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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북천전적지 전경. 왼쪽 가장 높은 곳에 사당(전시관, 재실, 비각 포함)이 있고, 가운데에 전적비(사진의 흰색 조형물)가 있으며, 그 아래에 침천정이 있다. 사진의 오른쪽에 보이는 큰 건물은 상산관으로 조선 시대에 중앙 관리들이 왔을 때 묵었던 객사 건물이다.
 상주 북천전적지 전경. 왼쪽 가장 높은 곳에 사당(전시관, 재실, 비각 포함)이 있고, 가운데에 전적비(사진의 흰색 조형물)가 있으며, 그 아래에 침천정이 있다. 사진의 오른쪽에 보이는 큰 건물은 상산관으로 조선 시대에 중앙 관리들이 왔을 때 묵었던 객사 건물이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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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시청 누리집에는 상주에 있던 경상감영이 대구로 옮겨가게 된 데 대한 안타까움이 짙게 토로되어 있다.

'조선 초기부터 중기까지 201년간 상주에 설치되었던 경상감영이 임진왜란 7년을 통해 여러 차례 옮겨지는 수난을 당한 것은 1592년 4월 북상하는 왜군을 상주에서 맞닥뜨린 이일(李鎰)의 관군이 북천(北川)에서 대패하여 상주성이 함락되고 신립(申砬)마저 충주에서 전사하여 서울에서 남쪽으로의 교통이 마비되어 제 기능을 할 수 없었기 때문으로, 상주감영은 대구감영이 정착되어 한말(韓末, 1894년)까지 존속하면서 그 지위를 잃었다.'

북천 패전은 그만큼 나라 전체는 물론 경상도 일원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따라서 '상주 임란 북천 전적지(尙州 壬亂北川戰跡地)'는 경상북도 기념물 77호로 지정되어 있다. 문화재청 누리집도 이 문화재에 대해 '임진왜란(1592) 때 조선 중앙군과 왜병의 선봉 주력 부대가 최초로 싸운 장소로, 800여 명이 순국한 호국 성지'라고 소개한다.

북천 패배 이후 상주는 경상도의 중심지 자격 잃어

문화재청은 이어서 '선조 25년(1592) 일본군 주력 부대인 소서행장(小西行長)이 이끄는 1만7,000명이 조총으로 무장하고 침공해 왔다. 이에 싸움도 하기 전에 순변사 이일은 성을 버리고 도주하였지만, 상주 판관 권길과 호장 박걸, 종사관인 윤섬, 이경류, 박호 등의 경군과 사근도 찰방 김종무, 의병장 김준신 등은 800여 사병과 함께 죽기로 맹세하고 역전분투하였으나 호국의 영령으로 산화되었다.'라고 해설한다.

그래서 선조는 상주 전역에 복호(復戶, 부역의 면제)를 내렸다. 덕분에 상주는 임진왜란 때의 치열한 분투를 인정받아 임금으로부터 지역 전체가 은혜를 입는 유일한 지방이 되었다. 당연히 상주는 상산관, 태평루 등 산재한 문화재를 옮겨오는 등 북천 전투지를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조성'하였다. 또 상주임란북천전적지 내의 충렬사에 이곳 전투에서 전사한 종사관 윤섬, 박호, 이경류 3충신과, 의병장 김준신, 김일의 2의사와 상주판관 권길, 호장 박걸, 사근도찰방 김종무, 순국 무명 열사의 9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사당 충렬사, 전적지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물론 정문에서 가장 먼 곳이기도 하다.
 사당 충렬사, 전적지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물론 정문에서 가장 먼 곳이기도 하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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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북천전적지를 답사하려면 사전에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이곳에서 벌어진 전투에 대해 먼저 알아보아야 한다. 북천전투의 의의와 내용에 대한 학습 없이 답사하면 깔끔한 공원을 둘러본 것과 다를 바 없는 하루를 보내게 된다. 물론 이 전투의 주장이었던 이일과, 순절한 수많은 선열들의 삶을 살펴보는 것도 필수적인 교육 과정이다.

