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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경윤 선생을 모시는 구천서원 표지석과 외삼문
 허경윤 선생을 모시는 구천서원 표지석과 외삼문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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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암(竹巖) 허경윤(許景胤, 1572~1646)을 모시는 경상남도 김해시 구천서원에 닿으면, 작은 강아지 한 마리가 부리나케 달려 나와 손님을 맞이한다. 삽살개인가? 허경윤의 한시 '산거(山居)'를 아는 나그네는 문득 그런 짐작에 빠져든다. 하지만 천연기념물 368호, 귀신과 액운(살)을 쫓는(삽) 삽살개를 본 적이 없는 나그네는 그렇게 짐작만 해볼 뿐 눈앞의 강아지가 삽살개인지는 알지 못한다.   

柴扉尨亂吠 사립문의 삽살개 요란스레 짖는다
窓外白雲迷 창밖에 흰 구름 떠도는 것 보고...
石徑人誰至 돌길 이어진 여기 누가 찾아오리
春林鳥自啼 봄 숲에는 새들만 지저귀는데...

허경윤의 이 한시는 깊은 산속에서 생활하는 선비의 일상을 노래하고 있다. 시적 자아(詩的 自我)인 선비는, 피상적으로 이해하면, 지금 너무나 한가하여 외로움을 느끼는 지경이다. 돌길이 집까지 이어졌다고 했으니 그에게는 정치적 권력도 없고 경제적으로도 빈한하다. 그 탓에 선비는 이렇듯 적막한 산중에서 지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구천서원의 강당
 구천서원의 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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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렇게 이 시를 받아들였다면 문학적 수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때문이라 할 만하다. 선비는 감정이입(感情移入)을 토로하기 위해 삽살개와 새를 끌어들인 것이 아니다. 시적 자아는 그저 삽살개와 새들조차도 한가함에 겨운 나머지 흰구름을 보며 반가워 짖고, 까닭도 없이 숲에서 봄을 지저귀는 이곳이야말로 '별유천지 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을 따름이다.

벼슬하지 않고 덕을 닦던 선비, 외적 침입에는 분연히 궐기

실제로 죽암은 선조가 직접 주관한 과거에 합격했지만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고, 정승 이원익이 여러 차례 관직을 제시했을 때에도 응하지 않았다. 돌길이 끝나는 지점에 자리잡고 있는 그의 산속 집은 세상의 번잡함과 권력 다툼에서 벗어난 자연 그 자체였던 것이다.

스승 조식이 평생에 걸쳐 단 한 번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던 것처럼, 허경윤은 학문을 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에만 생애를 바쳤다. 하지만 나라의 운명에 대해서는 끝없는 걱정을 했고, 또한 온몸을 던져 신념을 지키는 언행일치의 삶을 보여주었다.

수로왕릉
 수로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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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해정(문화재청 누리집)

산해정은 조선 시대의 거유 남명 조식 선생께서 30년간 강학하던 곳으로 선조 21년(1539) 향인들의 청에 의해 김해부사 양사준이 정자의 동쪽에 서원으로 착공했으나 왜란으로 중지된 것을 광해군 원년(1609)에 안희, 허경윤에 의해 준공되어 신산서원이라고 사액되었다.

그후 대원군의 훼철영으로 철거되었다가 순조 20년(1820) 송윤중 등이 다시 중건한 것으로써 사당 영역이 없이 강학 공간만으로 이루어진 서원 형식을 가지고 있다. (중략) 강학을 하던 명륜당은 2004년 7월부터 2005년 3월까지 해제 보수 작업을 했다. 경상남도 김해시 대동로269번안길 115 소재.

'영남 3대 의병장'으로 일컬어지는 정인홍, 김면, 곽재우가 모두 조식(曺植, 1501~1572)의 제자인데서 짐작되듯이, 남명 조식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킨 경상도 일원 주요 선비들의 한결같은 스승이었다.

