 아니라 억울해서 우는 눈치다. 싸움 직후 불려 온 J랑 닮았다. '허이구~ 휴우~' 한숨이 절로 나온다. 무슨 내용인지 보기나 하기로 했다. 혹시 영웅적인 선생이 이런 애들 막 잘 다루는 거 아니야? 하는 기대감도 있었다.

얘 이름은 '다이'이다. 가장 친한 친구는 '고타'인데, 둘은 날마다 '놀이섬'이라는 교육시설에서 논다. 밀가루로 반죽하고, 속을 채워 만두 빚는 날이었다. 다이와 고타는 대판 싸운다. 다이가 먼저 발로 차고, 주먹으로 때리고, 붙잡고, 달려들었다. 그런데 고타는 힘이 세서 끄떡도 안 한다. 압도적인 기량으로 다이를 더 세게 차고, 때리고, 넘어뜨렸다.

다이는 고타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다이는 고타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 시공주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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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어, 하지 마."
"봐줬다. 이쯤에서 끝내자!"

수세에 몰린 다이가 외치자, 고타는 어깨를 팔 밀치며 놔준다. 엉덩방아를 찧은 다이는 눈물 콧물 흘리며 집으로 뛰어간다.

"선생님 그거 대출하실 거예요?"

여기까지 읽는데 사서 선생님이 나를 불러 세운다. 퇴근 준비 하시나 보다 하고, 바코드를 찍고 도서관을 나왔다. 애들 싸움으로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읽은 탓일까? 아주 재미있었다. 남은 이야기는 내일 아이들하고 같이 넘겨보기로 하고 집에 왔다.

다음 날 교실에서 읽은 뒷이야기는 더 흥미진진했다. 얻어터진 다이가 엄마 품에 안겨 엉엉 운다. 울어도 울어도 자꾸 눈물이 나는데 엄마는 웃기만 한다. 벌컥! 현관문이 열린다. '놀이섬' 아이코 선생님이 아까 만든 만두를 먹으러 가자고 찾아오셨다. '내가 갈 줄 알고? 절대로 안 가. 우리 엄마도 안 갈 거야.' 다이가 눈을 흘기는데 엄마가 아이코 선생님을 따라간다.

'절대로 안 갈 줄 알았는데, 너무해! 너무해! 정말 너무해!'

집 밖에 아이들도 와 있었다. "미안해!" 무리에 끼어 있던 고타가 쩌렁쩌렁 큰 소리로 사과했다.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 사과를 받아 놓고도 다이는 장맛비처럼 주룩주룩 눈물을 흘린다. 아직 분이 안 풀렸다고 으앙 으앙 운다. 당찬 다연이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내지른다.

"다이 완전 소심해. 푸하하하"
"왜? 그럴 수도 있지. 계속 화나는데 사과했겠지."

영균이가 대꾸했다. 옆에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던 지원이는 고타가 쿨하다는 얘기를 반복했다. 같은 장면을 두고도 반응이 제각각이라 관찰하는 즐거움이 있다. 구석에 앉은 J를 슬쩍 보니 입을 꾹 다물고 있다. 분함을 참지 못하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대목이라 뭔가 반응이 있을 거라 예상했는데 의외였다.

한 마디 해주면 다른 친구들이 J 마음도 알고, 서로 이해의 폭이 깊어져 좋을 텐데... 어디까지나 선생 욕심이니 강요하지 않았다. 다이가 아이코 선생님의 간식 제안을 거절할 권리가 있듯 J도 침묵을 지킬 권리가 있다.

사과를 받는 준비가 안 된 다이
 사과를 받는 준비가 안 된 다이
ⓒ 시공주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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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을 등지고 집에 다시 돌아온 다이. 얼마 후 집에 돌아온 엄마가 만두 접시를 건넨다. 고타와 다이가 함께 만든 만두 스무 개였다. 한참 울어서 배가 고팠던 탓일까? 다이는 혼자서 만두 스무 개를 아귀아귀 다 먹었다.

눈물은 벌써 그쳐 있다. 얼굴을 두 쪽 가득 확대해 놔서 쩝쩝거리는 소리와 진한 만두 향이 책장 밖으로 튀어나올 듯하였다. 애들은 다이 콧구멍이 진짜 크다고 놀렸다. 무표정하게 앉아있던 J가 입맛을 다시며, 배를 쓰다듬었다. 지금껏 가장 강한 반응이었다.

"엄마 접시 씻어 줘."

마음이 풀린 다이는 접시를 반납하러 '놀이섬'으로 간다. 이층 창문으로 고타가 보였다. 마당 앞 계단을 올라가는데 가슴이 막 뛰고, 손이 바르르 떨린다. 다이를 본 고타가 아까는 미안했다고 사과했다. 다이는 조금 쑥스러운 듯 헤헤헤 웃었다.

"거봐! 고타가 짱이야."
"다이는 끝까지 지가 먼저 사과 안 하네."
"화해해서 다행이야."

팽팽했던 긴장의 끈이 풀리자 마음이 가벼워졌다. 어쨌든 잘 됐다고 마무리 지으려는데 아뿔싸 뒤에 그림 하나가 더 있었다. 짝눈의 다이가 담담하게 정면을 응시하며 말한다.

"그렇지만, 다음엔 내가 꼭 이길 거다."

역시 다이는 다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쓴 작품답게 어린이 심리 묘사가 탁월하다. 이길 수 없는 상대에게 먼저 시비 걸고 때려놓고, 싸움은 지고 싶지 않은 아이의 특성을 잘 짚었다. 학교 현장에서 다이같은 녀석들을 자주 만난다. 부모나 교사에게 자기 잘못은 쏙 빼놓고 말하거나, 상대방에게 책임을 떠 넘기는 사례가 숱하다. 저자인 시바타 아이코 선생님도 얼마나 고민이 많으셨을까? 세상에 나만 학생지도가 힘든 게 아니구나 하고 위로받았다.

<친구랑 싸웠어!>를 읽은 날, J 옆에서 급식을 먹었다. 그가 좋아하는 양념 닭갈비가 나왔다. 밥에 쓱싹 비벼 맛깔나게 먹는 얼굴에 다이가 겹쳐졌다. J도 겨우 11살 아이구나. 어쩌면 어느 반에나 한 명씩 존재하는 '다이'이겠구나. 나는 지금껏 J를 다그치기만 했지, 다이의 눈물을 멈추게 한 '만두 스무 개'를 주지 못했다.

반찬칸을 말끔히 비운 J가 옆을 쓱 본다. 음식 더 받으러 가고 싶은데, 배식은 끝났고 내 식판엔 닭갈비가 쌓여 있다. 숟가락으로 가득 퍼서 식판에 올려줬다. J가 환하게 웃었다. 그림책에서 한 수 배웠다.



친구랑 싸웠어!

시바타 아이코 지음, 이토 히데오 그림, 이선아 옮김, 시공주니어(2006)


태그:#화해, #싸움, #사과, #그림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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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구하는 가계부, 산지니 2021>, <선생님의 보글보글, 미래의창 2024> 를 썼습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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