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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절사가 있는 동변동과 그 맞은편 서변동 사이를 흐르는 동화천의 모습. 동화사 쪽에서 금호강까지 이어지는 이 물길은 현재 대구에 남아 있는 유일한 자연천이다.
 표절사가 있는 동변동과 그 맞은편 서변동 사이를 흐르는 동화천의 모습. 동화사 쪽에서 금호강까지 이어지는 이 물길은 현재 대구에 남아 있는 유일한 자연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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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절사(表節祠)는 대구광역시 북구 동변로24길 22-37에 있다. 지번 주소가 동변동 234번지인 표절사의 뒤편으로는 해발 250m 학봉으로 가는 등산로가 나 있다. 표절사가 동변동을 아래로 굽어보는 언덕에 자리를 잡고 있다는 말이다.

표절사 아래로는 대구 유일의 자연천인 동화천이 흐른다. 동화사에서 내려온 팔공산 맑은 물은 아름다운 버들, 갈대, 수초 등을 품안에 안은 채 고요히 흘러간다. 지금은 잡다한 건축물들이 어수선하게 똬리를 틀고 있어 주변 풍경이 별로 상쾌하지 못한 지경으로 내려앉아 버렸지만 표절사에서 내려다보는 예전의 전망은 눈이 부셨을 것이다.

이 멋진 자리에 표절사가 들어선 때는 1600년(선조 33)이다. 1600년이라면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처참한, 가장 대규모의 전란이었던 임진왜란의 혈흔이 아직 고스란히 남아 있던 시점이다. 따라서 표절사를 세운 구회신(具懷愼, 1564∼1634)이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이었으리라 추측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개경에서 내려온 능성구씨들이 자리를 잡고 살기 시작한 경북 의성군 가음면 순호리 마을의 한복판에 있는 도해와(蹈海窩)의 모습. 도해는 병자호란 때 척화를 주장했던 구혜 선생의 호(號)이다. 와(窩)는 일반적으로 많이 쓰이지는 않지만 '집'을 의미한다. 즉, 도해와는 '도해(蹈海) 선생을 기려 그 후손들이 지은 집[窩]'이다. 이 마을 능성구씨들은 '공(工)부를 열심히 하라'는 뜻을 후손들에게 알리기 위해 집 모양을 '工'자형으로 만들었다. 땅을 돋우고 돌을 쌓아 축대를 부쩍 높인 위에 기와집을 얹었는데, 공(工)자형 구조인 까닭에 양쪽으로 힘차게 뻗어 나간 지붕의 선이 독특하고 아름다워 눈길을 끈다.
 개경에서 내려온 능성구씨들이 자리를 잡고 살기 시작한 경북 의성군 가음면 순호리 마을의 한복판에 있는 도해와(蹈海窩)의 모습. 도해는 병자호란 때 척화를 주장했던 구혜 선생의 호(號)이다. 와(窩)는 일반적으로 많이 쓰이지는 않지만 '집'을 의미한다. 즉, 도해와는 '도해(蹈海) 선생을 기려 그 후손들이 지은 집[窩]'이다. 이 마을 능성구씨들은 '공(工)부를 열심히 하라'는 뜻을 후손들에게 알리기 위해 집 모양을 '工'자형으로 만들었다. 땅을 돋우고 돌을 쌓아 축대를 부쩍 높인 위에 기와집을 얹었는데, 공(工)자형 구조인 까닭에 양쪽으로 힘차게 뻗어 나간 지붕의 선이 독특하고 아름다워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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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회신은 1564년(명종 19) 지금의 경상북도 의성군에서 태어났다. 구회신이 이곳에서 출생한 것은 그의 6대조인 구익령(具益齡)이 조선 태종 대에 의성군사(義城郡事)로 내려왔다가 가음면 순호리에 정착을 하게 된 때문이다. 그 이전의 능성구씨 선조들은 의성이 아니라 개경에 살았다.

개경은, '서울 경(京)'이 말해주듯, 고려의 왕성(王城)이다. 당연히 개경에서는 고려가 멸망하고 이성계 정권이 들어설 때 정치적, 군사적 격변이 일어났다. 그때 구회신의 8세조인 송은(宋隱) 구홍(具鴻)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를 지켰다. '두문동 72현'이라는 이름으로 후세에 전해지는 선비의 한 사람이 바로 구홍인 것이다.

