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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치과 진료에 따라갔다.
 아버지의 치과 진료에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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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이네요. 오른쪽 부분 임플란트 하신 게. 아, 그리고는 정기검진을 안 받으셨구나. 임플란트 하시고 6개월 아니면 최소 1년에 한 번은 오셔서 괜찮은지 보셨으면 좋을텐데요."

5년전 보다 조금 더 흰머리가 늘어난 의사 선생님은 아쉽다는 듯이 중얼거리셨습니다.

"아버님, 앞니는요? 여기 앞니는 안 아프셨어요? 앞니가 다 썩었는데, 괜찮으셨나?"
"어으응… 괘안아써(괜찮았어)."

지난주 아버지를 모시고 치과에 다녀왔습니다. 5년 전엔 돌도 씹어 드실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하게만 보였던 임플란트가 아버지의 무관심과 소홀한 관리로 잘못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는 의자에 누워 잎을 크게 벌리셔서 대답하기 쉽지 않으셨을 텐데도 마치 어린아이가 선생님 질문을 놓치지 않고 대답하려고 애쓰는 것처럼 대답도 잘하셨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이어진 질문엔 대답을 망설이셨습니다.

"아, 앞니가 썩어서 아프시니까 오른쪽으로만 씹으셨나봐요. 그래서 임플란트가 부러졌구나. 그러셨네…. 그럼, 임플란트는 뺐다가 새로 조이고, 거기다가 앞니도 치료하셔야 할 것 같아요. 그냥 두면 다 뽑아야 해요. 어떻게 하시겠어요?"
"…."

대답 없는 아버지... "치료해주세요"

무슨 일인지 아버지는 아무 대답도 없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또박또박 잘 대답하시던 분이 맞나 싶을 정도입니다.

"치료…, 해야죠. 치료해주세요."

이번 질문은 대답하기가 좀 어려우셨나 봅니다. 의자에 누울 때는 괜찮았는데, 뭔가 하자고 하면 깨닫는 진실. 거금이 필요하다는 걸 아버지께선 금방 알아채셨습니다. 어쩔 수 없이 이번 문제의 답은 아버지 곁에 서 있던 딸인 제가 외쳤습니다.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뭐하러 따라오느냐"라고 핀잔을 주던 딸의 존재감. 아버진 그제야 눈을 위로 크게 떠 딸을 쳐다보며 안도의 표정을 지으십니다.

"그럼, 치료합니다. 보호자분은 나가서 기다려주세요."

의사선생님 말씀에 조용히 나와 대기실 소파에 가 앉았습니다.

연세가 들어 툭 하면 어디가 아픈 부모님들, 어디가 고장 나 심하게 아파도 그냥 참고 버텨야지 생각하는 노인들이 속상했습니다. 그나마 이렇게 챙겨드릴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입니다. 다음달부터 치료비 할부금이 꽤 나오겠네 등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야! 나 치료 끝났다. 일어나라!"

소파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제가 잠든 것처럼 보였는지 치료를 마치고 나온 아버지가 저를 흔들어 깨웠습니다. 잠깐인 것 같았는데, 워낙 연세도 많고 부러진 임플란트를 다시 빼내고 치료하는 게 쉽지 않아서 치료는 1시간도 넘게 걸렸습니다. 걸린 시간만큼이나 고생하셨는지 마취해서 괜찮다고 하시면서도 오른쪽 볼은 툭 불거져 나올 정도로 부어 있었습니다.

서울에 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아버지

아버지가 좋아하는 날이다. 빨간 동그라미 쳐진 날.
 아버지가 좋아하는 날이다. 빨간 동그라미 쳐진 날.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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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을 빠져나와 곧장 버스정류장으로 향했습니다. 평소 같으면 병원 진료 후 꼭 아버지가 좋아하는 스테이크를 먹으러 페밀리레스토랑에 갔을 텐데. 그날은 1시간 반 정도 마취가 풀릴 때까지 기다렸다 식사할 수 있다고 해서 그냥 집으로 가신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이렇게 병원 정기검진 차 서울에 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립니다. 달력에 빨간 글씨로 '병원 가는 날'이라고 적어 넣고는 동그라미를 두세 개 그려넣기도 하십니다. 아버지에게 그날은 간만에 서울나들이도 하고 외식을 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평생을 월급쟁이로 살면서 버스 타고 바쁘게 오갔던 그 길을 이젠 나들이 삼아 슬슬 걸어다닐 수 있어 좋다면서 신나 하십니다.

<개구리 왕눈이>에 나오는 아로미의 아빠 '투투'처럼 부푼 볼을 하고 앉아계셔 괜히 안쓰러워 보이는 아버지는 뭔가 그리 좋으신지 싱글벙글입니다. 그 좋아하는 '스떼끼'를 드시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정류장 의자에 앉아 계신던 아버지가 갑자기 말을 꺼냈습니다.

"시골에 있는 집이랑 논밭 같은 거 중에 너 갖고 싶은 거 있음 말해."

내가 잘못 들었나? 지금 뭐라고 하셨나?

"엉? 아부지, 뭐라고요?"

재산의 많고 적음을 떠나 어려서부터 재산은 무조건 하나뿐인 아들에게 줄 것임을 강조하신 우리 아버지가 지금 뭐라고 하셨는지. 듣긴 들었는데 제가 들은 그 말이 맞는지 궁금해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 씩 웃으시며,

"못 들었냐? 못 들었음 말아라!"

아버지의 깜짝 발언... 혼자서 막 웃었다

이렇게 말씀하시곤 버스에 훌쩍 올라타셨습니다. 그리곤 버스기사 옆 맨 앞자리에 앉아 손을 흔들고 계십니다. 몇십 년 출퇴근하실 때나 지금이나 운전사 옆 맨 앞자리가 제일 좋다는 아버지는 연신 웃는 표정으로 버스가 떠나기 전까지 '빠이빠이'를 신나게 하셨습니다. 멀어져가는 버스를 보며 '방금 뭐였지?' 하다가 혼자서 막 웃었습니다.

다음 달부터 나올 치과 치료비 할부금 어찌 메우나 싶었던 걱정을 아버지의 농담 같지 않은 농담 덕분에 툭 털어버렸습니다. 조금 늦게 발견했어도 치료하면 괜찮다는데, 치료 하고 그냥 고기든 뭐든 꼭꼭 잘 씹어드시기만 하면 좋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치과 치료 때문에 아버지는 대여섯 번 상경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또 앞으로 1년에 한두 번은 치과 정기검진도 받으셔야 하고요. 캬아~ 우리 아버지 신나시겠습니다. 아마도 지금 돌아가시면서 달력에 동그라미 친다고 빨간 매직 몇 개 사갈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의 빨간날, 아버지도 좋고 딸도 좋은, 그저 좋기만 한 날입니다.


태그:#빨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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