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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세종의 부탁, "오직 한 사람만 섬겨라"

이곳에 들어섰던 시민아파트를 철거하고 2012년 복원한 인왕산자락 옥류동천의 최상류인 수성동계곡
 이곳에 들어섰던 시민아파트를 철거하고 2012년 복원한 인왕산자락 옥류동천의 최상류인 수성동계곡
ⓒ 유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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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하숙집에서 위로 약 200미터쯤 가면 바로 옥류동천의 최상류인 수성동계곡이다. '수성(水聲)'이란 물소리가 좋다는 뜻으로 추사 김정희의 시 "수성동우중에 폭포를구경하다(水聲洞雨中觀瀑此心雪韻)"와 겸재 정선의 <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가운데 한 곳일 정도로 조선시대 명승지 가운데 하나다.

뿐만 아니라 이곳은 세종의 셋째 아들로 한석봉과 함께 조선 최고 명필로 꼽히는 안평대군의 집 '비해당'(匪懈堂)이 있던 곳이다.

당호는 아버지 세종이 직접 내린 것으로 시경 증민편에 나오는 '숙야비해이사일인'(夙夜匪懈 以事一人)에서 따온 것이다. 그것은 '이른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게을리 하지 않고 한 사람을 섬긴다'는 뜻으로 너무 똑똑하고 뛰어난 셋째 아들이 혹시 딴 마음 먹거나 엉뚱한 움직임에 휩쓸리지 않고 큰 형(문종)만을 잘 보필하라는 의미였다.

조선은 건국 이래 왕자의 난 등으로 피바람만 몰아친 채 장자승계의 원칙이 한 번도 지켜지지 못한 것을 세종은 자기 대에서부터는 반드시 이루고자 했던 것 같다. 그리하여 뛰어난 셋째 아들 안평대군을 두고도 맏아들 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며 형을 잘 보필하라고 지어준 세종의 바람이 담긴 당호였다.

그러나 안평대군의 삶은 아버지 세종의 희망과 달리 순탄하지 못했다. 문종이 즉위 2년 3개월 만에 그만 승하하면서 또다시 피바람이 불어온 것이다.

문종이 죽자 그의 외아들이었던 단종에게 왕위가 계승되었지만 단종의 삼촌이자 안평대군의 형이었던 수양대군의 왕권찬탈(계유정난)이 벌어지면서 안평대군 역시 강화도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바로 자기 친형에게 사약을 받게 되었다.

그야말로 자신의 이름처럼 안평(安平)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36세에 세상을 하직했으며, 무척이나 예술을 사랑했던 그였지만 정반대로 정권투쟁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이런 안평대군의 삶이 서려있는 곳이기에 이곳 수송동계곡을 찾는 많은 사람들이 계곡 숲 속 저편에 있었을 비해당을 그려보며 안평대군을 상상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곳 비해당은 안평대군이 죽자 세종의 둘째 형이자 안평대군의 삼촌인 효령대군이 차지하였다.

효령대군은 안평대군보다 22년 먼저 태어나 33년을 더 살아서 90세까지 장수하였음에도 이곳 수성동계곡에서 효령대군을 상상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후대는 90세를 산 효령대군보다 36년 밖에 못살고 떠난 안평대군을 기억한다.

언젠가는 죽음을 피하지 못할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안평대군이 꿈에서 본 무릉도원, <몽유도원도>           

안견의 <몽유도원도>(1447), 좌측 안평대군의 발문에 의하면 안견은 이 것을 3일만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한편 이것은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덴리대학이 소장하고 있다.
 안견의 <몽유도원도>(1447), 좌측 안평대군의 발문에 의하면 안견은 이 것을 3일만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한편 이것은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덴리대학이 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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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있었다는 '비해당'은 그 어떠한 것도 흔적을 남기고 있지 않다. 그런데 안평대군이 스물 아홉 살 어느 날 꿈 속에서 무릉도원을 보았고, 그곳이 하도 기이하여 화가 안견에게 그것을 설명해주고 그리게 한 것이 현재 일본에 남아있는 '몽유도원도'다.

그리고 또 어느 날 비해당 뒤편 도성 밖 인왕산 자락을 찾았다가 그곳이 자신이 꿈 속에서 보았던 무릉도원과 너무도 흡사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안평대군은 그곳에 '무계정사'라는 별장을 지어 머물렀는데 그곳이 바로 자하문 넘어 종로구 부암동 일대이며 그곳에 안평대군이 쓴 '무계동'(武溪洞)이란 새겨진 각자바위가 남아 있다.

