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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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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가 없는 세상에 사람들은
약속을 할 때 이렇게 하지
내일 아침 해가 저기 저 언덕 위에 걸쳐지면
그때 만나자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은
10분이 늦어 이별도 하지
시계도 숫자도 다 있는 이곳에서
우리는 만나 사랑을 하지

- 안녕하신가영,  '10분이 늦어 이별하는 세상' 노랫말 중에서
문명에서 불어오는 시간이 바람이 멈춰선 곳. 카파도키아 괴레메 마을. ⓒ 한성은
카파도키아는 시간이 멈춘 곳이었다. 도시 문명의 광속 같은 시간이 이곳에서는 힘을 떨치지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은 것 같았다. 카파도키아는 6천만 년 전에 화산이 폭발하고 화산재가 쌓이고, 그 후로 융기와 침식이 반복되어 지금과 같은 절경이 되었다. 지금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자연의 장엄함에 아무런 형용도 못 하고 그저 짧은 감탄사를 내뱉는 것 뿐이다.

이스탄불에서 출발한 버스는 장장 11시간 가까이 쉬지 않고 달린 끝에 네브쉐히르(Nevsehir)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다시 로컬버스로 갈아타고 최종 목적지인 괴레메(Göreme)까지 20여 분을 더 달렸다. 야간 이동이 무척 힘들 것 같지만, 터키의 고속버스는 비행기 국제선처럼 앞 좌석에 붙어 있는 단말기를 통해 텔레비전이나 음악도 들을 수 있고, 차 안에서 Wi-Fi를 사용할 수도 있다. USB 포트를 통해 전자 기기의 충전도 가능하다. 승무원이 간단한 간식과 음료를 제공해 주는 것은 물론이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따뜻한 홍차를 마시면 온몸이 나른해진다. 다만 침대 버스가 아니라서 비스듬히 기댄 채로 잠을 자야 하지만, 늘 피곤한 여행자에게 이보다 더 편안한 곳은 없다. 승차권을 예매할 때 스위트 버스(SUITE BUS)를 탈 수 있다면 반드시 이용하자. 일반 버스도 편하긴 하지만 스위트 버스는 좌석이 3열이라 좌우 간격이 조금 더 넓다. 가격은 같다. 11시간씩 야간 운전을 하면 안전 운행에 무리가 가지 않을까 내심 걱정을 했는데, 버스에는 기사님 외에 조수 2명이 같이 타고 가면서 중간중간 교대를 했다.

파파 스머프가 지팡이를 짚고 나올 것 같은 '동굴 마을'
이스탄불에서 카파도키아를 향해 달리는 버스 위에서 일출을 맞았다. ⓒ 한성은
고속버스 안에서 티비를 보고 인터넷에 접속하고, 따뜻한 홍차와 간식도 먹을 수 있다. ⓒ 한성은
버스에 화장실이 마련되어 있지 않아서 조마조마했는데, 생각보다 자주 고속도로 휴게실에 정차하여 사람들의 불안을 잠재워주었다. 휴게소는 우리나라에서 흔히 보는 휴게소와 같았다. 다만, 휴게소 내에 입점한 점포들이 모두 거대 외국계 기업이라 놀랐다. 주유소는 셸(Shell), 편의점도 셸(Shell), 음식점은 버거 킹(Burger King), 카페는 스타벅스(Starbucks)였다.

고속도로는 국가의 기간 시설인데, 외국계 기업이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니 씁쓸했다. 우리나라는 외국계 회사가 사회 간접 자본에 직접 투자를 하고 운영 수익에다가 보조금까지 가져가니 뭐라고 이야기할 처지는 안 되겠다. 왜 국민 세금으로 만든 기간 산업의 운영 수익을 거대 기업이 가져가는 걸까. 새벽에 잠깐 눈을 떠보니 모든 고속도로 휴게소가 같은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카파도키아는 특정한 마을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기암괴석이 펼쳐진 지역 전체를 의미한다. 여행자들은 괴레메, 위귑, 아바노스 등의 도시들에 정착하여 넓은 지역을 돌아보는데, 관광지와 가깝고 비교적 저렴한 숙소가 밀집한 마을이 괴레메여서 특히 이곳으로 많이 모인다.

