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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본토 최고봉인 휘트니산(Mount Whitney, 해발 4421m)은 남다른 기억이 있다. 그러니까 5년전 요세미티에서 출발하여 350km 걸어서 존 뮤어 트레일 종주를 마치고 닿은 곳이 휘트니산이었다. 휘트니 정상에서 내려다 본 광활한 하이 시에라(High Sierra, 캘리포니아의 3000미터 이상 고지대가 이어진 산맥으로 시에라 네바다라고도 부른다)가 여전히 눈에 선하기 때문이다.

휘트니산 정상에서 바라본 하이 시에라
 휘트니산 정상에서 바라본 하이 시에라
ⓒ 이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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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트니산으로 가는 길

사실 휘트니산의 등반 시즌은 대부분 눈이 녹는 6월부터 9월까지다. 그러나 우리 일행은 4월 21일 휘트니 등반을 위해 길을 나섰다. 좀더 모험적인 등반을 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고, 4월까지는 휘트니산 정상을 오르기 위해 사전 허가를 받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다만 안전사고 등을 대비하여 론 파인에 있는 동부 시에라 방문객 센터 (Eastern Sierra Visitor Center )에 들러 등반 계획과 비상연락처 등을 신고하고 휘트니 포털로 향하였다.

휘트니 포털 야영장에서 등반 계획을 점검 중인 대원들
 휘트니 포털 야영장에서 등반 계획을 점검 중인 대원들
ⓒ 이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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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트니 등반을 위해서는 휘트니 포털까지 차량으로 이동한 후 약 10km 정도거친 산길을 걸어 올라가야 한다. 휘트니 포털은 휘트니 트레일의 시작점이기도 하고 존 뮤어 트레일이 끝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야영장과 주차장 시설을 갖춘 휘트니 포털은 해발 약 2400m에 있다. 본격적인 암벽등반을 위한 베이스 캠프인 어퍼 보이스카웃 호수(Upper Boyscout Lake)는 약 3500m 지점에 있으므로 고도 약 1100m 정도를 올라가야 한다.

그곳은 아직 겨울이었다

첫날 일정으로 휘트니 포털에서 야영을 한 우리는 이른 아침 길을 나섰다. 트레킹 시즌이 아닌 탓에 산길은 한산했다. 강렬한 태양이 내리쬐는 트레일을 따라 오르다가 수목한계선인 3000m 정도 고도에 이르자 설계면(雪溪面, 깊은 산 골짜기에 겨울이 다 가도록 눈이 녹지 않은 곳)이 나타났다.

3,500m 지점 베이스 캠프로 향하는 대원들
 3,500m 지점 베이스 캠프로 향하는 대원들
ⓒ 이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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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일은 눈 속에 파묻혀 뚜렷하지 않았으나 눈 위 발자국이 우리의 갈 길을 안내하였다. 이틀간의 야영 장비와 등반 장비를 챙긴 배낭은 무거웠고, 고도가 높아지면서 고소 증상 때문에 걸음은 더디었다. 고도를 높여가자 멀리 휘트니산의 위용이 조금씩 드러났다. 우리는 한편으로는 탄성을 지르고, 또 한편으로는 압도당하였다.

어퍼 보이스카웃 베이스 캠프

어퍼 보이스카웃 호수의 베이스캠프
 어퍼 보이스카웃 호수의 베이스캠프
ⓒ 이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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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시간 동안의 산행 끝에 베이스 캠프인 어퍼 보이스카웃 호수(Upper Boycott Lake)에 도착하였다. 3500m인 이곳에서 하루동안 고소에 적응한 후 다음날 새벽 휘트니 정상 등반에 나설 계획이었다. 일부 대원이 가벼운 고소 증상을 보였으나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다.

달빛에 드러난 험준한 첨봉들과 베이스 캠프
 달빛에 드러난 험준한 첨봉들과 베이스 캠프
ⓒ 이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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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만에 정상 등정을 마치고 다시 베이스 캠프로 돌아오는 일정이었으므로 우리는 해가 저물자 곧 잠을 청하였다. 마침 보름달이 떠올라 주변의 첨봉들은 선명한 실루엣으로 같은 자리에 우뚝 서있었다.

이른 새벽 등반을 위해 베이스캠프를 출발하였다.
 이른 새벽 등반을 위해 베이스캠프를 출발하였다.
ⓒ 이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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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3시, 우리는 부산하게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길을 나설 채비를 하였다. 등반 시작점까지는 다시 3시간 정도를 더 걸어올라가야 한다. 어퍼 보이스카웃 레이크 베이스 캠프보다 상단에 있는 아이스버그 호수(Iceberg Lake)에서도 캠프를 차릴 수 있지만 호수는 아직 완전히 얼어붙어 있었고 눈이 쌓여있었다. 새벽길을 나섰지만 휘트니산 하단에 도착할 무렵에는 완전히 해가 떠올랐다.

바위 절벽에도 길이 있다

위용을 드러낸 휘트니산
 위용을 드러낸 휘트니산
ⓒ 이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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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올려다본 휘트니산은 도저히 오를 수 없는 거대한 바위 덩어리처럼 느껴졌지만 좀더 다가가자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준비하고 각오한 이들에게만 조용히 열어주는 바윗길이다. 네명이 한팀을 이룬 우리는 눈쌓인 설사면을 올라 본격적인 암벽등반 루트에 접근하였다. 역시나 한국의 흔한 바윗길처럼 고정볼트와 같은 확보물은 전혀 없었다. 오로지 스스로 가져간 장비를, 스스로 설치하고 올라야 한다.

