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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에 개정된 어린이헌장 제8조는 다음과 같다. 

"어린이는 해로운 사회환경과 위험으로부터 먼저 보호되어야 한다." 

모든 어린이가 이런 보호를 받으며 성장해야겠지만, 이런 보호 규정이 없더라도 하등의 지장이 없었을 어느 어린이가 있었다. 너무나 똑똑하고 명석해 혼자서도 충분히 살아갈 만한 아이였던 것이다. 성인들과 비교해도 일당백이었다. 한국 어린이날이나 중국 아동절(6월 1일) 같은 날이 없더라도 성장하는 데 지장이 없었을 그 아이는 한나라 무제(기원전 141~87년) 즉, 한무제다. 한무제는 한나라의 제7대 황제다.

"천자가 되고 싶으냐"는 질문에 기가 막힌 대답

상상으로 그려진 한무제. 중국 허베이성(하북성)의 갈석산에서 찍은 사진.
 상상으로 그려진 한무제. 중국 허베이성(하북성)의 갈석산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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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들은 자기네 문자를 한자(漢子)라고 부른다. 또 자신들을 한족(漢族)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한(漢)이란 글자가 중국인들의 정체성을 표상하게 된 데는 한나라가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기원전 206년에 세워진 한나라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중국 문명의 토대를 구축했다. 그래서 중국 문화와 관련된 글자에 漢이 많이 들어간 것이다.

한나라가 그런 위상을 갖게 된 결정적 계기는 바로 한무제에게 있었다. 한무제 이전만 해도 중국은 그렇게 강한 나라가 아니었다. 고조선과 흉노족을 비롯한 이웃나라들한테 당할 때가 훨씬 더 많았다.

그랬던 중국이 강력한 국가가 된 것은 상당 부분은 한무제 덕분이었다. 한무제는 공격적인 대외정복을 통해 고조선·흉노·베트남 같은 이웃 나라들을 군사적으로 제압했다. 이런 정복사업에 힘입어 중국은 동아시아 강대국의 지위를 확립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한무제는 한나라 때는 물론이고 역대 중국에서 대대로 존경받는 황제가 될 수 있었다.

한무제의 원래 이름은 유체(劉彘)였다. 체(彘)는 '돼지'라는 뜻이다. 황족한테는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었다. 여기서 느낄 수 있듯이, 출생 당시의 한무제는 황실 안에서 그리 귀한 인물이 아니었다.

한무제 유체는 아버지인 경제 황제의 열 번째 혹은 열한 번째 아들이었다. 그래서 이변이 발생하지 않는 한, 아버지의 후계자가 되기 힘들었다. 중국 역사에 등장하기 힘든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가 역사 무대에 데뷔해서 중국을 최강 국가로 만들었으니, 참으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유체가 왕위를 차지하게 된 것은, 상당 부분은 어린아이 때 보여준 탁월한 지능 덕분이었다. 어린아이 때부터 보여준 지나칠 정도의 명석함 덕분에 정치적 후원자를 얻고, 이 때문에 황태자가 되고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유체가 한국 나이로 네 살 때였다. 송나라 때 왕명으로 편찬된 설화집인 <태평광기>에 따르면, 하루는 아버지 경제가 네 살짜리 유체를 무릎에 앉혀놓고 이렇게 물어봤다.

"너, 천자가 되고 싶으냐?"

어린아이한테 장난삼아 황제가 되고 싶으냐고 물어봤던 것이다. 이 물음에 대한 네 살짜리의 대답이 너무나 기가 막혔다. 생모가 미리 일러둔 결과이겠지만, 그걸 감안한다 해도 너무 기막힌 답변이었다. 답변은 이랬다.

"그것은 하늘이 정하시는 것이지 제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매일 같이 궁궐에서 폐하께 재롱을 떠는 것입니다. 그리고 편안하게 살면서 자식의 본분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아버지 경제는 '생모가 이렇게 하라고 시켰겠지'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런 생각을 했다 하더라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반복된 암기의 결과라 해도 네 살짜리 입에서 나오기는 힘든 말이었기 때문이다.

