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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와 만화. 이렇게 잘 어울리는 조합이 또 있을까요. 우리는 야구나 축구, 농구를 좋아해 <공포의 외인구단>이나 <슬램덩크> 같은 스포츠 만화에 빠져들고, 거꾸로 만화를 통해 스포츠에 입문하기도 합니다. 1980년대 야구 만화의 추억이 깃든 독고탁을 찾아갑니다. [편집자말]
고 이상무 화백 최근 작품들. 왼쪽부터 <달려라 꼴찌> 2014년 복간본, 성인이 된 독고탁이 등장하는 골프 만화 <이상무의 왕초보 골프 가이드>, 2011년 펴낸 조갑제 원작 <만화 박정희>
 고 이상무 화백 최근 작품들. 왼쪽부터 <달려라 꼴찌> 2014년 복간본, 성인이 된 독고탁이 등장하는 골프 만화 <이상무의 왕초보 골프 가이드>, 2011년 펴낸 조갑제 원작 <만화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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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한 부고 기사가 옛 추억을 일깨웠다. '독고탁의 아버지' 고 이상무 화백이 지난 1월 3일 작업 도중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향년 70세. 본명은 박노철이지만 우리에겐 이상무란 필명이 더 친숙하다.

매달 어린이잡지 보는 재미에 빠졌던 1980년대, <소년중앙> <어깨동무> <새소년>에 딸린 만화 별책부록은 하나같이 잡지보다 두꺼웠다. 당시 이상무, 허영만, 이현세로 대표되는 3대 야구 만화가들 가운데서도 '짱구머리' 독고탁이 등장하는 야구 만화 '달려라 꼴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한국 프로야구 출범 직후인 1982년 <소년중앙>에 연재를 시작한 '달려라 꼴찌'는 32년 만인 지난 2014년 10월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서 복간하기도 했다. 복간본은 지난 82년부터 88년까지 6년에 걸쳐 연재한 1, 2부 가운데 고교야구를 배경으로 한 1부만 6권에 담았다.

30년 만에 돌아온 '달려라 꼴찌', 시대 초월한 야구 열정

'달려라 꼴찌'는 독고탁이 이상무 화백의 고향이기도 한 경북 김천을 떠나 서울로 오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키는 작지만 빠른 발과 타고난 야구 감각을 지닌 독고탁은 우수고등학교 야구부 후보 선수로 출발하지만 타자 앞에서 S자로 휘어 들어가는 '드라이브 볼'과 같은 마구(변화구)로 고교야구 스타로 발돋움한다.

교복 자율화 이전 새까만 교복 차림에 빡빡 깎거나 땋은 머리, 기차 내부나 주택, 거리 풍경 등은 어색하지만 이야기 흐름은 요즘 보기에도 손색이 없다. 야구란 소재만 빼면 1978년 작품 <비둘기 합창>에서 나타난 이상무 화백 특유의 휴머니즘이 가득하다. 일찌감치 부모를 잃고, 포장마차에서 국수를 팔아 자신을 뒷바라지하는 동생과 단 둘이 어렵게 살아가는 탁이지만 당시 유행하던 '명랑만화' 주인공처럼 늘 장난기 넘치면서도 남을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을 지닌 국민 캐릭터다.

그에게 드라이브 볼을 가르친 조규식은 한때 잘나가던 명투수지만 경기 도중 완성되지 못한 마구를 던져 독고탁의 아버지를 숨지게 만든 뒤 폐인이 돼 집밖을 떠돈다. 그가 아버지의 '원수'인 줄도 모르고 마구를 배운 독고탁은 조규식의 아들인 우수고 4번 타자이자 포수인 조봉구와 배터리를 이루고, 딸인 슬기에게 치기어린 연애 감정을 품으면서 결국 '양가'가 극적으로 '화해'한다. 이상무 화백의 1966년 데뷔작도 원수 가문을 그린 '로미오와 줄리엣'을 모티브로 한 꽁트 만화 '노미호와 주리혜'다.

이상무 야구 만화 <달려라 꼴찌> 한 장면. 조규식이 개발한 '드라이브 볼'과 날쌘돌이 독고탁의 활약상.
 이상무 야구 만화 <달려라 꼴찌> 한 장면. 조규식이 개발한 '드라이브 볼'과 날쌘돌이 독고탁의 활약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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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야구 만화는 역시 야구 경기 장면을 빼놓을 수 없다. 이 작품에는 '드라이브 볼'뿐 아니라, 먼지를 일으켜 타자의 시야를 방해하는 '더스트 볼'과 타자 앞에서 땅에 닿은 듯 튀어 오르는 '바운드 볼'과 같은 이른바 '독고탁의 3대 마구'가 등장한다. 실제 야구에서는 불가능하지만 최동원, 장명부 같은 '초능력 투수'들이 건재하던 시절이라 어린 야구팬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독고탁-조봉구 배터리는 우수고를 고교야구대회 최고봉에 올린 뒤, 한일 고교야구 대결에서 재일 한국인 선수들이 활약한 일본 선발팀을 꺾는다. 프로야구를 배경으로 한 2부 내용 독고탁과 조봉구가 신생 구단인 '패거리들'에 입단해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고 일본 프로야구팀까지 꺾는다는 줄거리다. 이처럼 한일 야구 대결로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한편 인종차별이나 재일 한국인 2세의 정체성 등 사회적 문제를 가미하기도 했다.