괴레메는 신기루 같은 마을이다. 현지인이 거주 목적으로 지내는 집은 거의 없고 모든 집이 다 호텔이나 호스텔이다. 손으로 문지르면 부서지는 응회암을 파고 들어간 곳에 현지 주민들이 터를 잡아 살았고, 괴레메의 모든 집터는 동굴 호텔이라고 불리며 고급 호텔이 관광객을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괴레메에는 관광객이 아니면 모두 관광객을 상대로 하여 생계를 잇고 있는 사람들만 있다. 마을 자체도 넓지 않아 한 시간만 걸으면 마을 전체를 돌아볼 수 있다.

이곳은 관광 목적이 아니라면 찾을 이유가 전혀 없는 곳이기 때문에 이스탄불에서 괴레메로 직행하는 버스가 없는 것이었다. 그래도 성수기에는 괴레메로 직행하는 노선이 제법 많이 생긴다고 한다. 5월은 비수기였다.
마을 사람들이 사용하던 전통 동굴집들은 대부분 호텔로 개조되어 관광객을 맞고 있다. ⓒ 한성은
수학여행 기분을 낼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아파트 보다 쓸쓸했던 도미토리룸. ⓒ 한성은
이스탄불에서는 주거용 아파트를 빌려서 지내다 보니 다른 사람들과 교류할 기회가 없었다. 뭔가 세상과 단절된 기분이었다. 그저 걷고 또 걷기만 했던 것 같다. 그래서 괴레메에서는 도미토리로 숙소를 정했다. 버스에서 만난 여행자와 이야기를 하다가 우연히 알게 된 숙소였다. 커다란 옥탑방에 16명 정도가 수학여행처럼 매트리스를 나란히 깔고 지낸다고 했다. 동굴 호텔 같은 것은 애초부터 염두에 없었다. 어차피 모든 관광지가 동굴 속이니까 말이다.

그렇게 도착한 숙소는 아주머니께서 이야기해 준 그대로였다. 하룻밤 6천 원의 도미토리는 여행자에게 마음의 여유와 지갑의 여유를 안겨 주었다. 하지만 도미토리는 썰렁했다. 역시나 비수기였던 탓이다. 지내는 동안 거대한 도미토리룸을 독채처럼 사용했다. 사람이 많으면 조용한 고독이 그립고, 사람이 없으면 북적이는 활기가 그리웠다. 인간은 참 나약하고 또 고약한 것 같다.

숙소를 나와 타박타박 걷는다. 주변을 조망할 수 있는 언덕으로 올라간다. 동굴을 끼고 호텔들이 자리를 잡고 있고, 동굴들을 따라 좁은 길이 나 있어서 동네 골목길이 미로처럼 복잡하다. 오죽하면 수많은 호텔에 번호를 붙여 놓고 골목 초입에 호텔 번호판을 세워 놓았을까. 안내판만 쳐다보고 있어도 정신이 없다.

언덕을 올라가야겠다는 일념으로 걷고 걸어서 겨우 전망대에 도착한다. 아무런 형용도 못 하고 그저 짧은 탄식만 내뱉을 수밖에 없는 풍경이 펼쳐져 있다. '이게 대체 다 뭐람?' 타이완의 예류지질공원을 수천 배 확대해놓은 것 같다. 아니 그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멀리 우뚝 솟은 레드벨리(Red Valley)는 거인들의 식탁 같았고, 작은 봉우리마다 동굴을 파고 들어가 지은 마을은 파파 스머프가 지팡이를 짚고 나올 것 같았다.
파파 스머프가 손을 흔들며 나올 것 같은 동굴집들. ⓒ 한성은
지구라는 행성에 대한 경이로움이 솟아났다. 여행을 하면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진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사실 지금까지 여행 많이 다녀 본 사람이 잘난 척하려고 쓰는 문장이라고 생각했었다. '사람 사는 곳이 다 똑같지 뭐' 하며 지냈는데, 그 말이 맞았다. 경이로운 자연을 마주하면 사고가 전 지구적인 스케일이 된다. 내가 사는 곳이 한국, 부산, 해운대가 아니라 지구라는 행성이라는 자각을 하게 된다.

분명히 그 언덕에서 끝없이 펼쳐진 카파도키아를 조망하며 나는 분명하게 인지했다. 나는 지구인이다. 우습게 들리겠지만, 인식이 급격하게 확장되는 경험은 굉장히 압도적인 충격이다. 빅뱅 이후 우주가 급팽창하던 순간의 느낌이 이런 것일까. 실없는 생각을 해본다.