명장 이일을 상주로 보내 일본군 막아보려 했지만

임진왜란 당시, 이일(李鎰, 1538∼1601)은 조정이 인정하는 장수였다. <선조수정실록> 1591년 10월 1일자에는 '유성룡이 노련한 장수(宿將) 이일을 경상병사로 보내려 했으나 홍여순이 명장을 외지로 내보낼 수 없다(名將不可出外)고 반대하여 실현되지 못했다.'라는 요지의 기사가 실려 있다.

<선조실록> 1592년 4월 17일자 기록도 비슷한 추정을 가능하게 해준다. 실록은 '변보(邊報, 지방 소식)가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이일을  순변사(巡邊使, 변방 관리 특사)로 삼아 상주에 가서 적을 막도록 했다.'라고 증언하고 있다. 부산 등지를 단숨에 짓밟은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북상 중이라는 급보를 들은 선조와 조정 대신들이 선택한 첫 번째 장수, 그가 바로 이일이었던 것이다.

같은 날 실록에는 신립(申砬, 1546∼1592)을 삼도 순변사(三道巡邊使)에 제수한 선조가 '이일 이하 누구든지 명을 듣지 않는 자는 경이 모두 처단하라.'면서 '직접 보검을 하사했다.'라는 기사도 실려 있다. 이 기사는 이일이 신립에 이어 두 번째 고위 장군이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이일이 지휘한 조선 중앙군은 북천 전투에서 '싸움에 패해 종사관 박호, 윤섬 등은 모두 전사하고 이일만 혼자 달아나 죽음을 면한다(單騎走免).'

사당 외삼문에서 바라본 북천
 사당 외삼문에서 바라본 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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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전투의 경과에 대해서는 1592년 4월 17일자 <선조실록>보다 같은 해 4월 14일자 <선조수정실록>에 더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수정실록은 '왜적이 상주에 침입했는데 이일의 군대가 패주하였다.'라는 결과부터 말한 다음 '경상감사 김수는 적변(賊變, 적의 침입)을 듣고 곧바로 제승방략(制勝方略)에 의거 (중략) 여러 고을에 (4월 15일) 공문을 보내어 각각 소속 군사를 거느리고 약속된 지역으로 모이게 했다.'라고 초기 대응 전략을 설명해준다. 제승방략은 각 지역별로 주둔하고 있는 군대를 한 곳에 모이게 한 다음 중앙정부에서 내려간 대장이 총지휘하는 조선군의 기본 전략이다.

감사의 총동원령이 4월 16일 떨어지자 지금의 경북 일원 수령들은 군사들을 이끌고 지시된 곳, 즉 대구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구 금호 강변 들판에서 노숙하던 '조령 밑의 문경 이하 수령들은 (중략) 전혀 통제가 되지 않는 채로 (중앙정부에서 내려보낸) 순변사가 오기만 기다'리던 중 순변사가 언제 도착한다는 소식은 없고 '적의 대군이 가까이 밀려온다는 소문이 (4월 20일) 먼저 들려오면서 군사들이 달아나버리는 바람에 군대를 저절로 잃어버렸다.'

그런데 이일이 늦게 당도한 데에는 까닭이 있었다. 이일은 임금으로부터 순변사 임명장만 수령했을 뿐 휘하에 군사들을 배치받지는 못하였다. 아무리 맹장 세평을 얻은 이일이라 해도 부하 장수와 병사들도 없이 전투를 치르러 나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달랑 60명을 데리고 한양 떠나 상주로 가는 이일

이일은 한양에서 이틀 동안 어떻게든 군대를 조직하려 갖은 애를 다 썼다. 그러나 일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그는 60명에 지나지 않는 장졸만을  데리고 한양을 떠나 4월 23일 상주에 도착했다. 그때는 이미 대구가 21일 점령당했고, 제승방략 전략에 따라 금호강변에 모였던 경상도 일원 군대도 산산조각으로 흩어진 이후였다.