죽암 허경윤 역시 조식의 제자였다. 죽암이 임진왜란이 끝난 뒤 전란 중 불타버린 산해정(山海亭, 조식이 제자들을 기른 강학 장소,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125호)을 재건하는 일에 앞장선 것도 참된 제자다운 올바른 행동이었다.

죽암은 전란 초에도 남명의 제자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임진왜란 발발 당시 스무 살이었던 그는 어머니를 모시고 함양에 피란 가 있었다. 그런데 산과 들을 돌아다니며 나물을 캐고 열매를 주워 노모를 봉양하고 있던 그에게 왜적이 수로왕릉을 도굴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김해 허씨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져 있던 죽암은 비분강개했다.

수로왕릉과 수로왕비릉을 파헤친 왜적들

4월 14일 부산진성, 4월 15일 동래성을 무너뜨린 일본군은 17일 김해로 밀려왔다. 지금은 김해시 동상동 181번지 일대에 북문과 옹성(甕城, 성문 앞을 둥글게 에워싸고 있는 성벽)을 중심으로 20여 m의 성벽만 복원되어 있지만, 김해읍성은 본래 전체 길이가 1950m, 동문 해동문(海東門), 서문 해서문(海西門), 남문 진남문(鎭南門), 북문 공진문(拱辰門)으로 구성된 그럴 듯한 평지성(平地城)이었다. 그러나 약 1만 3천여 명이나 되는 일본군 3군을 일개 읍성의 힘으로는 도저히 물리칠 수 없었다.

일부 복원되어 있는 김해읍성
 일부 복원되어 있는 김해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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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군 장수들이 도망쳐 버린 김해읍성을 사수하던 송빈, 이대형, 김득기, 유식 등 수백 명의 의병들은 20일 모두 전몰했다. 김해는 왜적들의 수중에 떨어졌다. 그 결과 '김해의 상징'인 수로왕 부부의 능이 도굴되는 비극이 벌어졌다. 이 소식을 스무 살 허경윤이 들었다. 그는 어머니 앞에 엎드려 절한 후 죽음을 같이할 장정들을 모았다.

100여 명 장정을 급히 조직한 허경윤은 바로 수로왕릉으로 달려갔다. 그저 헛소문일 뿐 수로왕릉이 무사하기만을 간절히 빌었지만, 왕릉과 왕비릉은 처참하게 파헤쳐져 있었다. 그는 적들의 감시를  피할 수 있는 한밤을 이용, 장정들과 함께 능의 봉분을 다시 본래 모습대로 회복했다. 다시 살아난 왕릉과 왕비릉은 김해 사람들의 마음에 큰 용기와 위안을 주었다.

죽암 묘소 왼쪽 앞에 세워져 있는 '죽암 허선생 묘갈명' 비.
 죽암 묘소 왼쪽 앞에 세워져 있는 '죽암 허선생 묘갈명'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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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날 이 사실을 알게 된 조정은 죽암에게 벼슬을 내렸다. 하지만 죽암은 관직을 사양했다. 다만 그는 조정에 글을 올려 '병화(兵火, 임진왜란)로 왕과 왕후의 능이 모두 왜병에 의해 파헤쳐졌습니다, 구슬들은 여기저기 흩어졌고, 금으로 만든 주발 또한 자취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숱한 은제품들도 먼지처럼 날아갔고, 옥으로 만든 기러기 역시 행방이 묘연했습니다, 이마에 땀이 흥건히 흐를 지경으로 처참했던 그 광경은 차마 다 말로 나타내기가 민망합니다' 하면서 수로왕 부부의 능을 정성껏 복원해 줄 것을 청원했다.

죽암은 나이 예순을 넘은 1636년(인조 14년)에 또 다시 전쟁을 치렀다. 조선은 20만 대군을 휘몰아 쳐들어온 청나라 대군을 감당하지 못했고,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란했다. 임금이 외적에게 에워싸여 생사의 경계를 오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눈물을 쏟으며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마땅히 죽어야 한다, 내가 어찌 살기를 바라겠느냐!" 하고는 전답을 모두 처분했다. 그는 전재산을 팔아 수백 석의 군량미를 모으고, 의병을 모집했다.

