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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들이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자, 손을 높이 들고 기뻐하는 이광복 화백.
 관객들이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자, 손을 높이 들고 기뻐하는 이광복 화백.
ⓒ <무한정보신문> 장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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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웃고, 웃고, 또 웃었다. 함께 모인 사람들도 덩달아 웃었다. 그가 뿜어내는 열정과 끼, 천진난만함에 매료돼서, 그와 함께 하는 시간이 행복해서.

사과 한알에도 영혼을 담는 세계적인 화가, '이광복- 50년만의 귀향' 공주문화원 초대전이 열린 지난 4월 6일은 마침 그의 칠순 생일이었다.

기왕이면 "생일날 그림도 보여드리고, 즐겁게 해드리고, 진지도 대접해드리면 좋겠다"고 주인공인 이광복 화백이 자청한 날이란다.

그는 사과그림이 사방에 걸린 전시실 가운데서 춤을 췄다. 그리스 전통춤으로 유일한 남성독무라고 했다. 조명이 모두 꺼지고 전시장 한가운데 밝혀진 촛불 하나. 힘찬 스텝과 함께 강렬한 춤이 펼쳐졌다. 그의 표정과 손짓, 몸짓들이 보는 이들의 마음을 두드렸다.

부모가 이혼한 가정에 남겨진 것은 장남으로서의 의무 뿐. 뛰어난 재능은 15년이란 긴 세월을 동생들 뒷바라지에만 쓰여야 했다. 1982년 '창작 창조미술 대전' 입상. 세상은 그를 알아봤고, 그는 꿈을 찾아 유럽으로 떠났다. 파리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런던, 플로렌스를 거쳐 정착한 아테네. 늦은 만큼 귀하게 시작된 공부는 하루 16시간씩 그림에 매달리면서도 감사한 마음과 겸손한 자세를 갖도록 했다.

그의 춤사위에는 전쟁터로 나가기 전의 심정을 춤으로 표현한 그리스인과 다름 없었을 가난한 한국화가의 고단한 삶이 담겼다. 그는 노래도 불렀다. 귀향을 한 뒤 다니기 시작한 노래교실에서 배운 솜씨라는데, 혼신을 다하는 그는 그 시간 가수가 됐다.

시끌벅적 덕담들이 오가고, 생일축하 노래와 케이크가 등장하고, 흥에 겨운 개장식인지라 '깜빡 잊었던' 기념테이프커팅이 한바탕 웃음과 함께 제일 마지막에야 진행됐다. 사람들은 화가가 내는 저녁식사자리로 우르르 몰려 갔다.

'세계적인 화가의 귀향'에는 어떤 권위도, 전제도, 기획도 없었다.

대가와 고향이 만나는 법

중동성당이 보이는 벽면을 뚫어 창을 낸 이광복 화백의 화실.
 중동성당이 보이는 벽면을 뚫어 창을 낸 이광복 화백의 화실.
ⓒ <무한정보신문> 장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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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사과화가가 이웃 공주에서 귀향전시회를 여니 '사과의 고장 예산'에서 관심 가질만 하지 않겠냐"는 제보를 받고 긴가민가 하며 기웃거린 판은 많은 시사점을 줬다.

무엇보다 대가는 겸손했다. '니들이 예술을 알아?'하는 식의 '젠 체'가 없었고, 지역에 무엇을 요구하기에 앞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먼저 살폈다. 함께 즐기며 예술의 자유로움과 열정을 느낄 수 있도록 안내했다.

지역사람들은 또 어떤가. 풀꽃시인으로 유명한 나태주 공주문화원장을 비롯해 내로라하는 지역문화예술인들이 열일 제쳐두고 달려왔다. 지자체 간부공무원, 학계, 문화단체 회원들도 함께 했다. 격식을 버린 개관식은 잔치가 됐다. 저마다 공주가 낳은 세계적 화가의 귀향을 기뻐하며 자리를 즐겼다.

충남 예산출신 미술관 건립과 관련해 볼멘소리만 가득한 채 여러해 째 접지도 못하고 나아가지도 못하고 있는 예산지역의 문제가 새삼 아프게 다가왔다. 따로 인터뷰를 하게 된 것은 그 때문이다.

제보자의 말대로 '사과'하면 '예산'이므로, 지역을 넘어 저명한 '사과화가'를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하기도 하거니와, 금의환향하는 대가와 지역이 어떤 자세로 만나고 상생해야 하는지 그에게 묻고 싶었다.