이성계의 협조 요구를 끝까지 거부하는 고려 충신들

두문동 72현은 두문불출(杜門不出) 네 글자를 유명하게 만들어준 어원이다. 두문불출은 본래 사마천의 <사기> 상군열전에 나오는 고사성어이지만 두문동 72현 덕분에 나라 안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말로 떠올랐다. 문을 걸어 잠근 채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뜻의 두문불출은, 고려 충신 72인이 이성계의 명령을 거부한 채 조선의 세상과 인연을 끊은 역사적 사실을 증언한다.

이성계는 왕씨를 무너뜨리고 새 나라를 세웠지만 아직 정권의 기초가 탄탄하지 못했다. 이성계는 마음으로는 여전히 고려를 섬기고 있는 선비들을 회유하기 위해 경덕궁에서 친히 과거를 열었다. 하지만 개경의 젊은 선비들은 아무도 응시하지 않았다.

 대구시 북구 서변동 언덕에 있는 송계당. 두문72현 송은 구홍 선생과 그의 후손인 임진왜란 의병장 계암 구회신 선생을 기려 세워진 재실이다.
 대구시 북구 서변동 언덕에 있는 송계당. 두문72현 송은 구홍 선생과 그의 후손인 임진왜란 의병장 계암 구회신 선생을 기려 세워진 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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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들은 경덕궁 앞 고개에 조복(朝服)을 벗어던지고, 관을 벗어 나뭇가지에 걸어놓고는 모두들 사라져버렸다. 그 후 고개는 부조현(不朝峴)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부조현 북쪽의 관을 걸어놓은 곳도 괘관현(掛冠峴)으로 불리기 시작했다('괘'의 뜻을 잘 말해주는 문화유산으로는 경주 '괘릉'이 있다).

선비들은 지금의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 기슭에 묻혀 살았다. 마을은 두문동(杜門洞)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조선 왕조는 두문동을 포위한 채 밖으로 나오라고 강요했다. 하지만 선비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죽기 싫으면 나오겠지, 하고 생각한 이성계 일파는 마침내 마을 사방에 불을 질렀다. 고려 충신 72인은 끝내 불길 속에서 목숨을 버렸다. 구홍이 남긴 시를 읽어본다.

不義之富貴 의롭지 아니한 부귀는
於我如浮雲 내게 뜬구름과 같도다
石田王春在 돌밭에도 임금의 봄은 서려 있으니
楎鋤朝暮耘  호미를 들고 저물도록 김을 맨다오

'돌밭에도 임금의 봄은 서려 있다'는 3행은 특히 절창이다. 식물은 원래 흙에서 자라는 것이니 돌에서는 살 수가 없다. 그런데도 구홍은, 새 순은 돌밭에서도 돋아난다는 인식을 통해 임금의 능력과 은혜가 얼마나 위대한가에 대해 웅변한다. 희망의 싹을 놓지 않겠다는 신념과 각오를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구홍은 해가 저물도록 호미를 들고 김을 맨다. 보통의 사람들은 해가 밝은 낮에만 농사를 짓지만 고려의 충신은 캄캄한 때에도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다. 지금 비록 어둡지만 호미를 들고 김을 매어 놓아야 아침이 왔을 때 싹이 돋아날 것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는 이성계가 좌정승(左政丞) 벼슬을 제안하면서 세 차례나 불러도 끝내 거절한다.

"나를 조선이 준 관직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

고려의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 구홍은 운명하면서 후손들에게 '조선이 준 관직 이름(좌정승)으로 나를 부르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다. 하지만 새 왕조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던 후손들은 명정(銘旌)에 '좌정승'이라 표기한다. 명정은 붉은 천에 죽은 이의 관직과 성명을 흰 글씨로 적어서 사용하는 장례식 때의 조기(弔旗)를 말한다.