키 작은 까까머리 독고탁이 처음 등장한 작품은 1972년작 '주근깨'다. 이후 '우정의 마운드'(1976), '비둘기 합창'(1978), '아홉 개의 빨간 모자'(1981), '달려라 꼴찌'(1982) 등 이상무 만화에서 거의 빠짐없이 등장한다. 1980년대 중반엔 '태양을 향해 던져라'(1983)를 시작으로 '내 이름은 독고탁'(1984), '다시 찾은 마운드'(1985), '비둘기 합창'(1988) 등이 잇달아 TV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돼 '국민 남동생'으로 거듭나게 된다.

골프로 전향한 독고탁, 1990년대 '골프 교과서'로 활약 

이상무 화백은 1990년대 들어 골프 만화를 본격적으로 그렸다. 사진은 <이상무의 왕초보 골프 가이드> 한 장면. 성인이 된 독고탁과 조봉구, 김준 등 야구 만화 주인공들이 조슬기 프로에게 골프를 배우고 있다.
 이상무 화백은 1990년대 들어 골프 만화를 본격적으로 그렸다. 사진은 <이상무의 왕초보 골프 가이드> 한 장면. 성인이 된 독고탁과 조봉구, 김준 등 야구 만화 주인공들이 조슬기 프로에게 골프를 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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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독고탁은 어떻게 됐을까? 인터넷서점에서 이상무 화백 작품을 검색하면 야구 만화들은 거의 없고 대부분 골프 만화다. 야구 선수 독고탁이 1990년대 골프 선수로 전향한 것이다.

1980년대부터 고 고우영 화백 등 다른 만화가들과 골프에 빠진 이상무 화백은 1990년부터<스포츠조선>에 골프 레슨 만화 '싱글로 가는 길'을 5년간 연재한 것으로 시작으로 '세상만사 골프만사'(1997), '운명의 라스트홀'(1999), '이상무의 왕초보 골프 가이드'(2010) 같은 골프 만화를 꾸준히 그렸다.

'골프 만화가' 이상무가 모처럼 집필한 극화는 공교롭게 '만화 박정희'(전3권, 2011, 기파랑)다. 원작이 '보수 논객' 조갑제 전 <월간조선> 대표인 데서 짐작할 수 있듯 '독재자 박정희'의 인간적인 면을 부각시킨 작품이다. 공교롭다는 건 이상무 화백도 1970~1980년대 군사정부의 만화 검열 피해자라는 점이다.

이상무 화백도 이 책 서문에서 "만화는 아동과 청소년에게 무익한 불량문화였기에 윤리위원회의 사전심의 칼날은 어처구니없을 만큼 무자비했다"면서 "핏발선 눈으로 밤을 새워 완성한 원고는 사전 심의위의 칼날에 폐기→수정→재수정을 거치면서 누더기가 되었고, 우리 만화인들은 군사정부에 기진맥진하고 박정희에게 절망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이상무 화백은 지난 2012년 8월 <채널에이> 인터뷰에서도 1970년대 만화 <한국인> 시리즈의 경우 형제간 갈등을 그렸다는 이유로 폐기처분 당해 몇 차례 재수정을 거쳤을 정도로 만화 검열이 심했다고 털어놨다.

군사정권 만화 검열에 시달린 이상무 화백, 박정희 재평가? 

고 이상무 화백, 지난 2012년 8월 채널에이 인터뷰 당시 모습
 고 이상무 화백, 지난 2012년 8월 채널에이 인터뷰 당시 모습
ⓒ 채널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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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가 말년에 왜 박정희 만화를 그리게 된 것일까? 이 화백은 당시 인터뷰에서 "한창 활동할 때 만화 심의가 강해 많은 애로가 있었고 군사정부와 박정희에 대한 반발도 있었다"면서도 "지나서 보면 우리가 걸어왔던 길이 놀랍고 대한민국이 그럭저럭 잘 굴러왔다고 생각했고 그런 시각에서 박정희를 다시 보니 반대했던 나도 장점 쪽으로 기울어졌다"고 밝혔다.

그때 마침 출판사에서 박정희 일대기를 만화로 만들자고 먼저 권유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책 내용은 박정희 전 대통령 행적에 대한 비판보다는 칭송 일색이다. 박정희가 한때 공산주의에 심취했던 청년 시절은 제쳐 두고, 5.16 쿠데타와 대통령 재임기만 살펴봐도 그렇다.

