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이슈가 된 고려대 단톡방 언어 성폭력 사건을 보며, 나는 한편으로는 분노의 감정을 느꼈지만 또 한편으로는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관련 기사 : 전혀 '특별'하지 않은 고려대 카톡방 성폭력 사건).

가해 학생들 중 몇몇이, 다름 아닌 고려대 양성평등센터에서 서포터즈 활동을 하거나 새내기 새로배움터에서 성평등 지킴이 활동을 한 사실 때문이다. 물론 이런 상황이 어제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스스로 페미니스트임을 자처하거나 강하게 여성주의적 주장을 제기한 남성들이 젠더 폭력을 저지르거나 여성 혐오적 발언을 하는 상황은 자주 발생해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을 마주했을 때, 우리는 그가 '진짜' 페미니스트가 아니었으며, 지금까지 그가 해온 행동에는 아무런 진정성이 없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물론 나는 이 같은 비판이 매우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며 일견 동의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정리하고 넘어가는 것으로 충분할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왜냐하면 나는 그런 사태가 발생한 것은, 표면적으로나마 여성주의자를 지향한 그들이 꼭 필요하지만 누락하고 지나간 과정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남성이 페미니스트라면 거쳐야 할 과정' 같은 것을 이야기하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다. 마치 내가 페미니스트의 자격 기준을 정해버리는 꼴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글을 쓰는 나 또한 남성이라는 점에서, 이 글은 주제넘는 말일 수도 있다.

게다가 나도 여성주의자로서 그렇게 잘살고 있는 편도 아니다. 그럼에도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이야기한 뒤 몇 년간, 내가 겪었던 시행착오와 거기서 얻은 통찰을 공유하는 게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남성'으로서 페미니스트가 되겠다는 누군가가 나와 같은 실수를 번복하지 않을 수도 있기에.

큰사진보기
▲  최근 고려대에서 발생한 단톡방 언어 성폭력 사건이 큰 논란을 빚고있다
ⓒ 연합뉴스tv 갈무리	관련사진보기

여성주의자가 된다는 것

'여성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사전적 의미에서 '주의자'는 '어떤 주의를 믿고 따르는 사람'이다. 이 말을 페미니스트에 기계적으로 적용한다면, 페미니스트란 '여성주의를 믿고 따르는 사람'이다. 페미니즘이 제시하는 비전을 믿고, 거기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렇다면 여성주의는 무엇일까. 또다시 사전적인 의미를 빌어 거칠게 정리하자면, 여성주의는 다른 여러 사회적 차별과 더불어 섹스(생물학적인 성)와 젠더(사회·문화적인 성), 섹슈얼리티(성적 수행)에 따른 억압과 차별을 없애기 위한 이론과 정치적 의제들이다.

하지만 이 정도로 '여성주의'를 정리하고 지나가기에는 부족하다. 성별을 중심으로한 차별과 억압은 기성의 시선으로는 포착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페미니즘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렌즈를 통해, 여성의 시선 혹은 사회적 소수자의 시선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길 요구한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페미니즘 인식론'이다. 정리를 해보자면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것은 '기성 남성중심적 시선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회를 해석하고, 이것에 기반해 행동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많은 이들, 특히나 나를 포함한 남성들은 여성주의적인 목소리나 페미니즘 이론을 접하는 방식으로 여성주의의 길을 따라간다. 경험적인 차원에서 성별에 따른 사회적인 억압이나 차별을 겪는 경우가 전무하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는 처음에는 여성학 서적을 읽고, 이후에는 강의를 듣거나 단체에서 활동하는 식으로 페미니스트가 되고자 했다. 아마 내 또래의 많은 남성들이 비슷한 경로를 거쳐왔을 것이다.

여성주의에 관한 글을 쓰며, 내가 빠트린 것

그렇게 시간을 보내오다 지난해, 나는 내가 쓴 글들을 보며 이상함을 느꼈다. 지난 한 해 나는 여성혐오에 대한 글을 몇 편 썼다. 그 글은 혐오하는 사람에 대한 강한 분노와 비난으로 가득했다.

하루는 그 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에게 그 글을 쓴 사람이 나라는 이야기를 하자 그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정말? 나는 어떤 여자 분이 쓴 줄 알았는데." 그리고 집으로 돌아간 나는 내가 쓴 글을 다시 살펴봤다. 그리고 나는 뭔가 심각하게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내가 쓴 글들에는 '남성'으로서 나의 위치가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나는 마치 내가 그런 혐오의 대상이 된냥 말을 하고 있었다.