그와의 인터뷰는 그로부터 20일 뒤인 4월 26일에 이뤄졌다.

화실 한켠에 놓인 사과. 과도는 있지만, 이 화백은 그림의 모델이 된 사과는 "영혼의 작업"을 한 대상이어서 먹지 않고, 썩어서 자연으로 돌아갈 때까지 둔다고 한다.
 화실 한켠에 놓인 사과. 과도는 있지만, 이 화백은 그림의 모델이 된 사과는 "영혼의 작업"을 한 대상이어서 먹지 않고, 썩어서 자연으로 돌아갈 때까지 둔다고 한다.
ⓒ <무한정보신문> 장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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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고풍스런 공주 중동성당 아래, 다닥다닥 이마를 맞대고 있는 주택들 중 하나인 평범한 2층집에서 살고 있었다. 제대로 된 마당도 없이 겉보기에 전혀 예술가의 집 같지 않은 그 곳으로 안내하면서 그는 으쓱했다.

"원래는 중학동 고향집을 사려고 했죠. 근데 가보니까 오피스텔도 짓고 다른 사람들이 잘 살고 있으니, 거길 사서 뭐하겠어요? 내가 가톨릭 신자라 어려서 중동성당에 많이 왔거든? 그래 여길 왔더니 바로 아래 집이 났다고 해서 보지도 않고 계약했어요. 얼마나 좋아요. 참 감사한 일이지"

그는 2층 화실로 올라가기 전, 1층 살림집으로 먼저 안내했다. "나를 알려면 다 봐야지"라며 이혼한 부모·특별한 인연이 있는 양부모·부인과 아들 사진, 심지어 옷장 속까지 모두 보여줬다. 아픈 가족사도 스스럼없이 공개했다. 문득 전시회 도록에서 읽은 나태주 시인의 "고향이기 때문에 돌아왔고, 성숙했기 때문에 돌아왔다"는 글귀가 떠올랐다.

편가르기는 바보 같은 일

"예산사과 잘 알죠. 맛 있죠. 그런데 기후 때문에 사과생산지가 점점 북쪽으로 올라간다니 걱정이지요?"

30년 넘게 고국을 떠나 있던 화가가 국내 과수산업에 대해 어찌 그리 잘 아는가.

"세계적으로 3000종이 넘는 사과가 있는데, 사과 그림을 제대로 그리려면 사과에 대해서도 연구해야 해요."

화실에는 전시장이 작아 미처 걸리지 못한 사과그림들이 많다.

무려 7년동안 각자 다른 캔버스에 그려 넣은 사과그림 366개가 발표된 날, 아테네국립미술대학은 그에게 졸업생 최고의 영예를 수여했다. 전시장의 분위기, 목적에 따라 거는 위치가 항상 다른, 그래서 '살아있는 모자이크'라고 불린다는 바로 그 작품이다.

365개의 사과가 전시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매일 매일 고향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과 영혼을 담아 사과를 한알 한알 그렸을 작가의 마음이 보이는 듯 하다.
 365개의 사과가 전시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매일 매일 고향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과 영혼을 담아 사과를 한알 한알 그렸을 작가의 마음이 보이는 듯 하다.
ⓒ <무한정보신문> 장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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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개 사과(윤년이 있는 해는 366개)는 하루 하루라고 이해해도 좋고, 서로 각자인 인간세상하고 같다고 이해해도 좋습니다."

얼핏 단순한 것 같지만, 정통 회화기법에 충실해 "영혼을 담는" 그의 사과그림들은 사무치는 그리움, 한의 결정체다.

"아침, 점심에 사과를 먹을 정도로 좋아했어요. 그리스에서는 한국처럼 사과를 크고 좋게만 키우는 게 아니라, 생긴대로 키워서 작고 울퉁불퉁한 것들도 많아요. 가난한 유학생에게 부담없는 과일이었지. 그런데 어느 날 선잠을 깨 책장 위에 놓여있던 사과의 아름다운 실루엣을 보게 된거죠. 어렸을 적 햇볕을 받은 고향집 기왓장이 서로 다른 색을 냈듯, 내 사과 그림 배경은 같은 게 하나도 없어요. 그때부터 31년째 사과를 그리고 있으니 어떻게 보면 미친놈이죠?"

고향집 잿빛 기와를 닮은 사과 빛깔은 색의 삼원색과 빛의 삼원색, 파스텔톤, 썩어 소멸해가는 모습까지 수천종에 이르는 사과처럼 분화했다. 유화물감, 템페라, 오일파스텔, 아크릴 등 재료도 다양하다. 그렇게 그는 지금까지 수천점이 넘는 사과를 그렸다. 어디 사과 뿐이랴, 누드화부터 비잔틴미술까지 10년여에 걸친 치열한 공부는 그를 끝내 세계적인 경지에 올려놓았다.