사당과 침천정 중간 지점에는 북천을 바라보며 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사당과 침천정 중간 지점에는 북천을 바라보며 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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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이일이 조령을 넘어 문경에 들어왔을 때 이미 고을은 사람 하나 없이 텅 빈 상태였다. 이일은 창고의 곡식을 내어 군사들을 먹이고 상주에 다달았다. 하지만 상주목사는 순변사를 마중나간다는 핑계를 대고 산골짜기에 숨어버리고 없었다.'

이일은 '판관 권길(權吉)에게 군사들을 모아오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그가 한 사람도 얻어오지 못하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이일은 권길을) 처형하려 했다.' 권길은 조금 더 시간을 주면 군사를 모을 수 있다고 이일에게 말한 뒤 '밤새도록 촌락 사이를 수색하여 수백 명을 얻었는데 모두 농민이었다.'

농사 짓던 백성 1천 명으로 2만 가까운 왜군을 상대

이일도 '창고의 곡식을 내어 흩어진 백성들을 유인해 수백 명을 얻어 창졸간에 대오를 편성했다.' 인근 함창현에 머무르고 있던 일부 군사도 합류했고, 사근도 찰방 김종무가 자신의 고향으로 이끌고 온 역마와 역졸 등도 합류했다. 4월 25일에는 조방장 변기가 청주에서 군사들을 데리고 밤을 새워 달려왔다. 하지만 아군은 1천 명을 헤아리지 못했고, '적은 이미 선산에 이르렀다.'

저물녘에 (지금의 김천) 개령 사람이 달려와 '적들이 상주 가까이까지 왔다.'라고 알렸다. 이일은 사람들을 미혹시킨다는 이유로 그를 처형했다. 실제로 왜적들이 '상주 남쪽 20리  냇가에 주둔하고 있었는데도' 이일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채 정보 제공 백성을 죽였다.

재실(왼쪽), 비각, 전시관(오른쪽), 내삼문과 사당의 지붕이 보이는 풍경
 재실(왼쪽), 비각, 전시관(오른쪽), 내삼문과 사당의 지붕이 보이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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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에 어두워 빚어진 이같은 사례는 이순신의 1597년 8월 25일자 <난중일기>에도 나온다. 이때 이순신은 어란포(전남 해남군 송지면)에 머물고 있었다. 마침 보자기 두 명이 남의 소를 훔쳐 달아나면서 "적들이 쳐들어온다! 적들이 쳐들어온다!" 하고 소리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순신은 보자기 두 명을 붙잡아 목을 베었다. 바다에 들어가 해물을 채취하는 것이 직업인 두 보자기는 실제로 왜군이 오는 것을 보고 수군 진영에 그 사실을 알렸지만 헛소문을 내어 아군의 사기를 떨어뜨린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했다. 다음날 왜군들은 정말로 어란포 바로 옆 이진까지 당도했다.

정보에 어두웠던 이일, 왜군의 접근 알지 못했다

개령 농민을 처형할 즈음 이일은 군사들을 이끌고 북천 변에 머물러 있었다. 군사들을 훈련하기 위해서였다. 대부분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농민이었으므로 훈련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말 그대로 오합지졸 신세를 벗어나지 못할 군사들이었던 까닭이다.

그때 성주 읍내 여기저기서 불길이 치솟았다. 이일은 담력과 용맹으로 이름난 군관 박정호(朴挺豪)를 시켜 알아보도록 했다. 박정호가 몇 명 군사들을 데리고 북천 다리를 건너려 했다. 그 순간, 진작부터 다리 아래에 잠복한 채 기다리고 있던 일본군들이 조총을 무차별로 난사했다. 박정호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왜군들이 쫓아와 박정호의 머리를 베어 들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이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던 조선군을 사기가 땅에 떨어졌다.

