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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슈올레 우레시노 코스
 규슈올레 우레시노 코스
ⓒ 유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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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하순이라 규슈는 무척 따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이 빗나갔다. 아침에 일어나니 기온이 뚝 떨어져 으스스한 한기가 느껴졌다. 자다가 추워서 온풍기를 틀었는데, 그러기를 잘했다. 아침에 씻으러 온천탕에 갔더니 히터를 틀어놓았다. 어제 저녁에는 온천탕에 히터가 없었다. 아침식사 시간은 오전 7시. 어제 체크인을 할 때 미리 아침식사 시간을 정해두었다. 6시 50분쯤 전화벨이 울렸다. 아침식사를 하러 내려오라는 전화였다.

여행 첫날과 이튿날, 이틀 동안 묵은 우레시노의 작은 료칸 잇큐소(旅館 一休莊)는 소박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숙소였다. 도로 옆인데도 시끄럽지 않고 조용해서 좋았다. 이곳의 가장 큰 장점은 우레시노 버스센터가 코앞에 있다는 것. 료칸 앞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면 바로 버스센터였다.

우레시노 코스가 시작하는 가미사라야(上皿屋)까지 버스를 타야하고, 다케오로 이동할 때도 버스를 이용할 예정이라 버스센터가 숙소 바로 앞이라는 건 아주 중요했다. 낯선 도시에서 버스센터를 찾으러 돌아다니지 않아도 되므로. 조식이 포함된 숙박비 역시 저렴해서 부담이 없어 좋았다.

곳곳에 너른 차밭이 펼쳐져 있는 우레시노 코스

료칸 잇큐소(一休莊). 이곳에서 이틀동안 묵었다. 소박하면서 조용한 숙소였다.
 료칸 잇큐소(一休莊). 이곳에서 이틀동안 묵었다. 소박하면서 조용한 숙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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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슈에는 17개의 규슈올레가 조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가장 먼저 걷는 길은 사가 현에 있는 우레시노 코스. 사가 현에는 3개의 규슈올레가 있다. 우레시노 코스, 다케오 코스, 가라쓰 코스. 이번 도보여행에서는 7개 코스만 걸을 예정인데, 사가 현의 3개 코스는 다 걷는다.

우레시노 코스 전체 길이는 12.5km. 차가 유명한 지역답게 코스 곳곳에 너른 차밭이 시원스럽게, 가끔은 아기자기하게 펼쳐진다. 소요 예상시간은 4시간~5시간 정도. 코스에 차밭만 있는 건 아니고, 멧돼지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울창한 숲도 있고, 폭포도 있고, 강을 따라 걷는 길도 있어 지루하지 않다. 히젠요시다 가마모토 도자기 회관에서 출발해 우레시노 시내에 있는 시볼트 족탕에서 끝난다.

우레시노는 차 외에도 온천이 유명해, 일본의 3대 피부 미용 온천 가운에 하나로 손꼽힌다나. 그러니 우레시노에 가면 규슈올레만 걷지 말고 하루쯤 머물면서 온천을 즐기시라.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것이니.

우레시노 버스센터에서 가미사라야로 가는 버스는 1시간에 1대 정도밖에 없다. 8시 40분쯤 배낭을 메고 스틱을 들고 료칸을 나서는데 쥔장이 묻는다. 언제쯤 돌아오느냐고.

글쎄요, 규슈올레를 걸으러 가는 길인데, 오후 3~4시경에는 돌아오지 않을까요?

그러자 쥔장이 "규슈 오루레" 하면서 반색을 한다. 규슈올레를 알고 있다는 의미렸다. 나 역시 쥔장이 규슈올레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일본인들 사이에서 규슈올레가 유명해지면 덩달아 제주올레도 그만큼 유명세를 탈 수 있을 테니까.

우레시노 버스센터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한국어가 들린다. 버스센터로 들어온 버스에서 나는 소리였다. 다케오 온센역으로 가는 버스라는 안내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규슈올레 코스 가운데 다케오 코스와 우레시노 코스를 한국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버스에서 흘러나오는 한국어 안내방송이 그런 사실을 증명하는 것 같다.