이스탄불에서의 경험도 있고, 우리나라를 떠올려도 그렇고 관광지 식당과 고속도로 휴게소 식당은 늘 실망스럽다. 길가에 늘어선 식당들 말고 마을 뒷골목 어딘가에 현지인들이 이용하는 식당이 없을까 하고 두리번거리며 걷는다. 현지인들이 찾는 식당이 진짜 맛집이고, 진짜 싼 집이다. 부산에 살다 보면 외지에서 놀러 오는 손님들이 가자고 하는 소위 '맛집'이란 곳은 대부분 현지에 사는 사람들은 잘 모르는 곳일 때가 많다. 여행자들끼리 모여서 부산 최고의 맛집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 같아 우스울 때가 있다. 물론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현지인 식당을 찾고 있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 물론 이것도 내가 그저 못 찾은 것일 수도 있겠으나, 워낙 조그만 동네라서 안 가본 골목길이 없을 정도다. 길가에 늘어선 식당들은 나에게는 너무 부담스러운 가격이라 차마 들어가지를 못했다. 좁은 동네이면서 관광객들에게는 유명한 곳이다 보니 한국 여행객들이 써 놓은 식당 후기 몇 개만 보면 이 동네의 모든 식당 상황을 순식간에 파악할 수 있었다. 점점 배가 고파온다. 서러움도 밀려온다. 왜 이리 궁상맞게 다닐까. 한국에서라면 잔뜩 주문해놓고 반쯤은 쿨하게 남기고 배부르다며 2차를 갔을 텐데, 지금은 그럴 수 없다.

그리고 모든 가게 주인들과 택시 기사 아저씨와 공원 벤치의 한량들까지 어찌나 나를 불러대는지 웃으면서 '노 땡큐' 하는 것도 배가 고파서 못 할 지경이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한국에서 파마를 하고 와서 머리가 뽀글뽀글한데 머리를 풀고 길을 걸으면 '니하오!'라고 하도 외쳐대서, 머리를 상투처럼 묶고 나름대로 강한 인상을 팍팍 풍기며 다녔더니 이번에는 '곤니찌와~~~~~~!'라며 꼬맹이들이 따라다닌다. 태극기 티셔츠를 가져올 걸 그랬나 보다. 그랬다면 여행 내내 "안녕하세요오오오!"를 듣고 다녔겠지.

여행하면서 익힌 한 가지 팁이 있는데, 속칭 삐끼들이 와서 동아시아 3개 국어를 모두 퍼부으며 어디서 왔냐고 계속 귀찮게 굴면 "카자흐스탄"이라고 하면 된다. 이 아이들도 낯선 나라의 이름을 들으면 다음 말을 잊지 못하고 '어버버버' 하다가 그냥 간다. 그렇게 몇 명 보냈는데 효과가 좋다.  

한참을 걷다가 그냥 포기하고 숙소에서 밥이나 안쳐서 먹어야겠다고 돌아가는 데, 숙소 바로 앞에 빵 가게가 있었다. 화려한 베이커리가 아니라 만화영화 <플란다스의 개>에서 보던 딱 그런 빵 가게였다. 터키인들은 주식이 빵이다. 식당에서도 요리를 주문하면 에크멕(Ekmek)이라고 부르는 빵은 무제한으로 제공된다. 동네 식당에서는 그냥 식탁 위에 쌓여 있다. 호텔 사장님도 밥은 먹어야 하니까 빵집은 있나 보다 싶었다.

그동안 식당에서 나오는 빵만 먹어봤지 빵 가게에서 빵을 사 먹어 보지는 않았다. 빵 가게 안에는 화덕이 있었고, 연신 따뜻한 빵이 구워져 나오고 있었다. 기다란 에크멕 하나 가격은 무려 0.7리라였다. 우리 돈 300원 정도 되는 금액이었다. 스콘 같이 생긴 빵도 골랐더니 아저씨가 이건 비싼 거라고 다른 걸 권해줬다. 정말 맛있었던 그 스콘은 1.5리라였다. 굳이 거울을 보지 않아도 내 몰골을 알 수 있었다. 1.5리라짜리 몰골인가보다.