판관 권길 등은 이일에게 빨리 읍성 안으로 들어가 수성전(守城戰)을 하자고 건의했다. 군사의 수, 무기의 수준, 전투 준비 상태, 정예군과 농민군의 차이 등등 그 어느 측면에서도 평지 전면전을 벌일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일은 참모들의 의견을 묵살했다. (우인수의 논문 '상주 북천전투의 성격과 그 의미'에 따르면 뒷날 어떤 학자는 심지어 '이일은 패전할 것을 염두에 두고 전황이 불리할 때 도망치기 수월하도록 고의적으로 북천변을 싸움터로 택하였다.'라고 평가했다.)

북천전적지에는 의사들을 기리는 비석이 세 곳이나 있다. 사당 외삼문 아래, 사당에서 상산관 뒤편으로 이어지는 길의 중간 지점(위 사진), 그리고 태평루 앞이다.
 북천전적지에는 의사들을 기리는 비석이 세 곳이나 있다. 사당 외삼문 아래, 사당에서 상산관 뒤편으로 이어지는 길의 중간 지점(위 사진), 그리고 태평루 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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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일본군의 대대적인 공세가 시작되었다. 소서행장(고니시 유키나가)의 7천 본진이 좌우로 나뉘어 정면에서 달려들었고, 종지의(宗義智, 소 요시토시)가 5천 장졸을 이끌고 뒷면을 공격해 왔다. 그 외에도 송포진신(松浦鎭信, 마츠라 시게노부), 유마청신(有馬晴信, 아리마 하루노부), 대촌희전(大村喜前, 오무라 요시아키), 오도순현(五島純玄, 고토 스미하루) 등의 6700여 적군들이 사방을 에워쌌다.

일본군이 조총 사격을 시작하자 이내 아군은 한꺼번에 10여 명씩 쓰러졌다. 전투 능력도 없는 농민군 출신이 대부분인데다가, 무기도 변변하지 않았고, 조련도 되지 않았으며, 기습까지 당한 처지인 탓에 아군은 애당초 대적 상대도 되지 못했다.

이일이 고함을 지르며 궁수들에게 활을 쏘게 했지만 겁에 질린 병사들은 제대로 시위를 당기지 못했다. 화살을 적들에게까지 날아가지도 못한 채 중도에서 툭, 툭 떨어졌다. 금세 적들은 아군 진영 한복판까지 밀려 왔다. 전국 시대 100년 동안 날마다 칼부림을 하며 통일 전쟁을 치러온 적들의 백병전 능력을 놀라웠다. 무기를 처음 잡아본 상당수 조선군들은 그들의 한 번 칼놀림에 풀잎처럼 목숨을 빼앗겼다.

가장 먼저 달아나는 대장 이일과 조방장 변기

대장 이일과 조방장 변기가 가장 먼저 달아났다. 상주판관(지금의 부시장) 권길은 이일이 버리고 간 대장기 아래에서 끝까지 싸웠다. 그는 전투 개시 이전에 이미 옷에 피로 이름을 새겨둔 바였다. 주위 군사들이 '어찌 혈서로 존함을 쓰십니까?' 하고 물었을 때 권길은 '이것이 내 시신을 찾는 증표가 될 것이다.' 하고 대답했었다. 그래도 가족들은 끝내 그의 시신을 찾지 못했고, 결국은 붉은 이름이 남은 옷자락만 주워 그것으로 장례를 지냈다. 

장수 김준신은 일본군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아군의 목숨을 유린하자 의분을 참지 못한 채 혼자 말을 달려 적진 가운데로 뛰어들어 싸우다가 마침내 순절했다. 이날 김준신의 분전으로 말미암아 많은 군사들이 살상당했다고 여긴 적들은 뒷날 그의 일가를 찾아 보복을 자행했다. 남자들은 맞서다 죽었고, 부녀자들은 강물로 뛰어들어 스스로 생애를 버렸다.

