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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오후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지난 17일 새벽 노래방 화장실에서 발생한 살인사건 피해 여성을 추모하는 인파가 몰렸다. 추모를 위해 강남역을 찾은 시민들은 추모의 글을 적은 메모지를 붙이거나 헌화를 했다.
▲ 국화 한다발의 추모 18일 오후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지난 17일 새벽 노래방 화장실에서 발생한 살인사건 피해 여성을 추모하는 인파가 몰렸다. 추모를 위해 강남역을 찾은 시민들은 추모의 글을 적은 메모지를 붙이거나 헌화를 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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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새벽 1시, 나는 살아 있었다. 집에 가기 위해 초여름의 차가운 밤공기를 가르며, 몇몇 가게가 내뿜는 불빛에만 의존하는 어두운 골목의 초입에 섰다. 누군가 나에게 다가오는 소리를 듣지 못할까 봐 귀에 꽂았던 이어폰을 빼고 듣고 있던 음악도 껐다. 치마와 옷깃을 단정히 하고 골목길을 걷기 시작했다.

가다 보니 내 옆에 두 개의 그림자가 보였다. 사람이 있는 줄 알고 무서워서 돌아봤다. 하지만 그 그림자들은 모두, 다른 방향의 불빛이 만들어낸 내 그림자였다.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앞서가던 여자는 내 구두 소리를 들었는지, 나를 봤다. 그 공포감을 이해하기에 일부러 걸음의 속도를 늦췄다. 여자는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빠르게 사라졌다. 나도 그녀처럼 집에 갈 때까지 앞과 뒤를 번갈아 경계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새벽 1시 15분, 나는 살아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내 시간은 계속됐다. 하지만 다른 장소에 있던 그녀의 시간은 새벽 1시에 멈췄다. 피의자가 그녀의 시간을 몽땅 빼앗았다고 했다.

강력범죄 피해자 10명 중 8명이 여성... 나는 밤길을 걸을 때 옷깃을 여민다

여성가족부와 통계청이 발간한 '2013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 보도자료에 따르면 살인, 강도, 방화, 강간 등 강력범죄에서 피해자 10명 중 8명은 여성 피해자다.
 여성가족부와 통계청이 발간한 '2013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 보도자료에 따르면 살인, 강도, 방화, 강간 등 강력범죄에서 피해자 10명 중 8명은 여성 피해자다.
ⓒ 2013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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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은 피의자의 꿈이 '목사'라고 했다. '목사'라는 직업이 가진 선함과 이번 범행의 잔인성을 비교해 범행을 강조하려는 것인지, 늘 그랬듯, 피의자가 '순간의 실수'를 저질러 그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을 말하려 한 것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피의자가 여자의 생명과 꿈, 시간 그리고 미래를 살해했다는 거다. 여자가 또 사라졌다.

피의자는 "여자라서 죽였다"고 했다. 하지만 '특별할 것 없는' 살해 동기다. 여자들은 늘 살해 당하고 있었다는 것을 당신은 모른다. 살인, 강도, 성폭행 등 강력범죄의 피해자 대다수는 여성이다. 가해자도 아는 거다. 여성이 자신보다 아래에 있는 존재임을. 그래서 결과적으로 대다수는 '여성'이기에 살해를 당했고 이번 사건의 피의자는 자신의 입으로 그 말을 직접 꺼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누군가는 말한다. "그러니까 왜 새벽 1시까지 놀아. 집에 빨리 들어갔어야지!"라고. 하지만 이런 말들은 여성들의 자유를 제한할 뿐더러, 무엇보다 피해자에게 그 책임을 돌리는 말이라는 것을 당신은 모른다.

'새벽 1시까지 놀 수 있는' 여자들의 밤과 자유는 누가 쓸어 갔을까. 새벽 1시까지 술을 마셨다는 이유로, 공중 화장실에 있었기 때문에 범죄의 대상이 되지 않고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 놀러 나갈 수 있는 자유. 낮에 놀았던 것처럼 밤에도 행동할 수 있는 자유는 어디에 갔을까. 애초에 있기는 한 것인가. "얘는 남자라서 괜찮지만, 너는 여자라서 위험하니까 집에 빨리 들어와라"는 말에 많은 여성들이 수긍하도록 만들고, 조심할 것은 나의 행동뿐이라고 생각하도록 한 것은 무엇인가.

그럼 그들의 말처럼, 여성이 일찍 집에 들어가면 안전할까? '홈 스위트 홈'이라는 곳에서, 친부나 친족이 행하는 강간, 성폭행, 살인, 가정폭력을 겪는 여성이 아직도 많다. 신체적 폭력뿐만 아니라 욕설, 폭언과 같은 언어적 폭력에 시달리는 여자도 즐비하다.

게다가 가정 내에서의 일은 '사생활'로 여겨지기에, 국가는 개입하길 꺼린다. 어쩌다 피해자가 신고하더라도 '좋게 해결하자'는 말과 함께 피해자에게 합의를 종용하기 일쑤다. 피해자와의 합의를 끌어낸 방법을 나열한 글을 읽어 보면 알 수 있듯, 신고 이후 피해자가 주위의 쑥덕거림과 합의 종용 때문에 겪는 2차 가해는 '덤'이다.

집조차도 안전하지 않은데... 우리의 불안은 망상이 아니다

여성가족부와 통계청이 발간한 '2013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 보도자료에 따르면, 여성긴급전화(1366)의 가장 많은 상담내용은 '가정폭력'이다. '즐거운 나의 집'의 현주소다.
 여성가족부와 통계청이 발간한 '2013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 보도자료에 따르면, 여성긴급전화(1366)의 가장 많은 상담내용은 '가정폭력'이다. '즐거운 나의 집'의 현주소다.
ⓒ 2013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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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 사람은 여성이 '너무 예민하고 피해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예민하고 촉각을 곤두세워야 어두운 밤의 골목을 살아 나갈 수 있다. 통계가 증명하듯 대다수 강력범죄가 여성을 향하기 때문에 '피해의식'을 가지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그들은 이것이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임을 인정하지 않고 여성이 겪는 불안감을 '지나친 반응'이라고 치부한다.

17일 새벽 1시, 나는 살아 있었다. 하지만 '운'이 좋아서 살아 있었다는 것을 알고 '여성'이기 때문에 언제까지 살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 인간의 생명은 존엄하기에 그 생명권을 타인이 빼앗아 갈 수 없다고들 한다. 여자도 인간이다. 우리에게도 '살 수 있는 권리'를 달라.


태그:#17일새벽1시, #운이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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