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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입시 학생부 종합전형(아래 학종)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학종에 대한 비판은 첫째, 부모의 경제력이나 학교 간 격차로 차별적인 스펙이 만들어지는 부작용, 둘째, 평가의 객관성과 공정성 확보의 어려움이라는 두 가지로 대별된다.

이에 더불어민주당이나 국민의당은 입시에서 학종과 같은 수시 비중을 대폭 축소하는 정책을 내놓았다. 그리고 그 근거로 '입시 경쟁이 과열된 상황이므로 입시에서 최대한 객관성을 확보하는 것이 차악'이 될 수 있음을 들었다.

그러나 이것이 정말 '차악'이라 할 수 있을까? 입시라는 관점으로만 보면 '차악'일지 몰라도, 사회 전체 구조 속에서 보면, '차악'도 '최악'도 아닌 단순 도구일 뿐이고, 입시 제도 자체에만 국민의 모든 관심이 집중된 현실이 '최악'이라 할 수 있다.

완전히 공정하고 객관적 평가, 가능할까

입시에서의 객관성을 확보했던 제도로는 80년대의 학력고사가 으뜸이었다. 전국의 학생들이 똑같은 객관식 시험을 보고, 그 결과가 고스란히 점수로 수치화되었다. 그 전의 예비고사, 본고사 중심 입시 체제에서는 불가능했던 확실한 변별이 전국 규모로 이루어졌다. 완전한 외줄세우기였다.

당시 시행된 사교육 금지 조치까지 더해져, 학력고사는 우리 입시 역사상 가장 객관적이고 공정한 제도였던 듯싶다. 그리고 그 해에 모 대학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학력고사 덕분에 그간 비슷한 서열로 여겨졌던 대학보다 우리 대학의 서열이 더 높다는 게 밝혀져 반가웠다'고.

현재의 수시 입학 제도를 대폭 수정하여  학력고사나 수능 또는 지필고사 중심 내신으로 대체하면  입시 문제가 해결될까? 객관성은 담보될지 몰라도 학생들은 암기와 문제풀이 훈련에만 몰두하게 되고, 고교 수업에서 독서나 프로젝트 수업, 모둠 학습 등의 창조적 활동은 어려워질 것이다.

그 결과 지금 혁신학교들이나 뜻있는 교사 개인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다양한 교육적 시도는 더욱 위축될 수밖에 없다. 물론 그런 활동들 역시 입시를 위한 겉치레가 되는 측면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시도까지 사라져 그에 대한 논란마저 일지 않는 것이 바람직할까?

또한 엄밀한 의미에서 완전히 공정하고 객관적인 평가란 존재하지 않는다. 학생들의 창의성, 기획력, 유연성, 협동성과 같은 능력들은 객관적으로 공정하게 평가될 수 없고, 당연히 수치화해서 줄 세울 수 없다.

그들의 능력 가운데, 암기력 등 극히 일부만을 객관식 시험과 같은 평가로 측정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객관식 지필고사들은 한날한시에 한판 승부를 가리는 확실한 게임으로는 의미있을지 몰라도, '대학수학능력' 혹은 '학업 성취도'를 제대로 평가할 수 없고, 따라서 완전한 의미에서 '공정하다'고 할 수도 없다. 게다가 현재 수학능력 시험은 1, 2점 차이로 등급이 나뉜다. 따라서 수능 등급은 '대학 수학 능력'보다는 문제 풀이 훈련의 숙련도를 나타낼 가능성이 높다.

입시 제도 논란 그리고 '한국적 신화'

좀 더 들여다 보면,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입시 제도에 대한 모든 논란의 바탕에는 '한국적 신화'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신화는 바로 '입시에서 완벽하게 공정한 경쟁이 가능하고, 꼭 필요하다'는 사회적 합의이다.

그러한 신화의 바탕에는, 실력에 있어서든 노력에 있어서든 사람들 사이에는 반드시 우열이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즉, 우리는 입시가 공정하기만 하면, 전국의 학생들을 한 줄로 세워 변별할 수 있다고 무의식적으로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완전하게 객관적이고 공정한 평가가 불가능함을 인정할 때,우리는 대학에 서열이 존재한다는 믿음도 버릴 수 있다. 우리 사회의 대학 서열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굳건한지, 사람의 능력에는 확실한 우열이 있고, 등수나 점수로 수치화하여 식별할 수 있다는 신화가 얼마나 공고한지를 보여주는 현상이 '반수'이다.