상산관과 사당 사이에 있는 침천정은 1577년(선조 10) 정곤수가 상주목사로 있을 때 읍성 남문 앞에 건립했다. 본래 이름은 연당(蓮堂)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탔고, 1612년(광해 4) 중건되었다. 1914년 일제의 의해 읍성이 헐릴 때 함께 사라질 위기에 몰렸으나 지역 유지들이 사비를 들여 구입, 현재 위치로 옮겼다. 그때부터 이름도 침천정으로 바뀌었다.
 상산관과 사당 사이에 있는 침천정은 1577년(선조 10) 정곤수가 상주목사로 있을 때 읍성 남문 앞에 건립했다. 본래 이름은 연당(蓮堂)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탔고, 1612년(광해 4) 중건되었다. 1914년 일제의 의해 읍성이 헐릴 때 함께 사라질 위기에 몰렸으나 지역 유지들이 사비를 들여 구입, 현재 위치로 옮겼다. 그때부터 이름도 침천정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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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장 박걸은 판관 권길을 도와 의병을 모집하러 다녔던 사람이다. 그는 권길이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에도 옆을 지키고 있었는데, 주위에서 지금이라도 피신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박걸은 "판관께서 나라를 버리지 않고 죽음을 선택하셨는데 어찌 내가 혼자 구차한 삶을 도모할 수 있단 말인가!" 하며 분연히 떨쳐 일어나 적들에 맞서다가 이윽고 죽음을 맞이했다.

류성룡의 매부인 김종무도 이날 죽었다. 그는 (경남 함양) 사근도 찰방(종6품)이었는데 고향 상주가 적들의 침탈 위기에 놓였다는 소식을 수백 리를 달려와 참전했다가 장렬히 순절했다.  

그는 먼 길을 달려 북천까지 달려왔지만, 그러나 애당초 이길 수 있는 전투가 아니었다. 그것을 모르고 온 것도 아니었다. 이윽고 죽음의 순간을 눈앞에 둔 김종무는 지니고 있던 부채를 종 한룡에게 주면서 "이것을 집에 전해다오." 하고 당부하였다.

하지만 한룡은 전장을 떠날 수 없었다. 주인이 호통을 쳤지만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주인을 지키고자 했다. 한룡은 말고삐를 잡은 채 주인과 함께 적의 칼을 맞고 죽었다. 이날 김종무의 재종질(육촌 형제의 아들) 김겸도 함께 전사했다. (김종무에 대해서는 <천길 낭떠러지 사이로 난 길, 심장이 '쫄깃'> 기사 참조)

김종무, 한룡, 윤섬, 박호... 모두들 비극적 순절

순변사 이일의 종사관으로 상주까지 내려와 북천전투에 참전했던 윤섬도 이날 적진에서 죽었다. 그는 본래 종사관이 아니었다. 이일이 처음 종사관으로 선임한 이는 윤섬의 친구였다. 홍문관 교리(정5품)였던 윤섬은 이일을 찾아가 "친구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있는데 다른 형제도 없습니다. 외아들이 전쟁터에 뽑혀 간다고 하니 홀어머니께서 침식을 잊고 밤낮으로 울고 계십니다." 하면서 "제가 친구를 대신해 종사관으로 가겠습니다." 하고 자청했다.

이일이 허락했지만, 이번에는 윤섬의 어머니가 "왜 스스로 죽을 땅에 가느냐?" 하고 말렸다. 윤섬은 바닥에 엎드려 절하며 "(왜적들이 쳐들어 왔으니) 부모의 은혜와 나라에 대한 의리를 모두 온전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이제 나라가 위급한 때를 당했으니 사사로운 정을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일이 도망 직전 윤섬에게 "헛되이 죽느니 뒷날의 쓰일 데를 생각하는 것이 현명하리." 하며 함께 가자고 권했다. 윤섬은 "장차 무슨 낯으로 임금을 뵙겠소? 남아가 오늘 같은 지경에 처했으니 나라를 위해 죽음으로 충성할 뿐이오." 하며 거절했다.