규슈올레 우레시노 코스
 규슈올레 우레시노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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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여러 차례 왔지만 대중교통 이용은 처음이다. 버스에 올라타 빈자리에 앉으니 기사가 내게 무슨 말인가 하면서 버스 출입구를 가리킨다. 마침 올라오는 승객이 버스 출입구에 비치된 함에서 작은 종이를 빼내는 것이 보였다. 버스에 타면서 그걸 받아야 하는 거다.

함에서 빼낸 종이에는 숫자가 쓰여 있었다. 그 숫자가 나중에 내야하는 버스비를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거리에 따라 버스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버스 운전석 옆 뒤에는 숫자와 함께 교통비가 적힌 전광판이 있다. 거기에 적힌 금액을 내릴 때 내리면 된다. 아니면 미리 버스표를 사면 그냥 버스표만 내고 내리면 된다.

우레시노 버스센터에서 우레시노 코스가 시작되는 가미사라야까지는 십여 분 남짓 걸리는 거리인데, 버스비가 310엔이다. 310엔을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야? 일본 교통비가 비싸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진짜였다. 버스를 탈 때나 전철을 탈 때마다 우리나라 교통비와 저절로 비교를 하게 되는 건 그만큼 교통비가 비쌌기 때문이다. 

가미사라야에서 내렸다. 규슈올레 코스에 있는 대부분의 마을이 그렇듯이 이곳 역시 조용했다.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게 신기하다. 사람들은 죄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버스정류장 표지판에 우레시노 코스 출발지를 알리는 종이가 붙어 있다. 비에 젖지 말라고 비닐포장까지 해놨다. 한글도 있다.

히젠요시다 가마모토 회관 앞에 있는 상징물. 바로 앞에 규슈올레 간세가 있다. 규슈올레 우레시노 코스 출발지점.
 히젠요시다 가마모토 회관 앞에 있는 상징물. 바로 앞에 규슈올레 간세가 있다. 규슈올레 우레시노 코스 출발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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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표를 따라가면 우레시노 코스 출발지점인 히젠요시다 가마모토 회관이 나온다. 버스 정류장에서 걸어서 채 5분이 걸리지 않는다. 히젠요시다 가마모토 도자기 회관 앞에는 도자기로 만든 구조물이 있고, 바로 그 앞에 규슈올레 출발지 표식인 간세가 세워져 있다.

가마모토 회관에는 다양한 도자기가 전시돼 있어, 눈길을 끈다. 이곳이 출발지점이 아니라 도착지점이라면 망설이지 않고 도자기 몇 점을 사들고 나설 것 같다. 하지만 지금 사면 걷는 동안 도자기는 돌덩어리가 돼 내 어깨를 짓누를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포기.

우레시노는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차 생산지. 시내 곳곳에 차를 파는 상점이 있는 건 그 때문이다. 차가 유명하다면, 그 차를 담아서 마실 수 있는 그릇 또한 필요하니, 그 때문에 우레시노에서 도자기 산업이 발달했다고 한다. 그것을 한눈에 보여주는 것이 히젠요시다 가마모코 도자기 회관이다. 

가마모토 회관을 출발하기 전에 규슈올레 안내책자에 올레 스탬프를 찍었다. 예전에는 이런 짓에 의미를 두지 않았다. 스탬프를 찍거나 말거나 내가 걸으면 되는 거지, 굳이 걸었다는 흔적을 남길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 또한 여행의 소소한 재미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렇다면 나를 위해 흔적을 남겨 추억을 만드는 것도 좋으리라. 그랬더니 스탬프를 찍는 순간이 참으로 즐거워지더라.

기왕이면 방명록에도 흔적을 남기면 좋겠지. 방명록에 다녀갔다는 흔적을 남긴 사람들은 대부분 한국 사람들이었으나, 간간이 일본사람 이름도 보인다. 오늘은 내가 처음이다.

수십 명의 지장보살들을 만날 수 있는 '다이죠지'

도자기로 만든 규슈올레 화살표
 도자기로 만든 규슈올레 화살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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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레시노 코스를 걷는 건 이번이 두 번째. 처음에는 사람들과 어울려서 걸었지만, 오늘은 혼자 걷는다. 슬쩍 긴장이 된다. 우레시노 코스는 멧돼지 출몰지역이다. 길 위에서 멧돼지와 정면으로 마주치는 건 아니겠지? 멧돼지는 야행성이라지만 누가 아나. 호기심이 유난히 많아 한낮에 싸돌아다니는 녀석이 있을지.

