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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물려준 나의 80년대 유산. 제5공화국 출범 100원, 1000원 기념 주화와 500원짜리 지폐.
▲ 1980년대 동전과 지폐 아버지가 물려준 나의 80년대 유산. 제5공화국 출범 100원, 1000원 기념 주화와 500원짜리 지폐.
ⓒ 이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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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두 달이다. 일자리를 잡지 못한지도. 동네 작은 도서관은 어느새 나만의 직장이자 은신처가 되었다. 다시 일을 하는 게 쉽지 않다. 직장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 수준이다. 나이도 때를 묻고, 경력도 능력도 미천하니 별 수 없다. 그나마 무료로 이용하는 도서관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빌 게이츠를 만든 위대한 곳이라 자위는 덤이다.

'서당 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다. 도서관 출근 두 달째 되니 단골도 눈에 띈다. 주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1년차 이상의 '프로시험러'들이다. 이들의 자리는 고정석이다. 새벽 출근이 기본이다. 독서 거치대와 형광펜으로 철저히 무장한다. 밥 먹는 시간 외에는 시야는 항상 책에 꽂혀 있다. 시나브로 존경심이 우러나온다.

반면 나같이 시간이나 때우는 '프로타임러'의 모습도 각양각색이다. 주로 주부와 노인들이 그 부류다. 유모차에 태운 아기가 우는 것도 마다 않는 용감한 자매들도 보인다. 돋보기를 낀 채 깨알 같은 신문을 보며 욕을 하는 어르신의 모습은 '귀염' 그 자체다. 도도한 백발마녀의 얼굴과 고급스런 안경으로 치장한 할머니의 독서 삼매경은 뭇 할아버지들의 시선을 한 방에 사로잡는다.

이밖에도 시험기간에 몰려든 학생들의 재잘거림은 흐뭇한 반주거리다. 가끔 보이는 초등학생들의 '꼬마철학자'와 같은 열정은 감동을 두 배로 준다. 옆자리, 앞자리에 앉은 아름답고 지적인 여성의 머리카락은 심장박동을 뛰게 한다. 그리고 몰입의 시간을 빠져나와 300원으로 즐기는 자판기 커피의 여유는 하루의 불안을 말끔히 해소시킨다.

단돈 100원 경제학, 소소한 행복을 깨우다

▲한식=곰탕·설렁탕·비빔밥50원(60원) ▲왜식=김초밥50원(100원)고기덮밥50원(70원)냉온소면40원(70원)계란덮밥50원(70원) ▲중화대중식사=간짜장35원(45원)짜장면30원(40원)우동30원(40원)..
▲ 1960년대 음식 가격표 ▲한식=곰탕·설렁탕·비빔밥50원(60원) ▲왜식=김초밥50원(100원)고기덮밥50원(70원)냉온소면40원(70원)계란덮밥50원(70원) ▲중화대중식사=간짜장35원(45원)짜장면30원(40원)우동30원(40원)..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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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가 된 후로 동전의 미학을 새롭게 배운다. 자판기 커피 가격도 최근에 알았다. 그동안 동전은 애물단지로만 여겼다. 귀찮고 무거운 존재였다. 짤랑거리는 소리마저 불쾌했다. 사용할 수 있는 곳도 별로 많지 않았다. 분명 돈인데 돈으로서 인정받지도 못했다. 동전이 참 처량해보였다.

하루는 주머니와 가방을 온통 뒤져도 200원밖에 나오질 않았다. 단돈 100원이 모자라 나만의 작은 사치를 즐길 수 없는 게 너무 분했다. 하염없이 자판기 커피만 바라봤다. 이 놈까지도 나를 무시했다. '에라이, 이 100원만도 못한 놈아'...헐~.

자판기를 오가는 '프로시험러', '프로타임러'들의 커피향이 부러웠다. '100원만 빌려 달랄까'도 생각했다. 그러나 바로 생각을 접었다. '100원은 빌리는 게 아니다'라는 판단이었다. 그냥 주면 모를까, 어느 누가 100원을 '빌린다'고 생각할까. 그저 웃음만 났다. 빌리지도 못하고, 100원 때문에 이렇게 비참할 수가 있다니. 어이없는 상황에 한동안 멍 때렸다.

"짜장면 50원. 커피 50원. 명동칼국수 70원, 유부가락국수 50원, 찐만두 한판 60원. 태극당 단팥빵 30원, 시내버스 30원"

어느 파워블로거가 올린 1974년도 생활요금이다. 100원이 정말 귀했던 시절의 이야기다. 내가 태어났던 당시에 100원이면 멋진 아가씨와 데이트에 나가 짜장면에 다방커피를 즐길 수가 있었다. 100원만 더 있으면 60원에 영화 관람을 하고 버스요금 30원을 내고 집으로 갈 수 있었다. 그러고도 10원이 남아 저축까지 가능했다. 

이뿐인가. 1980년대로 올라가보자. 나의 유년시절이다. 딱지 70장짜리 세 판을 사면 90원, 10원으론 왕사탕 2개를 샀다. 구슬은 30개 샀다. 오락실을 가면 유명 게임 '갤러그'와 ''뽀글뽀글' 두 판을 할 수 있었다. 별 사탕이 들어있는 '뽀빠이' 과자 5개, 라변1봉지와 사탕 2개, 일명 쫀디기와 아폴로 쪽쪽이 각 3개씩, 설탕으로 만든 왕잉어 뽑기 2판, 번데기와 솜사탕 2봉. 그리고 좋아하는 여자 친구에게 사랑을 전했던 편지봉투는 30원, 우표는 60원이었다.

그럼 요즘은 안 그럴까. 때론 100원 때문에 울고 웃는다. 기름 값이 리터당 100원 내릴 때마다 소비자는 웃고 정유회사는 눈물을 흘린다. 노동계는 최저임금 100원 인상에 환호성을 치지만, 10조 이상의 재벌이 모인 경영계는 몸서리를 친다. 저가항공사는 100원 경매마케팅을 벌이고, 시민단체는 100원의 기적 캠페인을 펼친다. 이처럼 100원의 미학은 아직까지도 현재진행형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20년이면 동전이 사라진다고 한다. '동전 없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야심찬 로드맵이다. 과거 두둑한 동전을 보며 '재벌 부럽지 않다'는 소리는 다시 볼 수 없게 됐다. 동전과 함께 사라질 옛 모습의 빨간 공중전화기, 커피자판기, 오락실 게임기 등의 소소한 일상의 로망도 사라지게 생겼다. 과거도, 추억도, 그리움도 이대로 사라져가는 게 씁쓸하다.

새로운 인연으로 다시 내게 행복을 전해준 100원에게 고마운 인사를 표한다. 나의 삶과 같이 익어간 그의 인생 40여년의 역사가 결코 헛되지 않았다고 위로해주고 싶다. 얼마 남지 않은 너와의 만남을 알차게 보듬고 싶다. '100원이 있었기에 100억의 신화가 창조됐다'는 어느 CEO의 잠언처럼, 이제 나부터 너를 아끼고 사랑하련다. 고맙다 100원아, 미안하다 동전들아. 


태그:#100원의 경제학, #동전의 미학, #동전 없는 사회, #자판기 커피, #일상의 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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