경상감사 김수의 사위는 자살. 그를 데리고 온 순변사는 도망

홍문관 부수찬(종6품)으로 윤섬과 함께 일했던 박호도 북천전투에 참전했다. 과거에 장원급제한 박호는 경상감사 김수의 사위였는데 당시 26세로 윤섬보다 여섯 살 아래였다. 박호는 이일이 종사관으로 데려 가겠다고 조정에 강력히 요청한 결과 북천전투에 참전했다.

이일은 박호를 데리고 가면 그의 장인인 경상감사 김수가 전쟁 수행에 적극 협조해 주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전투는 대패로 끝났고, 박호는 적들에게 쫓겨 깊은 산골짜기까지 들어갔다. 그때 옆에 함창사람 이언룡이 있었다. 박호가 이언룡을 보며 "나는 순변사의 종사관으로, 전쟁터로 나올 때 임금께서 내리는 술을 받는 은혜를 입었소. 그런데 이렇게 전쟁에서 패망했으니 무슨 면목으로 임금을 다시 뵙겠소, 그대는 내가 죽거든 이 칼을 꼭 나의 집에 전해주고, 내 시신은 적삼으로 싸서 이곳에 두시기 바라오." 하고는 칼로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조방장 변기의 종사관으로 전투에 참전했던 이경류도 이날 상주판관 권길과 같은 자리에서 순절했다. 이경류가 전사한 후 그가 타던 말이 주인의 피 묻은 옷과 유서를 물고 상주에서 (성남시 분당구) 수내동까지 500리를 달려와 주인의 죽음을 전했다.

죽은 주인의 옷과 유서를 500리 떨어진 집에 전해준 말

역관 경응순은 이날 포로가 되었다가 풍신수길의 편지와 공문 한 통을 조선 조정에 전하는 임무를 띠고 풀려났다. 조선 조정은 일본군의 진격 속도를 늦추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소서행장의 요청을 받아들여 이덕형을 회담차 충주로 내려보냈다. 경응순은 회담이 열리기 전에 이미 충주가 함락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일본군에 접근하다가 가등청정(加藤淸正,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에 잡혀 살해당했다.

경응순의 이야기는 <선조실록> 1592년 4월 17일자에 실려 있다. 실록은 '적이 상주에 이르러 통사(通事) 경응순 편으로 편지를  보내어 (조선이 우리에게 명으로 가는 길을 빌려주면 전쟁을 할 까닭이 없다는 취지의 말로) 화친을 청했다.'면서 '상(上, 임금)이 이덕형을 보내어 침범한 이유를 물으려 했는데 덕형이 용인에 이르렀을 때 적이 벌써 재(문경 새재)를 넘은 까닭에 가지 못하고 되돌아왔다.'라고 전한다.

경응순은 <선조실록> 1592년 8월 27일자에도 등장한다. 경상도 관찰사 한효순이 선조에게 '(일본이) 화친을 청하는 서신을 방어사 김응서에게 보내 왔습니다.'하면서 보고서를 띄웠는데, 한효순의 치계에는 일본이 '상주에서 전투가 있었을 때 통역관 경응순을 사로잡아 강화하자는 보고를 드리라고 했는데 끝내 (우리는) 그 회답도 받지 못했고 대왕께서 서울을 피하여 평양으로 가셨습니다.' 하는 표현이 들어 있다.

이는 <선조수정실록> 1592년 4월 14일자에도 실려 있다. 수정실록에는 '동지중추부사 이덕형을 왜군에 사신으로 보냈다. 상주 패전 때 왜역관(倭譯官) 경응순이 포로로 잡혔는데, 소서행장이 풍신수길의 편지와 예조에 보내는 공문을 경응순에게 주어 내보내면서 말하기를 "(우리 일본군이) 동래에 있을 때에 울산군수(이언함)를 생포하여 서계를 보냈는데 지금까지 회보가 없다. 조선이 강화할 의사가 있으면 이덕형을 보내어 4월 28일 충주에서 나(소서행장)와 만나자."라고 했다.' 등의 기사가 실려 있다.