예산사과도 그리고 싶다

그에게 '귀향'은 어떤 의미일까.

"내 인생에서 고향에서 산 20년 빼고는 추억이 없어요. 유학을 가기 전까지 15년은 동생들 가르치느라, 유학을 가서는 뒤늦게 공부하느라 참 고달프게 살았거든. 그래서 내 고향 공주가 정말 꿈에도 그리웠어. 여생을 고향에서 작품하려고 들어왔지만, 내 작품만 할 수는 없어요. 날 낳아준 한국과 날 키워준 그리스. 두 나라를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나는 그걸 생각해요. 그리스가 지금은 경제위기로 어렵지만, 조상이 남겨놓은 문화예술 덕분에 후손들이 잘 살았고, 복지도 잘 돼 있어요. 그래서 그 사람들은 테크놀로지의 시대는 끝난다, 결국 부가가치는 예술에서 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요. 내게 50년 프로젝트, 100년 프로젝트 구상이 있어요. 사과를 테마로 한 문화예술작업. 그 생각하면 잠이 안와요. 물론 내 생전에 볼 수 없겠지만, 누군가 이어가면 되지 않겠어요?"

그는 공주학연구원과 공주대학교 등에서 초청강연을 하기도 했다. 일반 주민과 비전공자에게 전한 이야기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무한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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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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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제일 화가 나는 게 공주사람 따로 있는 듯 얘기하는 거예요. 주민등록 옮기는 즉시 공주사람이지, 태어나면서부터 금테 둘렀나? 공주사람이라고? 그게 편가르기예요. 스마트폰 있지, 인터넷 있지, 세계가 어떻게 가고 있는데, 다 동네고 이웃인데 바보 같아요. 그래서 내가 가는데 마다 꼭 그 얘기는 해요. 예산도 그래요? 우리 이거 없앱시다"

그는 배우는 시간을 아끼지 않는다. 칠순의 나이에도 호기심 천국인 그는 현재 노래(트로트)와 꽹과리, 시문학을 배우고 있다. 그냥 술렁술렁 하는 것도 아니다. 노래 하나를 배워도 거기에 푹 빠지려고 노력하고, 그 가수보다 더 잘하고 싶어한다.

"나이 70이면 30같이 못사나요?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사는데, 일생동안 살면서 다 못 배우는데 뒷짐지고 폼 잡고 살면 뭘해요? 난 그러기 싫어요. 특히 우리 같은 화가는 화폭을 통해 감동주고, 순화시키고, 모자란 거 채워주는 게 의무예요. 그러자면 화가가 모든 분야에서 많이 배워서 그걸 녹여냈을 때 영혼작업이 가능한 거예요."

그래서 그는 하루가 너무 짧고 감사하다고 한다. 벅차도 즐겁단다.

그는 이번 전시도록에 유일하게 이력을 쓰지 않았다. 그저 '걷다 달리다 쉬어가다 그리고 날다'라고만 했다. "그게 내 이력이야. 현재? 날기 위해 쉬는 거죠"

그래도 세계적인 화가가 귀향을 했는데, 어떤 형태든 자신과 관련한 기념사업을 내심 바라고 있는 건 아닐까?

"나도 뒷짐지고 '에헴' 할 줄 알아요. 하지만 안해요. 겸손은 남을 편하게 해주는 거죠. 사업은 그들이 필요하면 하는 거지, 내가 요구할 건 없죠. 나는 그들이 필요로 했을 때 적극적으로 함께 하면 돼요. 각자 형편이 있으니까요. 시도, 국가도 어려운데 먹이고 살리고 다 해놓고 조금씩 절약해서 하는 거지 내 위주로 하면 되겠어요? 과정이라는 게 있는 거니까."

그는 "예산사과 과수원 주인하고 알게 되면 거기서 한달이고, 두달이고 예산사과를, 사과나무를 그려보고 싶다"고 했다.

사과의 고장 예산과 세계적인 사과화가와의 상생이 올 가을, 우리지역 어느 과수원에서 이뤄진다면 얼마나 근사하겠는가.

덧붙이는 글 | 충남 예산에서 발행되는 지역신문 <무한정보신문>과 인터넷신문 <예스무한>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사과화가, #이광복, #귀향, #예산사과, #예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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