그러자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일어 명정이 찢어진다. 우연으로 여긴 후손들은 재차 좌정승으로 기록한 명정을 또 만들었는데, 이번에도 날카로운 회오리바람이 솟구치더니 명정을 찢는다. 놀랍고 기이했지만 명정 없이 장례식을 치를 수는 없어서 후손들은 같은 명정을 삼차로 제작했고, 또 다시 명정은 바람을 맞아 찢어진다.

1740년(영조 16) 영조가 개성에 갔다가 부조현의 유래를 듣고 비석을 세운다. 정조는 1783년(정조 7) 개성의 성균관에 표절사(表節祠)를 건립한다. 그 이후 두문동 현지에도 표절사가 건립된다. 구회신이 송은 구홍 선생을 봉안하기 위해 세운 대구 동변동 사당에도 뒷날 표절사라는 현판이 걸린다. 두문동 72현은 절(節)의를 나타낸(表) 선비 정신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표절사, 선비들의 절의 정신을 나타내는 대명사였다

그런데 표절사는 입향조(入鄕祖, 마을에 처음 들어와서 살기 시작한 선조) 구익령이 터를 잡은 순호리에도 있다. 이 마을 한복판에는 병자호란 당시 척화를 주장했던 구혜(具譓)의 호(號)에서 이름을 딴 도해와(蹈海窩)가 지어져 있는데, 그 집 뒤편으로 가면 사당 표절사를 만나게 된다. 이는 구씨들이 두문동 72현의 1인인 구홍 선생을 '가문의 영광'으로 모시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능성구씨가 개성에서 경북 의성으로 내려와 처음 살기 시작한 가음면 순호리의 표절사
 능성구씨가 개성에서 경북 의성으로 내려와 처음 살기 시작한 가음면 순호리의 표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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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호리에는 별도의 재실도 있다. 학강재(鶴岡齋)는 해방의 기쁨 속에서 1947년 처음 건립되었는데, 지금 건물은 1996년 이후 몇 차례의 보수를 거쳐 2008년에 중수된 것이다. 재실 앞에는 2008년 5월 4일 세워진 '학강재 중수 기념비'가 손님을 맞이한다. 비문을 읽어 본다.

능성구씨의 시조는 고려 검교상장군 휘(諱, 이름) 존유(存裕)이시고 7세조 문절공 송은 선생 휘 홍(鴻)은 좌정승공파의 파조(派祖, 파의 시조)이시다. 문절공의 손자 의성군사공 휘 익령(益齡)께서 조선 태종조(재위 1401∼1418)에 이곳 의성 가음 순호리에 세거(世居, 대를 이어 거주)한 지 6백여 년이 되었다. (중략) 이번 중수비 건립을 위해 여러 자료를 고찰하니 의성 입향조가 9세 군사공임이 고증되어 이를 바로잡게 되었다. (하략)
중수 추진위원회
고문 : 자업 경회 천서 기생 자영
위원장 : 진
부위원장 : 정회 본욱
위원 : 자욱 본술 두만 본철 인서 근회 성회 삼증 화서 교찬 준호 우서 본일 본기 이조
총무 : 자대
재무 : 복회
감사 : 봉회 본근

 학강재
 학강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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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회신은 구홍의 후손답게, 29세의 나이로 의병을 일으켰다. 대대로 문신으로 과거를 한 가문의 아들이었지만 어릴 때부터 무예에도 재능을 보였다. 경전을 공부하는 틈틈이 말을 타고 활을 쏘았는데, 그 광경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의 뛰어난 솜씨에 놀라면서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으로 기대를 하였다.

두문 72현의 후손 구회신, 29세의 나이로 창의

구회신은 팔공산으로 달려가기 전, 고향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지금 난여(鸞輿, 임금의 가마)가 피란을 가고 종사(宗社, 나라)가 거의 무너지게 되었는데 신하된 자로서 달아나 숨어 살 수는 없다" 하고 창의를 부르짖었다. 그는 장정들을 이끌고 의흥을 거쳐 단숨에 팔공산으로 내달았다. 당시 대구 일원 의병들의 총본부가 팔공산 부인사에 있었다.