'나 돈 있어요'라는 박태원의 '천변풍경'이 떠오르는 대사를 내뱉고 빵을 사 왔다.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그날 샀던 빵은 계속 가지고 다니며 3일을 먹었다. 그런데 빵이 하도 안 줄어들어서 나중에는 조금 슬펐다. 이렇게 아껴서 아파트라도 한 채 사야겠다.
300원짜리 에크멕(오른쪽 길쭉한 빵)을 팔면서 내 주머니 걱정을 해주던 인상 좋은 아저씨. ⓒ 한성은
종이 봉투에 빵을 한가득 담아 들고 나오면 파트라슈가 달려올 것 같은 동네 빵집. ⓒ 한성은
화내지 않고 '여행지 삐끼'들 보내는 방법

괴레메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유적지인 야외 박물관으로 향한다. 야외 박물관이라고 이름 붙어 있지만, 박물관이라기보다는 동굴 교회 군집이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린다. 1000년~1500년 전에 이슬람에 의한 박해를 피해 기독교도들이 동굴을 파고 그곳에 교회를 만들어 놓은 곳이다.

응회암이라 동굴을 파기가 그다지 어렵지 않았을 것 같지만, 막상 동굴 내부에 들어가서 정교하게 세워진 기둥과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는 프레스코화를 보고 있으면 기독교도가 아니더라도 절로 경건해진다. 대체 이게 다 뭔가 싶다. 종교가 무엇이길래 다른 믿음을 가진 이들을 억압하고, 또 그 억압을 피해 동굴을 파고 자신의 신을 섬기기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일까. 종교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목숨도 바치는 행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나는 독실한 종교인도 아니고 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무신론자에 가깝다. 그래서 종교란 문화적 산물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모든 인간이 사라지고 나서도 종교적 신념은 여전히 그 힘을 발휘할까. 인간이 사라진 자리에 동물들과 식물들이 모여서 노예를 동원해 거대한 신전을 짓고 재물을 바치며 신을 모실까. 왜 인간은 똑같은 역사를 반복하는 것일까.

역사는 중세 유럽을 '암흑기'라고 표현한다. 신에게 인간의 자리를 완전히 내어준 그 기간이 인간사에는 암흑이었던 것이다. 이슬람은 이곳에서 기독교도들을 탄압하고, 제4차 십자군 원정은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하고, 신의 이름 아래에서 얼마나 많은 인간이 죽어야 했던가. 나는 '성전(聖戰)'이라는 말 자체가 표리부동이고 모순이라 생각한다. 내가 아는 한 모든 신들은 인간을 사랑한다고 했다. 신이 들으면 통탄할 일일 것이다.
기독교도들이 이슬람의 박해를 피해 동굴을 파고 교회를 만든 괴레메 야외 박물관. ⓒ 한성은
괴레메 야외 박물관의 기독교 성지에 무슬림 학생들이 단체 여행을 왔다. ⓒ 한성은
괴레메 야외 박물관의 입장료는 30리라(1만 2000원)이다. 작지 않은 금액이다. 카파도키아 지역의 7개 박물관을 모두 볼 수 있는 패스는 45리라이고 터키 내에 있는 모든 박물관을 볼 수 있는 패스는 185리라이다. 나는 카파도키아 패스를 샀다. 이 패스의 유적지들만 다니면 여행 경로가 만들어지는 것이니 고민도 덜고 금전적인 부담도 함께 해결됐다.

동굴을 파고 지하 도시를 만들던 이들의 선조들은 생각이나 해봤을까. 그들이 받은 박해의 역사를 밑천으로 후손들이 먹고 살고 있다. 모든 것이 상품이 된 사회에서는 슬픔도 돈으로 거래 된다. 물론, 입장료가 비싸다거나 무료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쏟아지는 관광객들 속에서 그들의 유적을 보호하고 관리해야 하므로 돈은 필요하다.

다만 나는 그냥 슬펐다. 그들의 역사를 구경거리 삼아 관광하고 여행하는 게 불합리한 것 같았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렇게라도 전해지고 이어지는 것이 그들의 참혹한 역사를 하얗게 잊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것 같다. 기억하는 것은 아주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 기억하는 것보다는 잊는 편이 훨씬 수월하다.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잊혀지니까.