물론 나는 '남성은 그런 식의 글을 써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다. 분노할 일에는 분노하고 비판할 것은 당연히 비판해야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 글을 쓰며, 내가 꼭 이야기 해야 할 것을 누락했다고 생각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남성인 내게 여성혐오가 미치는 영향이 여성들과는 같지 않기 때문이다. 불평등한 젠더 관계가 만들어내는 현상들이 결코 여성과 남성에게 똑같이 다가오지 않는다. 혐오 앞에서 여성은 위축되거나 불필요한 자기검열의 굴레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여성혐오 때문에 내가 그런 난관에 처할 일은 없다. 오히려 여성들이 위축되는 그 순간에, 나는 부당한 이익을 배당받기도 한다. 눈치보지 않고 무언가를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권력인가.

여성주의는 젠더와 섹슈얼리티라는 렌즈를 통해 사회 전반을 해석한다. 특히나 페미니즘은 일상까지도 정치적인 공간으로 포섭하기 때문에, 사실상 여성주의의 무대가 되지 않는 공간은 없다. 그리고 나는 그 공간들에서 다름 아닌 '남성'으로서 살아가고 있다. 페미니즘이 파악한 불평등한 성별 권력 관계의 한 지점에 나 역시도 발을 딛고 서 있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내가 무슨 선언을 한다고, 자연히 이러한 사회적 관계망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내가 했었어야 했던 일은 여성주의의 렌즈를 들어 다른 사람들을 살피는 것만이 아니었다. 그 렌즈를 거꾸로 돌려 나를 바라보는 것도 필요했다.

큰사진보기
▲  최근 신촌에서 열린 '여성 폭력 중단을 위한 필리버스터' 광경
ⓒ 한국여성민우회	관련사진보기

남성에게 성찰이 필요한 또다른 이유

남성이 페미니스트가 된다고 할 때, 자기 위치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이유는 또 있다. 좋든 싫든 우리는 불평등한 성별 권력관계가 작동하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는 성장해왔으며, 그러한 사회적 요소들은 우리를 구성해왔다. 때문에 우리가 렌즈를 스스로를 향해 돌리지 않고, 어떤 주장이나 일을 하는 것에서 멈춰버린다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부정의한 일들을 저지르는 결과가 발생할 수 있다.

특히나 우리가 새로운 삶의 국면에 접어들었을 때 그렇게 될 가능성이 크다. 익숙한 공동체 내부에서 우리가 차별적이거나 혐오적인 언행을 할 가능성은 비교적 낮다. 시행착오를 거쳐 그렇지 않게 사는 것을 연습했고, 그것이 익숙해졌기 때문이다(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하지만 우리가 처음 직장 동료로서 어떤 여성과 마주했을 때, 혹은 나이든 남성으로서 어떤 여성을 처음 마주쳤을 때는 어떨까. 우리가 그 순간에 상대방과의 관계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성찰하지 않고, 나의 행동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검토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가 익숙하게 봐왔던 대로 이 사람들을 대할지 모른다. 말하자면 우리가 지양하고자 했던 바를 고스란히 실행하는 것이다.

아마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항변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24시간 내내, 우리는 스스로를 검열하며 살아가야 하느냐'라고. 나는 그 정도까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어떤 '주의자'로 살기로 했다면 어느 정도 자기 점검을 하고 긴장을 가지는 일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여성주의자라면 더욱 그렇다. 페미니즘이 강조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일상적인 실천'이기 때문이다. 여성주의적 실천이 필요한 공간에는 한계가 없다.

'좋은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

여담이지만 누군가 내게 '여성주의'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답하고 싶다.

"페미니즘은 가장 기본적인 정의가 실현되도록 지향하는 사상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때문에 여성주의자가 된다는 것이 '좋은 사람'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특히나 남성의 경우 페미니스트로 살겠다고 마음먹는 것은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을 피하겠다는 의미에 가깝다.

나는 페미니스트인 남성이 스스로를 '좋은 일'을 하는 사람으로 정체화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언젠가 우리가 저지를 지도 모르는 실수나, 내가 부당하게 누리는 기득권을 가려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좋은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을 하기 위해 변화를 선택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