종로구 부암동에 위치한 안평대군의 별장인 무계정사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각자바위
 종로구 부암동에 위치한 안평대군의 별장인 무계정사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각자바위
ⓒ 유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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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묘(1447)년 4월 무릉도원을 꿈꾼 일이 있었다. 그러다가 지난해 9월 우연히 유람을 하던 중에 국화꽃이 물에 떠내려 오는 것을 보고는, 칡넝쿨과바위를 더위잡아 올라 비로소 이곳을 얻게 되었다. 이에 꿈에서 본 것들을 비교해보니 초목이 들쭉날쭉한모양과 샘물과 시내의 그윽한 형태가 비슷했다.

그리하여 올해 들어 두어 칸으로 짓고 무릉계라는 뜻을취해 무계정사(武溪精舍)라는 편액을 내걸었으니, 실로 마음을 즐겁게 하고 은자들을 깃들게 하는 땅이다." - 안평대군, '부원운병서'(대통령경호실, <청와대 주변 역사·문화유산>, 407쪽 재인용)

도시개발로 파괴된 수성동계곡을 복원하다

수성동계곡에 지어진 옥인시민아파트 철거 전후의 항공사진
 수성동계곡에 지어진 옥인시민아파트 철거 전후의 항공사진
ⓒ 유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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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1971년 지어진 옥인시범아파트를 2011년 철거하고 복원된 것이다. 이곳 옥인시범아파트의 철거가 논의된 것은 현 창의문 옆에 위치한 '윤동주 시인의 언덕' 자리에 있던 청운아파트가 철거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런데 철거 이유가 청운아파트는 노후한 건물이라는 이유였던 것과 달리 옥인아파트는 인왕산 녹지 일부를 침범하고 있는 것이 주된 이유다. 당시 오세훈 서울시장의 르네상스사업 중 내사산 르네상스의 일환으로 청계천상류를 복원하는 사업으로 고려된 것이다. 따라서 단순 도시자연공원을 조성하는 차원의 철거계획이었다.

아파트를 철거하는 과정에서 찾은 돌다리(우)가 겸재 정선의 <수성동계곡>에 그려진 ‘기린교’로 추정된다.
 아파트를 철거하는 과정에서 찾은 돌다리(우)가 겸재 정선의 <수성동계곡>에 그려진 ‘기린교’로 추정된다.
ⓒ 유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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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같은 인왕산 도시자연공원 추진에 전환을 맞게 된 것은 아파트를 철거하면서 겸재 정선의 그림인 <수성동계곡>에 나오는 '기린교'가 발견된 점 덕분이다. 통 바위로 된 이다리를 시멘트로 덮어 철제난간을 세워 아파트로 들어가는 다리로 이용했던 것이다.
시멘트를 걷어내면 경재정선의 그림 속 기린교와 정확히 일치한다는 점이다. 이 돌다리의 발견으로 개발의 초점은 '인왕산 녹지를 침범하고 있는 아파트'가 아니라 '수성동계곡을 가리고 있는 아파트'로 옮겨간 것이다.

이와 함께 서울시는 수성동계곡과 기린교를 서울시기념물로 지정하는데, 이로써 수성동계곡은 서울시 기념물 중 최초의 자연물이라는 기록을 얻게 된다.

결국 이렇게 변화된 복원방침으로 주민보상에 980억 원, 공원조성에 80억 원을 들여 수성동계곡을 복원해 놓았지만 내가 볼때는 그저 잘 정돈된 조경으로만 보일 뿐 왠지 이곳에서 시간이 느껴지지 않는다.

장소에 내재한 시간의 가치는 사라지고 보여주는 공간에만 집착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여전히 겸재 정선의 <수성동계곡>을 바라보며,추사 김정희의 <수성동 우중에 폭포를 구경하다(水聲洞雨中觀瀑此心雪韻)>라는 시로 이곳 수성동의 옛모습을 상상해야 할 듯하여 추사 김정희의 시를 여기 옮겨 본다.

수성동에서 비를 맞으며 폭포를 보고 심설(沁雪)의 운(韻)을 빌린다.

골짜기 들어오니 몇 무 안 되고, 나막신 아래로 물소리 우렁차다.
푸르름 물들어 몸을 싸는 듯.대낮에 가는데도 밤인 것 같네.
고운 이끼 자리를 깔고, 둥근솔은 기와 덮은 듯.
낙숫물 소리 예전엔 새 소릴러니, 오늘은 大雅誦(대아송)같다.

산마음 정숙하면, 새들도소리 죽이나.
원컨대 이 소리 세상에 돌려,저 속된 것들 침 주어
꾸밈없이 만들었으면.
저녁 구름 홀연히 먹을 뿌리어, 詩意(시의)로 그림을 그리게 하네.


태그:#수성동계곡, #옥류동천, #서촌기행, #안평대군, #비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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