관광 명소라는 것은 낯선 장소의 다른 말이다. 내가 살고 있는 일상과 다른 곳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신기하다, 예쁘다'를 연발하며 그 풍경을 소유하기 위해 연신 사진을 찍는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사람들 사이에서 소위 '핫하다'는 명소는 해운대나 광안리가 아니라 '감천문화마을'이다. 한국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감천문화마을은 이름이 거창해서 그렇지 그냥 달동네다. 도심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비탈진 산기슭에 판잣집을 짓고 모여 살기 시작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나도 물론 거기에 갔었다. 버스를 타고 산복도로를 한참 올라가면 산꼭대기에 정거장이 있고, 그 앞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예쁜 벽화들이 가득하고 산속에 폭 둘러싸인 마을은 참 예쁘다. 나 역시 예쁘다고 소문난 마을을 구경하고 높은 자리에 있는 카페에 앉아 사진을 찍다가 주택 옥상에 빨래를 널어놓은 풍경이 너무 예뻐서 연신 사진을 찍고 있었다. 마당에는 다 탄 연탄이 쌓여 있었다.

'수업시간에 아이들에게 보여줘야지. 요즘 아이들은 연탄을 잘 모를 테니까.'

그러다 문득 내가 하는 짓이 소름 끼치도록 무서웠다. 저들이라고 편한 게 싫을까. 저들이라고 겨우내 연탄을 짊어지고 창고에 쌓고, 다 타버린 연탄을 다시 마당 한편에 쌓고 싶을까. 나도 어릴 때 집 뒤에 이름 모르는 무덤이 있던 산동네에 살았었다. 온 가족이 연탄가스를 마시고 생사를 넘나든 적도 있었다. 그 후로 연탄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게 되었고, 그 마을을 떠난 뒤에는 난방을 위해 연탄을 사용한 적이 없다. 나는 연탄보일러가 싫다.

이제는 동물들을 우리에 가두어 놓고 기념사진을 찍고, 식물들을 뿌리째 뽑아다가 한 곳에 모아 놓고 기념사진을 찍는 것도 모자라서 사람 사는 곳에 와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구나 싶었다. 그곳은 민속촌도 아니었고, 생활사 박물관도 아니었다. 올 때마다 집들이 현대식으로 바뀐다는 관광객들의 탄식을 들으며, 연간 수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다는 이 마을이 앞으로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정답이 있기는 한 걸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야외 박물관을 보고 있는데, 괜히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러다 또 쓸데없는 질문이 떠올랐다. 전통 동굴 가옥을 개조한 저 수많은 호텔의 주인들은 이곳 마을 사람들일까? 그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우울한 마음을 안고 내려가는 길에 수학여행을 온 듯한 여학생들을 만났다. 나만큼 어설픈 영어로 나에게 어디서 왔는지 묻는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좋아서 넘어간다. 음... 내가 좀 멋있나? 하는 생각도 채 하기 전에 자기는 엑소를 정말 좋아한다고 박수를 치고 난리다. 이렇게 좋아하는데 뭐라도 말을 붙여줘야 할 것 같다. 나도 엑소 좋아한다고 특히 백현을 좋아한다고 했다. 사실 엑소 멤버 변백현은 지난해 우리반 반장이 너무 좋아해서 이름도 외우고 있었다. 그랬더니 이 아이들 갑자기 나를 둘러싸고 영어와 터키어를 막 섞어서 떠들더니, 사진 찍자고 또 난리다.

'엑소는 텔레비전에 나올 정도로 모든 게 출중하니까 유명한 거고 나는 그냥 난쟁이 똥자루일 뿐이야. 정신 차려 얘들아.'
'EXO'를 외치며 같이 사진 찍자고 하여 나를 당황하게 한 터키의 여학생들. ⓒ 한성은
이 소녀들은 17살이고 9학년이라고 했다. 우리나라 중학교 3학년이나 고등학교 1학년쯤 될 것 같다. 지난해에 담임을 했던 딱 우리반 아이들 또래다. 손벽 치며 웃는 것도 같다. 서로 영어가 서툴러서 제대로 된 대화는 이어가지 못했다. 아이들이랑 한참 사진을 찍고 있는데, 저 멀리 선생님들이 계신다. 단체 여행을 할 때 이런 장면을 보면 인솔 교사들이 얼마나 난처할까 싶어서 얼른 선생님께 돌아가라고 했다. 그런데 잠시 후에 선생님 한 분이 오셔서 인사를 한다. 아이고 감개무량하여라.