예상을 빗나갔을 때의 위험

본격적인 등반을 위해 암벽구간으로 접근하고 있다.
 본격적인 등반을 위해 암벽구간으로 접근하고 있다.
ⓒ 이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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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치명적인 위험이 따르는 암벽등반은 오르는 과정의 기술도 중요하지만 사전에 철저한 준비과정도 중요하다. 여기에는 대상지의 지형과 난이도, 날씨, 등반 예상시간 등을 포함한다. 우리는 대략 8시간 정도의 등반 시간을 예상하고 해가 지기 전 베이스 캠프로 복귀하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첫번째로 4000m 고도에서 충분한 기술과 완력을 사용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더 중요하게는 휘트니의 4월 날씨는 완전한 겨울이었다. 특히 오후가 되자 강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절벽 위에서 바람에 무방비로 노출된 우리는 동작이 점점 둔해졌다. 배낭 속 물통의 물이 얼어붙기 시작한 것으로 보아 영하 5도 이하의 기온이었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의 등반

최고 난이도 5.8 수준의 암벽 구간
 최고 난이도 5.8 수준의 암벽 구간
ⓒ 이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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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했던 등반 완료 시간이 지나고 끝내 어둠 속에서 등반을 계속해나갔다. 중간에 하산을 하거나 탈출을 하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손도 얼어붙어 바위를 제대로 잡을 수 없었지만 끝까지 계속 올라 정상에 서는 것이 유일한 탈출구였다. 잠시 기다리는 시간에는 제자리 뛰기로 몸을 녹이기도 하였다. 저녁 8시 30분, 마침내 선두에서 등반 완료라는 무전이 들렸다. 밤 9시가 되어서야 팀의 마지막 등반자가 정상에 섰다.

겨우 문을 열고 들어간 정상 무인대피소에 주저앉아 휴식을 취하였다.
 겨우 문을 열고 들어간 정상 무인대피소에 주저앉아 휴식을 취하였다.
ⓒ 이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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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트니 정상에서 광활한 하이 시에라의 장관을 내려다볼 수 있다는 희망은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깜빡이는 별빛으로 대신해야 했다. 게다가 정상의 무인대피소 손잡이도 고장나서 우리는 추위와 바람에 몹시 시달렸지만 다행히 등반장비를 이용하여 겨우 문을 열고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기대했던 정상에서의 풍광과 기쁨 따위는 머리 속에 떠오르지 않고 그저 바람을 피할 수 있는 대피소가 눈물나도록 고마울 뿐이었다.

22시간만의 귀환

가파른 구간 하강을 마친 후 로프를 정리하고 있다.
 가파른 구간 하강을 마친 후 로프를 정리하고 있다.
ⓒ 이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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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스 캠프를 출발한지 17시간만에 정상에 선 우리는 준비해간 행동식(산행 도중 요깃거리)으로 허겁지겁 주린 배를 채우고 갈라진 목을 적셨다. 고통스러웠던 등반 과정은 순식간에 잊히고 우리는 짧은 휴식으로 원기를 회복하였다. 밤 10시, 우리는 하산을 시작하였다. 달빛이 밝았지만 익숙치 않은 지형이라 하산도 더디게 진행되었다.

특히 마운티니어 루트의 하산 초입은 급경사 지형으로 로프를 이용하여 하강을 해야 했다. 오랜 등반 경험을 가진 산악인 유학재 대장은 어둠 속에서 대원들의 안전한 하강을 도왔다. 전원 무사히 캠프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유학재 대장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캠프로 돌아오는 길 검게 드리운 산들은 깊은 침묵 속에 빠저 있었고, 달빛은 푸르러 처연했으며 흰눈은 그저 묵묵했다. 그 속에 우리의 거친 숨소리만 간간이 들렸을 뿐이다.

등반을 마치고 베이스캠프를 철수하는 대원들
 등반을 마치고 베이스캠프를 철수하는 대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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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아래 베이스 캠프로 돌아가는 길은 길고도 길었다. 새벽 4시에 베이스 캠프를 출발하여 다시 새벽 2시가 넘어서야 캠프로 복귀하였다. 캠프에 남아있던 대원들은 크게 걱정하고 있었고, 전원 무사히 돌아오자 기뻐했다. 무사히 돌아왔다는 기쁨도 잠시 나는 텐트 바닥에 쓰러지듯이 누웠다. 눈을 감자 휘트니산에 휘몰아치던 바람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텐트 위 하늘에는 별빛이 반짝였고 나는 죽음처럼 깊은 잠으로 끝없이 추락했다.

휘트니산 등반 정보
휘트니산의 East Buttress 루트는 등반 시작점에서부터 최고 난이도 5.8 수준의 테크니컬 등반이 필요한 곳으로 전체 구간의 등반 고도는 약 450m이다. 전체 11구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고정 확보물이 거의 없으므로 확보를 위한 장비와 슬링 등의 장비 일체를 준비해가야 한다. 정상 등정 후 하산은 이스트 버트레스 우측 클루와르인 마운티니어 루트(Mountaineers Route)를 이용한다. 마운티니어 루트 역시 매우 가파르기 때문에 하산시에도 안전벨트, 로프 등의 장비가 필요하다. 암벽등반 최적기는 대부분의 눈이 녹는 6월부터 겨울이 찾아오기 전인 9월까지이다. 적설기나 동계 시즌에는 빙벽화와 크램폰 등의 장비가 추가로 필요하다.

휘트니산 East Buttress 루트
 휘트니산 East Buttress 루트
ⓒ 이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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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Team ZEROGRAM과 지인들로 구성된 등반대가 2016년 4월 20일부터 4월 22일까지 등반한 휘트니산에 대한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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