"박정희. 그는 지금까지 크고 작은 생의 고빗길에서 나름의 뚝심과 결단으로 오늘에 이르렀다. (중략) 지금도 그는 이렇게 주저함 없이 혁명의 새벽을 가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 길이 대한민국 근대화의 새벽인 것을 그는 알고 있었을까?"('이상무의 만화 박정희' 상권, 14-15쪽)
1961년 5.16 쿠데타 당시 상황을 묘사한 이상무 '만화 박정희' 상권 도입부.
 1961년 5.16 쿠데타 당시 상황을 묘사한 이상무 '만화 박정희' 상권 도입부.
ⓒ 김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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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1961년 5.16 쿠데타로 실각한 장면 정부에 대해선 "법적인 정통성은 있었지만 도덕적인 정통성은 상실한 정부였다"(만화 박정희 중 197쪽)면서 쿠데타를 사실상 정당화했다.  

1965년 한일 수교 반대 시위와 베트남 파병도 마찬가지였다.

"시위를 부추기는 정치인과 지식인에 대해 박정희는 한국 정치의 분열성과 지식인의 단견에 절망한다. (중략) 박정희는 즉시 군을 풀어 학생 시위를 진압하고 한일 수교를 매듭 짓는다. (중략) 그 결과 한일수교와 월남 파병을 단행한 65년부터 한국은 경제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키게 된다"('만화 박정희' 하권, 98-101쪽)

박정희 장기 집권을 촉발한 1972년 유신헌법에 대해서도 미국과 중국의 화해 무드에 위기의식을 느낀 불가피한 선택이었음을 강조하고 당시 치열한 반유신 운동에 대해서도 "재야와 학생들의 반발은 예상대로였고 민심 또한 박정희에게서 멀어져 간다"고 서술하는 데 그쳤다.

1973년 김대중 전 대통령 납치 사건도 당시 박정희는 전혀 개입하지 않았고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과잉충성 때문인 것으로 묘사했다. 박 대통령 지시가 있었다는 1980년 이후락 증언도 "이런 주장을 사실로 받아들인다면 박 대통령이 지시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면서도 "그러나 박 대통령을 아는 사람 모두는 박 대통령은 비밀리에 납치하고 구금하는 스타일이 아니라고 입을 모은다"고 일축했다.

박정희의 최후도 "죽음 앞에서도 태연자약한" 초인으로 그릴 뿐 아니라, '독재자'란 역사적 평가도 반박한다.

"박정희의 꿈은 자주적 근대화를 통한 민족중흥이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권력과 부패의 늪에 발을 담그고 사방의 적으로부터 공격을 당했다. (중략) 민주주의 경험이 한 세대도 안 되는 이 나라에서의 서구적 선진 민주주의를 그대로 하지 않는다고 박정희를 독재자로 몰았고, 그래서 그는 독재자였다."('만화 박정희' 하권 199쪽)

물론 이 같은 내용은 대부분 원작인 조갑제의 <박정희 결정적 순간들>(2009, 기파랑)에서 그대로 가져왔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800쪽에 달하는 책 내용을 간결하게 압축하면서도 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만화 특성을 감안하면 원작이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출판사에서 먼저 집필 권유를 했다지만 결국 고사하지 않은 건 본인의 의지다.

첫사랑 같은 독고탁, 치고 달릴 때가 가장 아름답다

지난 2014년 복간된 이상무 화백의 야구 만화 <달려라 꼴찌>. 1982년부터 <소년중앙>에 연재했던 작품이다.
 지난 2014년 복간된 이상무 화백의 야구 만화 <달려라 꼴찌>. 1982년부터 <소년중앙>에 연재했던 작품이다.

'첫사랑'은 그저 추억으로 간직하는 게 맞는 걸까? 사람은 나이 들게 마련이고, 젊은 시절 혁명가도 얼마든지 '꼰대'가 될 수 있다. 더구나 이상무 화백은 혁명가도 아니었다. 당시 그의 작품에선 가족애와 휴머니즘이 넘쳐 뿐 체제 저항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만화계에선 오히려 당시 유행하던 야구 만화를 '3S(스포츠, 스크린, 섹스)'를 앞세워 군사정권에 대한 불만을 무마하려던 제5공화국 우민화 정책의 산물로 보기도 한다.

아버지를 죽게 만든 원수조차 결국 감싸 안는 '달려라 꼴찌' 독고탁처럼, 한때 서슬 퍼런 검열의 칼날을 들이대던 독재자도, 돌이켜보면 누군가의 아버지처럼 인간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이렇듯 독재자라고 생각했던 인물에 대한 시각이 달라졌다고 해서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 다만 독재자를 경제를 발전시킨 초인으로 미화하는 작품을 그리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그라운드든 필드든, 독고탁은 치고 달릴 때가 가장 빛나고 아름답다.


달려라 꼴찌 1부 1~6 세트 - 전6권

이상무 지음, 한국만화영상진흥원(2014)


태그:#독고탁, #이상무, #달려라 꼴찌, #야구만화, #만화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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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사회부에서 팩트체크를 맡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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