독일어 교사라고 자신을 소개한 선생님은 학생들이 한국을 무척 좋아한다고 했다. 나도 한국에서 교사라고 했더니 반색을 한다. 내가 근무했던 학교가 외국어 고등학교라 독일어과가 있었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독일어 몇 마디를 했더니 갑자기 진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우리 학교 학생들이 한국을 너무 좋아하는데, 네가 있는 학교와 교류 프로그램을 만들면 어떻겠냐고 하는 것이다.

외국어 고등학교다 보니 해외 현지의 학생들과 문화 교류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참 좋은 기회인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추진해보자고 하고 싶었으나, 나는 그저 퇴직 교사일 뿐이고 지금은 그냥 백수다. 그래서 실은 여차여차해서 여행을 온 거라고 이야기를 하고 대신 학교에 계신 관계자분들께 이 이야기를 꼭 전하겠다고 했다.

서로 연락처를 주고받고 그렇게 헤어졌다. 여고생들을 보고 있으니 우리 반 아이들도 생각나고, 어릴 때부터 이런 프로그램들이 아이들의 시야를 넓혀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사실 일개 교사가 이런 프로그램을 선뜻 학교 측에 제안할 수는 없다. 내가 학교에 있었더라도 이런 제안을 했다가 펼쳐질 상황이 눈앞에 아찔하게 그려진다. 취지가 좋다고 해서 어떤 일을 시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학교에서는 좋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책임질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동료 교사에게 연락을 해볼까 하다가 마음 상할 일과 눈치 살필 일과 업무 가중이 눈에 보여 그냥 묻어 두기로 한다.  

저기서 또 한 무리의 여학생들이 올라오고 있다. 여기가 아마 터키인들에게도 중요한 유적지인가 보다. 그런데 이번에 만난 학생들은 모두 히잡을 쓰고 있었다. 간간이 차도르를 걸친 학생도 보였다. 외국인을 보고 신기해하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인가 보다. 늘 유럽인들만 보다가 까만 머리 아시아인이라서 더 그런 것인지, 이 아이들도 엑소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또 사진을 찍자고 한다. 터키 여행을 하면서 난데없이 사진을 같이 찍자고 하는 경우가 많아서 별 어색함 없이 같이 사진을 찍는다.

히잡을 쓰고 있는 아이가 너무 예뻐서 내 카메라로도 같이 찍자고 하고 한 장을 더 찍었다. 연예인이 된 것 같다. 우울한 기분이 사라지려는 순간 같이 사진을 찍었던 아이가 달려와서 뭐라고 난처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한다. 응? 나 터키어는 할 줄 몰라. 그랬더니 옆에 있던 친구가 대신 이야기를 해 준다.

"아까 찍은 사진 인터넷에 올리면 안 돼요."
"응?"
"친구 사진을 페이스북 같은 데 올리면 큰일 나요."
"아! 알겠어. 안 올릴게."
"절대 올리면 안 돼요. 약속해주세요."
"응. 알겠어. 지금 바로 지울게. 자. 지웠어. 됐지?"
"고맙습니다. 종교적인 문제라서 그래요."
"괜찮아. 나도 알아. 지웠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가도 돼~"

그제야 같이 사진 찍었던 아이의 표정이 밝아졌다. 자기 핸드폰으로 찍는 것은 괜찮고, 내 것으로 찍는 것은 안 된다니 조금 억울하기도 했지만, 아이의 난처한 표정을 보니 또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슬람 율법인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처음에 만난 아이들은 대부분 히잡을 쓰지 않았었다. 그래서 더 자유로웠었나.

터키는 다른 이슬람 국가들과는 달리 많이 개방된 문화를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대도시와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는 여성들의 명예 살인도 간혹 일어나 언론에 나오곤 한단다. 여성을 억압하는 사회적 도구인지, 간직해야 할 그들의 문화인지 모르겠다. 아무리 문화 다양성을 존중한다고 하지만 나는 여전히 전자에 가까운 것 같다. 남자들도 히잡을 쓰고, 차도르로 온몸을 가린 채 사진을 찍지 않는다면 다시 생각해 볼 것 같지만, 장담컨대 그럴 일은 없다. 내가 가진 사고가 폭력적인 편견이라면 누군가 알려주면 좋겠다.