교직에 있으면서 나는 연고대에 합격한 뒤, 서울대에 다시 응시하거나, 서울 소재 대학에 합격한 뒤 조금 더 서열의 앞쪽에 있는 대학에 가기 위해 다시 준비하는 경우를 너무나 많이 보았다. 물론 실질적 차별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사회 전체가 대학 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능력에 확실한 서열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기에 벌어지는 현상이기도 하다.

김덕영은 그의 저서 <위장된 학교>에서 우리나라의 대학 서열에 대한 믿음이 외국에서는 매우 황당한 것임을 보여준다. 우리가 영국 최고라고 믿는 케임브리지와 옥스포드 대학에 대해서 영국인에게 '둘 중 어느 대학이 더 좋느냐'고 질문했을 때, 그들은 매우 놀라워 했다고 했다. 대학에 우열이 존재한다는 생각 자체가 유럽에서도 낯설고, 명문대학이 있다는 미국에서도 그런 식의 서열적 사고는 잘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완전히 공정한 입시 제도가 가능하다 해도(절대 가능할 수는 없지만), 그런 제도를 만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완벽하게 공정한 평가에 의해 학생의 능력을 수치화하여 줄 세운 뒤, 서열화된 대학에 순서대로 진학하는 것이야말로 교육과 사회를 망치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대학 서열화는 더욱 공고해지고, 그에 의한 차별은 더욱 당연시 되며, 사회적 불평등은 강화될 것이다. 완벽하게 정의로운 유토피아처럼 보이는 그곳이 바로 디스토피아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렇기에 공정한 입시가 온 국민의 관심사가 되어 온 세월 동안, 학력과 대학 서열화에 의한 임금 격차는 더욱 커져 왔다. 그러나 대학은 서열과 계급을 나누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다. 그저 학문을 하기 위한 기관일 뿐이다.

정작 입시 문제의 해결책은 입시제도 밖에 있다. 초중등 교육, 특히 고등학교 교육을 정상화해야 한다. 고등학교는 공화국의 시민을 길러내는 공교육 기관일 뿐, 대학 입시를 돕는 사교육 기관이 아니다.

사실, 현재 학생부 종합전형이 왜곡된 행태를 보이는 것은, 그 제도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입시를 둘러싼 우리 사회의 그릇된 통념 때문에 공교육이 제구실을 못하고 있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라 할 수 있다.

학생부 종합 전형이든, 교과 전형이든, 혹은 수능이나 학력고사 등 어떤 입시 제도를 시행하든 간에, 고교 교사가 자기 학교 학생을 좋은(?) 대학에 많이 보내려 애쓰지 않도록 하면, 지금보다 교사의 평가를 신뢰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입시를 통한 계층 이동이 꼭 필요하다면, 현재의 기회균등 전형과 농어촌 전형 등을 대폭 확대하는 쪽으로 나가는 것이 옳다. 기형적으로 비대한 사교육을 둔 채로, 입시 제도의 큰 틀을 바꾸어서 계층 이동을 활성화하겠다는 것은 허황된 꿈에 불과하다.

사실 입시 제도의 문제처럼 보이는 문제들은, 입시 자체의 문제가 아니다. 노동 문제나, 왜곡된 공교육 현실 등 근본적인 모순들은 내버려둔 채, 입시 제도만을 계속 뜯어고치는 것은 기존의 모순을 더욱 방치하거나 키울 뿐이다.


태그:#학생부 종합 전형, #대학 입시, #공교육, #입시 제도, #수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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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여 년의 교직 생활 경험을 바탕으로 구체적 절망과 섬세한 고민, 대안을 담은<경쟁의 늪에서 학교를 인양하라(지식과감성)>를 썼으며, 노동 인권, 공교육, 미혼부모, 입양 등의 관심사에 대한 기사를 주로 쓰고자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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