하지만 병자호란 당시 죽암은 이미 연로했으므로 어쩔 수 없이 아들과 조카를 불렀다. 그는 아들 빈(瀕)과 종질 연(演)에게 "의병을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가라!" 하고 말했다. 길을 떠난 아들에게 인편으로 편지를 보내 "효도는 충성이 있는 곳에 함께 있는 법이다, 늙은 아비를 염려하지 말고 길을 재촉하여 하루 빨리 남한산성의 위급을 구하라!"면서 격려도 했다. 그러나 그가 보낸 의병들이 문경새재에 이르렀을 무렵 조정은 벌써 청에 굴복하고 말았다.

허경윤은 평생 고독을 느낀 적 없는 선비

아들과 조카가 굴욕으로 가득찬 소식을 들고 김해로 돌아왔다. 죽암은 울기를 거듭하다가 마침내 산으로 들어갔다. 그는 봉황대 남쪽 아래에 오두막집을 짓고 매화와 대나무를 심었다. 그 날 이후 그는 스스로를 '죽암(竹巖)'이라 불렀다. 절개를 굽힐 수 없다는 결의의 표시였다. 그 후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고, 3년여 뒤 산속에서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이제 드디어 '사립문의 삽살개 요란스레 짖는다 / 창밖에 흰 구름 떠도는 것 보고... / 돌길 이어진 여기 누가 찾아오리 / 봄 숲에는 새들만 지저귀는데... /' 라는 한시가 결코 산속에 기거하는 선비의 고독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고스란히 이해할 수 있다. 허경윤은 생애에 걸쳐 단 한 번도 쓸쓸함을 느낀 사람이 아니었다.

구천서원의 사당
 구천서원의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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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떠난 뒤에도 허경윤은 결코 쓸쓸하지 않았다. 1822년, 온 나라의 선비 221명이 뜻을 모아 김해부 서쪽 거인리(현 내외동)에 구천서원(龜川書院)을 세웠다. 허경윤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서원이었다. '조선 시대의 유자(儒者)라면 누구나 과거 합격과 사당에 배향되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여겼을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사회적 지위와 인물됨됨이를 평가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는 김건래 논문 <손처눌 연구>를 참고한다면, 죽암은 '살아 등과(登科, 과거 합격), 죽어 사당'을 이룬, 더 이상 바랄 것 없는 선비였던 것이다.

살아서 과거 합격, 죽어서 서원 제향

구천서원은 김해시 상동면 우계리 811번지에 있다. 강당, 사당, 동재, 서재를 제 자리에 온전히 갖춘 모자람 없는 서원이다. 관리사도 별도로 있다. 뿐만 아니라, 서원 뒤로 5분 가량만 오르면 선생의 유택(幽宅, 묘소)에 참배를 할 수도 있고, 묘소 왼쪽 앞에는 선생을 추모하는 비갈도 세워져 있다.

묘소 참배를 마치고 돌아 내려오는 길에서 보는 풍경이 삭막하다. 서원을 찾아갈 때에는 어두워지기 전에 닿아야 할 텐데 싶은 마음에 경황이 없어서 눈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이제 보니 서원 가까운 전방에 엄청난 교각들이 세워져 있다. 머잖아 고속도로가 개통될 낌새다. 서원에서 묘소까지 숲속길을 오가면서 새 소리를 듣지 못했는데, 앞으로는 쌩쌩 달려가는 차량 소음이 이곳을 가득 메우려나 보다. 문득, '선생에게 송구스럽다'는 생각이 일몰처럼 무겁게 내 마음을 짓누른다.  

묘소에서 내려오면서 본 구천서원의 뒷모습. 높은 교각들이 하늘을 가리고 있어 장차 이 곳의 답답해질 풍경을 예견하게 한다.
 묘소에서 내려오면서 본 구천서원의 뒷모습. 높은 교각들이 하늘을 가리고 있어 장차 이 곳의 답답해질 풍경을 예견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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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허경윤, #구천서원, #조식, #임진왜란, #죽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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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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