북천 전투 대패의 세 가지 이유

그렇게 상주 북천 전투는 끝이 났다. 비록 숫자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중앙군이 최초로 일본군과 맞붙은 싸움에서 조선은 처참하게 무너졌다. <임진전란사>의 이형석은 북천 전투를 두고 일단 '몇 백 명의 농민들을 모아놓고 근 2만 명의 적의 진격로를 가로막는다는 사실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적의 정세라도 먼저 알고 보보저항(步步抵抗, 차근차근 저항)할 준비라도 했어야 마땅한데 전연 적정 탐지에는 뜻을 두지 않고 다만 군사 조련을 하고 있었고, 더구나 상주읍성을 이용하지 못한 것은 가석(可惜, 슬픔)하기만 하다.'라는 총평을 내린다.

상주 북천전적지 내에 있는 상산관(유형문화재 157호). 1328년(충숙왕 15) 중수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지어진 건물로 보인다. 임진왜란 때 불탔고 1606년(선조 39) 재건되었으며 1991년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매월 초하루와 보름이면 망궈례를 지냈던 곳이자, 중앙 관료들이 내려오면 묵던 객사였다.
 상주 북천전적지 내에 있는 상산관(유형문화재 157호). 1328년(충숙왕 15) 중수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지어진 건물로 보인다. 임진왜란 때 불탔고 1606년(선조 39) 재건되었으며 1991년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매월 초하루와 보름이면 망궈례를 지냈던 곳이자, 중앙 관료들이 내려오면 묵던 객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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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인수는 논문 '상주 북천 전투의 성격과 그 의미'에서 북천 전투의 패전 원인을 크게 세 가지로 요약했다. 우인수는 '일본군의 빠른 북상으로 인해 제승방략의 장점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채 약점이 크게 노출된 점'을 첫째 패인으로 들었다.

그는 둘째 원인으로 '군사의 규모 면에서 압도적인 열세였다'는 점을 들었다. 하지만 '북전 전투의 경우 조선군이 팔구백 정도에 불과하였던 데 비해 일본군은 그 20배가 넘는 1만8천에 달했던 것'이라면서도 그는 '이 정도 병력의 차이로는 어떤 장군이 지휘를 맡아 어떤 식으로 싸우든지 승산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버티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벌어 뒤쪽 부대의 대비 태세를 갖추는 데는 일정한 기여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성내 농성전을 하지 않은 점을 아쉽게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 것'이라고 부연 설명했다.

셋째 패인을 그는 '가장 뼈아픈' 원인으로 지목했다. '지휘관이 경계에 실패'하여 '진법 훈련 중에 기습을 당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하였다, 더구나 하루 전날 일본군의 근접 소식을 전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언비어로 간주하고 말았'으니 필연적으로 대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진단을 내렸다.   

전적지 둘러보기 전에 북전 전투에 대해 충분히 학습해야

이제 북천 전투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고 자부한다. 북천전적지를 뜻깊게 둘러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고 정문의 '壬亂北川戰跡地(임란북천전적지)' 현판 아래를 통과한다. 물론 그 전에 정문 오른쪽에 세워져 있는 '임란북천전적지 안내도'는 먼저 보았다.

정문에서 가장 먼 사당에 ①번이 매겨져 있고, 그 뒤로 ②내삼문, ③전시관, ④비각, ⑤재실, ⑥외삼문, ⑦전적비, ⑧침천정, ⑨상산관, ⑩순국비, ⑪태평루, ⑫관리사무실, ⑬화장실, ⑭정문 식이다. 볼 것이 많아 흡족하다. 다만 안내도의 번호는 답사 순서를 말해주는 것은 아닌 듯 여겨져 새로 순서를 정한 다음 출발한다. (원고가 너무 길어 나누어 싣습니다.)


태그:#북천전적지, #이일, #침천정, #임진왜란, #상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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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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