카파도키아의 날씨는 변덕이 아주 밴댕이 속 같다. 카파도키아에 있는 동안 내내 하늘을 향해 속된 말을 내뱉는다. 그도 그럴 것이 해가 짱짱하게 떠서 피부가 따끔거릴 날씨라 더위를 준비하고 밖으로 나서면 난데 없이 비가 퍼붓는다. 모자를 꺼내 쓰고 점퍼를 입고 비 그을 곳을 찾느라 두리번 거리고 있으면 다시 해가 뜬다. 그냥 그러기를 온종일 반복하고 있다.
파노라마로 찍은 카파도키아의 하늘. 왼쪽 지역은 먹구름이 모여 비를 뿌리고 있고, 오른쪽 지역은 구름 없이 화창하다. ⓒ 한성은
아파트처럼 생긴 카파도키아의 상징 '위츠히사르'. ⓒ 한성은
세계문화유산 가이드북 카파도키아 편의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위츠히사르(Üçhisar)를 방문할 때도 그랬다. 카파도키아 지역은 주변에 높은 산이 거의 없어서 저 멀리 다른 지역의 기상 상황이 실시간으로 눈에 들어온다. 밝은 곳은 해가 쨍쨍한 곳이고, 저 멀리 유난히 어둡다 싶은 곳은 필시 비가 오고 있는 지역이다. 그리고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면 비구름이 우리 동네로 다가오는지, 반대로 멀어지는지 알 수도 있다. 종일 점퍼 입고 벗기만 몇 번째 인지 모르겠다.

위츠히사르는 커다란 산봉우리 전체에 동굴을 파고 주민들이 마치 아파트처럼 마을을 이루고 살았던 곳이다. 현재는 침식과 붕괴의 위험으로 마을 주민들은 없고 유적지가 되어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다. 종교 시설이 아니라 주민들의 주거 시설이라 생각하니 이번에는 마음이 좀 편했다. 당시 주민들의 대화가 상상 되서 피식 웃는다.

"안녕하세요. 이번에 새로 동굴 파고 들어온 한성은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 자네는 산 주인한테 얼마주고 동굴 팠나?"
"거 한씨~ 베란다 확장공사 할 때 조심해! 우리 집이랑 한 집 되겠어~ 허허허."
관광객들이 관람하기 편하게 길을 내어 놓은 위츠히사르 내부. ⓒ 한성은
근대 이후 인간은 자연을 정복하고 개척해가며 살고 있다. 더우면 에어컨을 켜고, 추우면 보일러를 돌린다. 과거의 인간은 자연에 순응하며 살았다. 더우면 대청을 내고 바람을 끌어 안았고, 추우면 지붕을 낮추고 창을 닫았다. 어느 쪽이 더 지혜로운 생활 방식인지 확답을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다만 동굴 안이 정말 시원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바깥은 땡볕이라 아스팔트가 뜨끈뜨끈한데도 동굴집 안은 한기가 돈다.

겨울 난방은 어떻게 해결하는지 모르겠지만, 집을 짓는 대신 굴을 파고 사는 것은 정말 좋은 선택인 것 같다. 그러고보니 바닥 곳곳에 불을 피우는 아궁이가 보인다. 겨울을 보내기 어려웠다면 몇백 년을 동굴 집에서 살지도 않았겠지 싶다.

위츠히사르 정상에 서면 카파도키아 전체 조망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 곳이 주변에서 가장 높은 곳이기 때문에 주택으로도 사용되었지만, 전쟁이 나면 군사 요충지의 역할도 했다고 한다. 펄럭이는 터키 깃발 아래서 기념 사진도 찍고, 시원한 바람도 쐬다가, 그대로 앉아서 살풋 단잠도 잤다. 햇볕 아래는 불지옥이지만, 그늘 아래만 가면 선들선들 가을이다. 온동네 개들이 그들 아래 늘어진 이유가 바로 이 맛이리라.
위츠히사르 정상에서 내려다 본 카파도키아 네브쉐히르 마을. ⓒ 한성은
그늘마다 목줄도 안 맨 견공들이 자리를 잡고 한량짓을 하고 있다. ⓒ 한성은
마을로 돌아와 카파도키아 최고의 명물인 열기구 투어를 예약하기 위해 다시 동네를 어슬렁거린다. 저녁이 되어도 관광객이 별로 없다. 다른 사람들의 여행기를 통해서 확인한 가격은 100~120유로였다. 그런데 오래된 가이드북을 뒤져보니 몇 년 전만 하더라도 60~70유로면 탈 수 있었다. 달러 약세로 환율이 변동하면서 가격이 오른 것 같았다.

