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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후반.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문인들이 한국문단에 출현한다. '날것의 언어'를 시어로 사용하는 여성시인들이 바로 그들. 김언희와 최영미, 김선우를 필두로 한 소수의 여성작가들은 '유교숭상' '남성우대'의 풍토가 여전히 남아있던 그 시대에 침을 뱉으며 금기의 단어들을 시 속으로 끌어들였다.

통제된 섹스와 부성(父性)에 대한 전면적 부정. 여성을 억압하는 물적·정신적 구조를 거부하고, 일견 난잡해 보이는 여성시인 성의식의 배후에 왜곡되고 일그러진 세계가 있다는 그네들의 목소리는 문단은 물론, 한국사회에 작지 않은 파문을 일으켰다. 다수의 독자와 문학평론가들이 주목했다.

20세기에 시작된 '기성 질서에 대한 시적 거부권 행사'는 앞서 언급한 여성시인들에게서 보다 젊은 시인들인 주하림과 이혜미 등에게로 이어졌다. 세상과 마찬가지로 남성 위주로 편제돼 있던 문단의 질서에도 일정 부분 변화가 왔다. 이는 여성작가는 물론 남성작가들에게도 긍정적인 차원의 변화였다.

그러나, 위에서 이야기된 시인들 정도를 제외하면 '여성시인의 시적 거부권 행사' 모두가 유의미한 성취를 이뤄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적지 않은 숫자의 여성시인들이 '날것의 언어'를 통해 '부조리한 세상'에 저항하는 노래를 불렀지만, 돌아오는 메아리는 미약했다. 대다수가 '흉내내기'였고, 그게 아니면 '논란을 부르기 위한 논란 유도'에 그쳤던 것.

'아직도' 시를 읽는 사람들을 위한 조그만 선물

기자를 포함한 한국 시 독자들의 실망과 오랜 기다림에 응답하기 위해서일까? 최근 받아든 시집 하나가 눈길을 잡아챈다. 마흔 살에 늦깎이로 등단해 오십에 첫 시집을 상재한 김선향. 시집의 제목부터가 은유적인 도발이다. <여자의 정면>(실천문학사)이라니.

이 시집엔 김언희와 유사한 체취가 배어있다. '섹스'와 '낙태', '계류유산'과 '자위' 등 기존 여성시인의 시집에선 보기 힘들었던 단어가 무시로 시어(詩語)가 된다. 어떤 시는 '끔찍'하기까지 하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쥐도 새도 모르게
아기를 지우고

산부인과 지하식당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설렁탕을 퍼먹었다.
- 위의 책 중 '도둑고양이' 일부 인용.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차가운 금속기구로 뱃속 아기를 긁어낸 후 '남의 살과 뼈'로 끓인 국물을 마신다는 건 인간에게 어떤 의미일까를 돌아보게 하면서도, 스스로는 평정과 평상심을 잃지 않는 담담한, 그래서 더 무시무시한 시다. 이것 외에 이런 시는 또 어떤가?

자정 무렵 AK PLAZA 주차장에서 다섯 손가락을 펴들며
취객과 흥정하는 여고생

반짝반짝 빛나도록 변기를 닦다가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눈물을 훔치는 가사도우미

밤이면 밤마다 장안문 앞 중년나이트에 가서
부킹으로 허기를 때우는 팔등신

남편에게 폭력을 유도해 승소한 뒤
연하의 정부와 살림을 차린 촌뜨기

파키스탄 이주노동자와 위장 결혼을 해주고
오백만 원을 갈취한 뚱보...
- 위의 책 중 '여자들' 일부 인용.

매매춘과 원조교제, 불륜과 사기·협잡을 거듭하는 '부조리한 세계'를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경기도 수원)에서 삶을 영위하는 이웃여자들의 일상을 통해 아무렇지도 않게 까발리는(?) 이런 용기야말로 현실을 숨기지 않고 가감 없이 보여줌으로써 문제의 해결에 이르려는 '시적 거부권 행사'가 아닐까.

따스한 포옹 같은 시집에서 위로를

그러나, 김선향은 '폭로'에서만 멈추지 않는다. 까마득한 선배시인 조태일(1941~1999)이 지적했듯 "시는 추락하는 것의 고통을 슬퍼하는 게 아닌 전망의 노래"라는 걸 알고 있다는 듯, 김 시인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바로 '왜곡되고 일그러진 세상'에 죄 없이 갇힌 여성(여기서 '여성'이란 '인간'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의 오늘을 따스하게 안아주는 것이다. 가없는 모성의 발현이다. 이런 시다.

겨울 정오 무렵
굴다리 옆 기사식당
출입문을 등지고 앉아
검붉은 핏덩이를
묵묵히 삼키는
저 구부정한 등
슬픔은 죄다 등골에 모여 있다
- 위의 책 중 '선짓국 먹는 사람들' 전문 인용.

혼자인 손님이 절대다수인 '기사식당'에서 인간과 세상에는 전혀 관심 없다는 듯 꿀꺽꿀꺽 그저 '살기 위해' 목구멍으로 밥과 국을 밀어 넣는 사람들. 그들의 구부정한 뒷모습을 눈물 섞인 연민으로 바라보는 김선향의 눈동자가 보이는 듯한 이 시는 기자가 <여자의 정면>에서 캐낸 절창이다.

오십에 첫 시집을 상재한 시인 김선향.
 오십에 첫 시집을 상재한 시인 김선향.
ⓒ 실천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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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여자의 정면'이라고 차갑고 딱딱하게 이야기한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김선향의 첫 시집에선 '인간의 배후'를 따스하게 포옹하는 시인의 선한 마음이 어렵지 않게 읽힌다. 바로 이 대목이 김선향을 '날것의 언어'로 '기성 질서에 대한 시적 거부권 행사'를 성공적으로 이뤄낸 여성시인의 하나로 인정하게 한다.


여자의 정면

김선향 지음, 실천문학사(2016)


태그:#김선향, #여자의 정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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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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