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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 형래와 홍래 형제
ⓒ 홍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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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참사 당일 이후 생존자가 한 명도 없었는데도 일주일이 지나는 동안 저는 홍래가 살아 돌아올 거라고 믿었어요. 애가 운동도 잘하고 수영도 잘했거든요. 하지만 오늘이 홍래의 기일이 되고 말았네요."

세월호 참사로 한 살 아래 동생 홍래군을 잃게 된 박형래군을 비롯한 세월호 유가족들에게는 참사 당일보다 힘든 날이 있다. 어쩌면 내 동생, 내 아들만큼은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 오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부서진 날. 바로 시신으로 수습되어 가족의 품으로 안긴 날이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 단원고 2학년 5반 박홍래군의 형, 형래군과 만나 동생과의 이별에 대해 이야기 해보았다.

- 어때요? 2년이 되었는데.
"지난 2년을 생각하면 지옥 그 자체. 지금도 그렇지만. 인생이 죄책감으로 계속 쌓이는 것 같아요. 처음에는 홍래 살아있을 때 잘 해주지 못한 것 때문에 미안해서 홍래 이야기를 꺼내지도 못했어요. 우리 식구는 홍래랑 저랑 이렇게 형제 둘에 엄마 아빠 네 식구거든요. 아빠랑 저는 원래 무뚝뚝한데 홍래는 애교가 심하게 많았거든요.

특히 아빠가 지방에서 일하고 주말에 안산 와서 같이 계셨는데 홍래가 엄마 심심 할까봐 옆에서 항상 종알종알 거렸어요. 수학여행 가기 전날에도 애가 설레서 잠을 못 자더라고요. 엄마가 아침 여섯 시에 일어나서 홍래 김밥 싸주시는데 그 옆에 앉아서 계속 도란도란 엄마랑 이야기 하던 걸 잠결에 들었던 것도 기억나요. 그런 모습을 보고 항상 저는 남자가 왜 그리 말이 많냐고 쥐어박고 그랬거든요."

미안해요
▲ 홍래 미안해요
ⓒ 홍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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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사 이후 집안이 조용해졌겠네요.
"초기에는 엄마가 홍래 때문에 너무 힘들어 하는데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게 없었어요. 한편으로는 서운한 마음도 있었어요. 엄마한테 자식은 홍래밖에 없나. 그래서 가족 간에 대화가 더 없어졌죠. 사실 엄마는 아들을 잃었지만 저는 하나뿐인 동생을 잃은 거거든요. 하지만 부모님이 자식을 잃은 슬픔에는 비교할 수 없다는 생각이 더 컸던 것 같아요. 저는 따로 혼자서 아프고, 홍래 생각에 힘들어 하는 엄마를 보면 마음 한켠에 이상하게 서운한 마음도 들고.... 아무튼 정상이 아니죠. 이건."

- 요즘에도 그래요?
"아니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당시에 홍래가 죽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엄마한테 서운하고 그럴 수 있었겠죠. 이제 조금씩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그래서 엄마가 가엾어 보이고 아빠가 불쌍하고 그래요. 그리고 홍래가 너무 그립고 그래서 홍래와 있었던 일들, 했던 이야기들 기억하려고 애써요.

예전에 저는 항상 단답형이었어요. 응. 알았어. 이런 말만 했었죠. 그런데 요즘에 들어서야 엄마한테 잘하려고 애써요. 물론 홍래의 애교는 따라갈 수 없지만. 엄마가 가엾고 제가 홍래 몫까지 잘 살아야겠다는 마음은 먹었는데 막상 어떻게 할지는 모르겠어요."

가족
▲ 행복했던 가족
ⓒ 홍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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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빠는 어떻게 지내세요?
"홍래 수학여행 가기 전 주말에 아빠가 홍래만 옷을 사준다고 해서 옷가게에 갔었어요. 그런 적은 처음이었어요. 항상 우리 둘 함께 챙기시거나 어떨 때는 첫째인 저를 더 챙기신 적도 많았어요. 그날 홍래가 많이 신났었죠. 나중에 보니까 아빠가 그 가게에 들러 부탁해서 그날 CCTV 영상을 받아와서 간직하고 계시더라고요. 그 안에 우리가 함께 옷 고르는 게 담겨 있어요. 아마 아빠도 저랑 같은 마음일 거예요. 왜 더 살갑게 대하지 못했을까. 그런거요." 

홍래
▲ 이종격투기선수가 꿈이었던 홍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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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래가 어떤 동생이었어요?
"제 인생의 반쪽. 우리들에게는 계획된 미래가 있었어요. 홍래랑 저랑은 이종격투기 선수가 꿈이었거든요. 중학교때부터 만날 체육관에 같이 다녔어요. 홍래가 워낙 저보다 운동을 잘해서 항상 제가 '홍래 너가 이종격투기 선수로 잘돼서 체육관 열고 애들 가르쳐. 나는 체육관장 되어서 관리나 하면서 살련다' 이러면서 농담 반 진담 반 얘기했어요. 그때는 정말 단순했어요. 그냥 함께 운동하는 거. 그런데 지금은 없죠. 홍래도 없고 저는 이종격투기를 관뒀어요. 다시는 하지 않을 거예요."

- 오늘이에요. 2년 전 홍래를 다시 만난 게. 그 당시를 생각하면 어때요?
"정신없죠. 엄마 아빠가 진도에 있어서 저는 안산 단원고에 있었어요. 당시에 저 같은 형제자매나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강당 바닥에 은박지 같은 것 깔아놓고 설치된 커다란 스크린에서는 뉴스만 보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명단들……. 출석부에 색깔로 알 수 있었어요. 누가 생존이고, 사망이고 실종인지에 대해서요. 생존은 첫날 표시된 그대로였고 날이 갈수록 실종의 숫자가 적어지고 그것이 사망의 숫자에 더해졌죠. 결국 첫날 생존한 아이들 빼고는 모두 사망이 되었죠.

당시 체육관 관장님하고 체육관 친구들이 돌아가면서 챙겨주고 그랬어요. 당시 체육관에 단원고 2학년 학생이 중식이 홍래, 강명, 인배 모두 4명이 있었는데 모두 희생되었죠. 홍래 시신이 수습되었다고 할 때도 슬퍼할 겨를이 없었어요. 그때 장례식장을 어서 구해야했 거든요. 안산은 물론 근처까지 장례식장이 꽉 차서. 이모가 간신히 한 군데 빈 곳을 찾아서 일찍부터 가서 대기하고 있어야 했어요."

- 홍래 형으로서, 세월호 참사에 대해서 가장 궁금한 것이 뭐예요?
"세 가지요. 왜 침몰했는지, 왜 구조를 안 했는지, 왜 처음에 다른 나라의 도움을 거절하고 도와주지 않았는지. 그 세 가지는 꼭 알고 싶어요."

세월호 참사당시 마지막 사진
▲ 중식이와 홍래 세월호 참사당시 마지막 사진
ⓒ 홍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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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톡
▲ 형에게 마지막 카톡
ⓒ 홍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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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세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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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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