멧돼지야, 우리, 절대로 마주쳐서 서로 혼비백산하는 슬픈 인연을 만들지 말자.

도자기의 고장답게 규슈올레 길 표시도 도자기로 멋지게 만들어 놨다. 마을 곳곳이 도자기로 장식돼 있다. 운치가 있고, 기품이 있어 보인다.

마을을 벗어나 얼마 걷지 않았는데 절이 나타난다. 다이죠지(大定寺)는 고즈넉했다. 이곳에서도 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스님들은 어디로 가셨나? 두리번거렸지만, 만나지 못했다. 다이죠지는 도자기 마을인 요시다 사라야 지역의 번성을 기원하려고 세운 절이란다.

이 절에서 가장 유명한 건 수십 명의 지장보살. 바람개비를 곁에 세워둔 지장보살들이 다소곳이 서 있는 모습은 엄숙하면서도 우아하다. 그 앞에서 합장을 한다. 문득 바람이 나뭇잎들을 세차게 건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혹시 지장보살님들의 합창소리가 아닐까?

다이죠지(大定寺)의 지장보살들.
 다이죠지(大定寺)의 지장보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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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우라 신사
 요시우라 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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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을 지나면 요시우라 신사가 모습을 나타냈다. 신사의 도리이에는 푸른 이끼가 은은한 무늬가 돼 새겨져 있다. 세월의 더께가 잔뜩 묻어 있는 숲이고, 절이고, 신사다. 돌계단을 오르니, 세월을 거슬러 오르는 것 같다. 이 지역 사람들은 이곳에서 도자기의 신을 섬기고, 도자기 산업의 번성을 기원했다. 사람들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 힘에 기대어 마음의 위안과 함께 삶의 희망을 품으며 살아왔다. 그 마음은 지금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겠지.

숲으로 이어지는 길은 이따금 가파르거나 비탈지거나 하면서 이어진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은 지팡이. 스틱을 미처 준비하지 못한 이들을 위해 대나무로 지팡이를 만들어 비치해 놨다. 우레시노 코스를 관리하는 우레시노 시의 배려가 엿보인다. 앞으로 걷는 길이 지팡이가 필요한 길이니 마음의 준비도 더불어 하라는 귀띔인 것 같다. 그렇다고 긴장할 필요는 없다. 우레시노 코스는 힘들이지 않고 누구나 편하게 즐기면서 걸을 수 있는 길이므로.

오늘, 우레시노 코스를 걷는 사람은 나 혼자밖에 없는 것 같다. 걷는 동안 단 한 사람도 보지 못했고 만나지 못했다. 산새가 우는 소리, 바람이 속삭이는 소리, 물이 몸을 뒤채이면서 흐르는 소리를 들었지만 사람은 없었다. 이런 고즈넉함을 느껴본 게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다랑이 논을 연상하게 하는 차밭. 우레시노는 일본에서도 유명한 차 생산지다.
 다랑이 논을 연상하게 하는 차밭. 우레시노는 일본에서도 유명한 차 생산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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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가 돌아서니 마을이 보였다. 길은 마을을 지나 차밭으로, 숲으로 이어졌다.
 걷다가 돌아서니 마을이 보였다. 길은 마을을 지나 차밭으로, 숲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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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걷는다는 건 나만의 속도로 걸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누구에게도 신경 쓰지 않고 나 자신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갖기 쉽지 않은데, 지금 내가 그걸 하고 있다. 너무 좋다. 자주 혼자 길 위로 나서야겠다고 다짐한다. 스스로 하는 약속이지만, 지키기 쉽지 않다는 것, 잘 안다.

갑자기 눈앞이 툭 트이면서 푸른 하늘이 나타난다. 그리고 펼쳐지는 차밭. 남해 다랑이 논을 연상시키는 계단식 차밭이었다. 푸르디푸른 차밭은 저절로 걸음을 멈추게 할 정도로 아름답고 멋있다. 봄빛이 그 푸른 녹차밭 사이로 잔잔하게 스며들었다. 몇 장의 사진을 찍고 다시 걷기 시작한다.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지나온 마을이 한 폭의 풍경화가 되어 펼쳐진다. 마을 뒤로는 마을을 감싸듯이 이어진 산의 능선들이 우아한 곡선을 만들면서 펼쳐지고 있었다.


태그:#규슈올레, #우레시노 코스, #우레시노, #제주올레, #도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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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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