이 에피소드는 유체가 황제의 눈에 강한 인상을 심어주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후계 구도가 바뀌기 힘들었다. 경제의 후계자는 장남이자 황태자인 유영이었다. 그래서 유영은 유체보다 유리한 조건을 갖고 있었다. 네 살짜리 유체의 대답은 이런 유영의 지위를 위협하기에는 아직 역부족이었다.

다섯 살에 '정략결혼' 성사시킨 한무제

중국 베이징의 군사박물관에서 찍은 한무제 상상화.
 중국 베이징의 군사박물관에서 찍은 한무제 상상화.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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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체의 처지를 바꾼 보다 더 결정적인 에피소드는 그다음 해쯤에 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유체는 강력한 정치적 후원자를 얻게 되고, 이에 힘입어 지금으로 말하자면 '대선 후보 지지율' 1위를 달리게 된다.

서기 4세기 이전에 편찬된 한무제 전기인 <한무고사>라는 책이 있다. 이 책에는 한무제가 꼬마였을 때의 정치적 실력자인 유표란 인물이 나온다. 유표는 경제 황제의 누나였다. 그의 작위는 장(長)공주였다. 황제의 누이는 장공주라고 불렸다. 이런 지위를 활용해 유표는 정치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장공주 유표의 고민은 '포스트 경제 시대'에도 자기의 권세를 이어가는 것이었다. 그런 목적으로 그는 자기 딸 진아교를 황태자 유영과 결혼시키고자 했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자기 딸을 자기 조카와 결혼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유표의 시도는 실패했다. 진아교와 유영의 혼인은 성사되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유표는 황태자 유영을 밀어내고 새로운 황태자를 옹립할 생각을 품게 되었다. 이에 따라 유표가 새로이 주목한 아이가 바로 유체다.

유표는 유체가 진아교를 좋아하는지 시험했다. 넓은 공간에 100여 명의 여성을 동석시키고, 그 자리에 진아교와 유체도 참석하도록 했다. 이 자리에서 유표는 유체를 무릎에 앉히고 이렇게 물어봤다.

"너, 결혼하고 싶니?"

유체는 선뜻 "네"라고 대답했다. 다섯 살짜리 입에서 '결혼하고 싶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그러자 유표는 백여 명의 여성을 가리키며 "누구랑?" 하고 다시 물었다. 유체는 "전부 다 싫어요!"라고 대답했다. 고모의 무릎에 앉은 유체는 딱딱한 표정으로 그렇게 대답했다. 

구미가 당기기 시작한 유표는 자기 딸을 손으로 가리키며 "아교는 어때?" 하고 떠보았다. 그제야 유체는 얼굴에 웃음을 띠면서 "좋아요"라고 대답했다. 그러더니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여 고모를 만족시켰다.

"아교랑 결혼하면 금옥(金屋, 좋은 집)에 모실게요!"

이 말에 유표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유체가 자기편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유표는 경제를 어렵게 설득해서 진아교와 유체의 결혼을 성사시켰다. 그런 뒤 유표는 황태자 모자를 몰아내고 유체를 황태자로 만들었다. 이때 유체는 한국 나이로 여섯 살이었다. 이로부터 10년 뒤 유체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제7대 황제가 되었다.

황태자가 되던 해에 유체는 새로운 이름을 받았다. 유체의 '체'는 돼지라는 뜻이다. 여섯 살 때 새로 받은 이름은 철(徹)이었다. '명철함이 남들을 능가한다'는 의미에서 그런 이름을 받았다. 후대 사람들이 한무제의 실명으로 기억하게 될 유철이란 이름은 그렇게 탄생했다.

만약 한무제가 서너 살 때부터 탁월한 지능을 보여주지 못했다면, 그는 유철이 아니라 유체란 이름으로 평생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황태자가 되고 황제가 되어 중국을 강대국으로 끌어올리는 위업을 세울 기회도 갖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어린아이 때부터 탁월한 능력을 보여줬고, 그 덕분에 황제가 되어 중국을 강대국으로 끌어올렸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어린이날 혹은 아동절의 보호'가 필요 없는 아이였다.  


태그:#어린이날, #아동절, #한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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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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