'(<대구읍지>) 구회신은 임진왜란 때 의성에서 대구로 와서 전공을 세웠다. 벼슬은 첨정이고 (중략) 선조 때이다. (중략) 달성의 동쪽 무태에 있는 창포재는 첨정 규회신의 유적이다. (<달성군지>) 구회신의 벼슬은 첨정이다.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전공을 세웠다.'

 표절사
 표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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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당시 류성룡의 군관으로 활약했던 구회신은 울산의 서생포 전투에도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류성룡은 선조에게 올린 장계에 '이달(1597년 12월) 25일 군관 구회신이 울산에서 (경주로) 돌아와' 자신에게 "명나라 군과 군이 왜적의 내성(內城)을 공격하였으나 성이 너무 견고하고 험하여 대포로도 격파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적들이 성벽 위로 난 구멍으로 조총을 많이 쏘아 명나라 군과 아군의 부상자가 많았습니다'라고 전했다고 썼다.

류성룡은 이어 '날씨는 약간 음산하였고, 어제 미말(오후 3시경)에는 동풍이 계속 불면서 빗발이 점점 거세어져 군사들이 들판에서 노숙을 하고 있으나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군량은 지금 계속 운반해서 들이고 있습니다" 하고 구회신이 올린 보고를 임금에게 아뢰었다. 이 내용은 <징비록>에도 실려 있다. 그런 점에서, 구회신의 활약상을 가장 잘 증언하고 있는 사람은 류성룡이라 할 수 있다.  

구회신의 임진왜란 활약은 류성룡이 가장 잘 증언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살아나자 그제야 구회신은 미뤄두었던 과거에 응시하여 1599년(36세) 무과에 급제하였다. 그는 이제 관군 장수가 되었지만 본래가 선비였으므로, 선사재(이강서원의 전신)에서 열린 선비들의 강회(講會)에 참석하여 서사원, 손처눌, 곽재겸, 류요신 등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선비들과 계속 교유했다.

구회신은 타계 이후 자신이 조상을 위해 세운 사당에 함께 제향되는 영광을 누렸다. 그 후 표절사에는 구홍리(具洪履, 1692∼1779)가 추가로 배향되었다. 벼슬이 자헌대부에 이르렀던 구홍리는 표절사 옆의 재실 화수정(花樹亭)에서 강학을 한 선비이다.

 동화천을 굽어보고 있는 표절사의 재실 화수정
 동화천을 굽어보고 있는 표절사의 재실 화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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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절사는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훼철되었다가 2007년 복원되었다. 복원 당시 그 동안의 경과를 적어 천지신명과 조상님께 바친 고유문(告由文)에는 '(1871년에) 조정의 명으로 묘우(사당)가 훼철되니 누가 감히 거역할 수 있었겠습니까? 황량한 빈 터에 잡초만 무성하니 (중략) 마음이 상심하고 옛자취가 처량하였습니다. 빈 터를 가리키며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우울한 마음을 펴지 못하고 또 백 년이 흘렀습니다. 하늘의 이치가 순환하여 마침내 밝게 풀 수 있게 되어 광명이 비치니, 의논을 일으켜 복원하기로 하였습니다'라는 감회가 밝혀져 있다.

그런가 하면 김창년은 <표절사 중건기>에서 '조선 선조 때 첨정공 휘 회신 선생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붓을 던지고 창의하여(投筆倡義) 용전분투하였으니(勇戰奮鬪) 대구 팔공산 전투에서부터 울산 서생포까지 추격하여 적을 섬멸하였다. 영남의 사방이 이로 인하여 편안해졌는데, 정충대절(貞忠大節)은 국승(國乘, 조선왕조실록)에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관직은 어모장군 행(行) 훈련원 첨정이다'라고 회고하였다. 요지는, 선비 구회신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서 큰 공을 세웠고, 이 사실은 국사에 기록되어 있으며, 다시 무과를 거쳐 관군 장수로 활약했다는 것이다.

 멀리서 본 표절사
 멀리서 본 표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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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 <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장편소설 <딸아, 울지 마라><백령도><기적의 배 12척> 등을 썼다. <집> 등 개인 사진전도 10회 이상 열었다.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다. 전교조 활동으로 5년간 해직교사 생활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