실제로 5년 전 터키화 가치는 1리라에 700원이었다. 지금은 1리라에 400원이니 절반 가까이 차이가 난다. 물론 1리라 400원도 나에게는 살 떨리는 물가다. 아무튼, 원가는 그것보다 아래일테니 어디든 가서 떼를 쓰는 울며 애원하든 해야겠다 싶어 여행사를 물색한다. 100유로나 내야 한다면 평생에 한 번이라 하더라도 열기구 따위 쿨하게 포기해야겠다고 마음 먹고 있었다. 인터넷을 통해 열기구 회사에 직접 예약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러면 더 비싸다. 이런.

지칠대로 지쳐 생수 한 병을 끼고 벤치에 앉아 있으니 세상에 이런 상거지가 따로 없다. 지나다니는 백발의 백인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내가 봐도 럭셔리해 보이고 간간이 지나가는 젊은 아가씨들은 우아하게 캐리어를 끌고 거리를 걸어 다녔다. 가게 옆에 붙어 있는 여행사에서 일하는 청년이 또 말을 걸어 온다.

"와~ 네 머리 아주 쿨해. 일본에서 왔어?"
"아니 한국에서 왔어."
"오, 한국. 사무라이인 줄 알았어."
"돈이 없어서 그냥 묶고 다녀. ㅋㅋㅋ"
"나도 그런 머리 해보고 싶은데, 우리나라에선 하면 안 돼."
"나도 우리나라에선 절대 못 해. 맞아. 근데 마을에 사람이 하나도 없네."
"응. 지금은 비수기니까."    

열기구 타라는 말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자전거 타라는 말도 안 한다. 아침에 빵 가게 아저씨가 차마 스콘을 나에게 팔 수 없었던 그 안타까운 마음이 이 친구에게도 생겼나 보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원. 어쨌든 가난해 보인다는 것은 여러모로 편리하다. 사실 실제로도 가난하다. 안 되겠다 싶어서 내가 먼저 말을 건다.

"이런 풍선 타고 하늘 날아가려면 대체 얼마나 들어?"
(한참을 생각하더니)
"음... 80유로야. 1시간 동안 타고, 간식과 샴페인을 주고 어쩌고 저쩌고..."
(나도 한참을 생각하다가 슬픈 표정으로)
"음... 그렇게 비싸? 근데 멋지긴 하겠다. 돈이 많은 사람들은 좋겠다."
"그렇지, 비싸긴 하지. 어차피 우리가 하는 건 아니고 회사는 따로 있어. 근데 거기 직접 가면 훨씬 비싸."
"응. 고마워. 나중에 자전거나 빌리러 올게. 그거 타고 하늘 가야겠다. ㅋㅋ"
"그래. 잘 가."
카파도키아 어디를 가나 열기구 인형을 볼 수 있다. ⓒ 한성은
측은지심이라던가. 맹자님 말씀이 정확했다. 덕분에 흥정 시작가를 80유로에 잡을 수 있었고, 비상금을 털었다며 너스레를 떨고 난리를 쳐서, 시작가보다 훨씬 싼 가격에 열기구 투어를 예약했다. 투어가 끝나고 숙소로 돌아왔을 때 중국인 아가씨가 자기는 150유로에 했다며 어이없어 하는 것을 보며, 나에게는 조금 덜 남겨 먹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승리자가 된 것 같은 생각과 함께 대체 내 꼴이 어떻길래 싶은 열패감이 동시에 밀려 왔지만, 어쨌든 예산을 아꼈다.

'통장 잔고와 남은 여행 기간은 정확하게 정비례한다.'

열기구 투어는 오전 4시에 출발한다. 흥정의 승리자가 되어 흡족한 마음으로 400원짜리 빵을 뜯고 맹물을 벌컥벌컥 마신 후 잠이 들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자의 블로그 '타박타박 아홉걸음' http://ninesteps.tistory.com에도 동시에 게재되었습니다.

태그:#타박타박, #아홉걸음, #배낭여행, #세계일주, #이스탄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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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란 저에게 아이들이 "선생님"이라고 불러줍니다. 아이들에게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은 성실한 여행자가 되어야겠습니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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