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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갑의 집에 갔다

제주 가기 며칠 전, 난데없이 김영갑이 꿈에 나타났다. 꿈에서도 그는 힘없고 마르고 외로운 모습이었다. '인가(人家) 멀은 산중에 까치는 배나무에서 짖는다'라는 백석 시구가 생각나는 그런 마을에서 쓸쓸히 혼자 살고 있었다.

여행중 길을 잘못 들어 그 마을에 갔는데 인가를 찾다가 그의 집까지 들르게 되었다. 나는 너무 자연스럽게 좀 쉬었다 가겠다 했고, 낯선 이가 난데없이 자기 집 방에 뻔뻔하게 누워 잠을 자겠다니 당황스러워하면서도 오래간만에 본 사람이라 일면 반가워하는 같았다.

한참 낮잠을 달게 자다가 인기척에 깼는데 김영갑이 보자기에 싼 물건을 건넸다. 잠이 덜 깨서 좀 귀찮아하며 받았는데 두 손으로 받기에도 좀 버거운 무게였다. 깨끗하고 매끈한 보자기를 풀어보니 '밥상'이었다. 흰 사기 그릇에 밥과 나물 등을 담아 큰 대나무 채반에 차려서 보자기에 싼 것이었다.

두모악 갤러리안에서 찍은 사진(2016년 4월 11일)
▲ 생전의 김영갑 두모악 갤러리안에서 찍은 사진(2016년 4월 11일)
ⓒ 두모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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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잠을 깼는데 밥을 먹었는지 도로 돌려 주었는지 도통 기억이 안 났다. 죽은 이가 차려 준 보자기 밥상을 받는 꿈이라... 인터넷의 '해몽'을 찾아보았다. '건강이 나빠진다'라는 흉몽이 있긴 해도 대체로 행운, 재운으로 나왔다.

밥상을 차려왔지만 먹지 않고 보기만 하면 '일상에서 자신의 복으로 주어지는 어떠한 것을 무관심이나 자신의 바쁜 일상으로 인하여 놓칠 수 있다'로 나와서 '먹은 거로' 우겼다.

김영갑의 꿈이 부추겨 작년 가을에 이어 올봄에 또 용눈이 오름에 갔다.

2016년 4월의 용눈이오름 입구. 억새가 사라진 수수한 용눈이오름
 2016년 4월의 용눈이오름 입구. 억새가 사라진 수수한 용눈이오름
ⓒ 이종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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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비 오는 가을의 용눈이오름. 금빛 물결로 출렁이는 용눈이 오름
 2015년 11월 비 오는 가을의 용눈이오름. 금빛 물결로 출렁이는 용눈이 오름
ⓒ 이종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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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름의 대비마마

다랑쉬가 오름의 여왕이라면, 용눈이는 오름의 '어머니'로 부를 수 있다. 까칠한 왕자 옆의 너그러운 대비마마 같다. 이런 저런 세상 풍파 다 보고 겪어서 묵묵히 품어주는 어머니, 언제 찾아가도 당신의 무릎, 배와 등을 내 주며 편히 누워라, 쉬라 하는 그런 어머니.

짧고 격한 경사를 화끈하게 자랑하는 여타의 제주 오름들과 달리 용눈이오름은 그 능선이 가장 완만하면서도 느리게, 길게 이어져 두 발로 걸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아이도 노인도 걷기 무난한 착한 오름이다. 넓은 평야 같고 어머니의 풍만한 젖가슴 같고 등허리 같이 푸근하다.

2010년 6월 경주왕릉. 제주의 오름같은 경주왕릉
 2010년 6월 경주왕릉. 제주의 오름같은 경주왕릉
ⓒ 이종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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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이 길게 누워 있는 모양, 용의 눈 같은 모양이라 용눈이 오름이라 한다지? 제주의 설화 속엔 거신 '설문할망'이 빠지는 곳이 없는데, 그 설문할망이 옆으로 길게 누워있는 모습이 이렇지 않을까 생각했다. 편안하면서 리드미컬하게 이어지는 용눈이오름의 풍만한 곡선은 경주의 왕릉과도 닮았다. 경주의 왕릉이나 제주의 오름은 미끄럼 놀이를 하고 싶게 한다.

2016년 4월 용눈이오름의 하늘을 찍는 친구
▲ 푸른 하늘, 누런 들판 2016년 4월 용눈이오름의 하늘을 찍는 친구
ⓒ 이종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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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얼. 어느 방문객의 옷차림과 오름 주변의 색감이 묘하게 잘 어울렸다.
▲ 현무암과 깔맞춤 패션 2016년 4얼. 어느 방문객의 옷차림과 오름 주변의 색감이 묘하게 잘 어울렸다.
ⓒ 이종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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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찍어도 옛날 달력 그림 속 유화같다. 비온 뒤 맑게 갠 용눈이의 색감은 고흐의 <까마귀가 있는 밀밭>을 연상케 했다. 들판 뒤의 오름은 용눈이오름 어느 쪽에서도 보이는 '다랑쉬오름'과 '아끈다랑쉬오름'이다.

2016년 4월 수학여행 온 학생들. 세월호와 단원고 학생들이 생각났다
 2016년 4월 수학여행 온 학생들. 세월호와 단원고 학생들이 생각났다
ⓒ 이종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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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백과 바람의 언덕

오름을 알기 전에는 울창한 나무와 숲이 둘러싼 곳이 좋은 산, 아름다운 산이라고 생각했다. 오름의 맛과 멋을 알게 되면서 '여백의 미'를 새로 느꼈다.

온몸을 흔들고 치는 세찬 바람을 맞으면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가슴이 청량해져서 울화병 환자도 1주일에 한두 번 오름에 오르면 묵은 시름이 치료될 거 같다. 사방 막힘없는 '해방과 자유'가 여기 있다.

2016년 4월 용눈이오름 정상에서 인증샷
▲ 나름 화보 촬영 2016년 4월 용눈이오름 정상에서 인증샷
ⓒ 이종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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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 모자가 바람에 날려가서 쓰고 있기 힘들 정도였다
▲ 망나니 머리 2016년 4월 모자가 바람에 날려가서 쓰고 있기 힘들 정도였다
ⓒ 이종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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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갑이 왜 그렇게 용눈이를 자주 오고 많이 찍었는지 어렴풋이 알겠더라. 외롭고 가난했던 그는 여기서 어머니의 품에서 한숨 푹 잔 뒤의 평화로움과 세찬 바람이 가슴 속 체증을 씻어가는 시원함을 느꼈을 것이다.

능선을 타는 사람들이 까만 점이나 잎 떨어진 나무처럼 보인다.
▲ 2016년4월, 용눈이의 쌍봉 능선을 타는 사람들이 까만 점이나 잎 떨어진 나무처럼 보인다.
ⓒ 이종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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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용'의 이름에 걸맞게 두 개의 알 오름과 제주 오름들 중 유일하게 세 개의 분화구가 있다.
넓기론 오름 중에서도 손꼽히지 싶은데, 높이나 경사는 가장 편하지 싶다. 오름의 느긋한 능선과 바람에 취해 생각없이 걷다가 내려오는 길을 놓치면 저 알오름을 두 번, 세 번 돌고 또 돌게 된다.

정상에 올라가서 거기가 '다'라고 증명사진 한 장 찍고 곧 내려가는 사람들을 보면 아쉽다.
오름은 여느 일반 산처럼 '꼭대기'가 다가 아니니 정상에 오르면 분화구 주변이나 능선을 따라 둥글게 한 번 걸어 보는데 더 큰 맛과 멋이 있다. 다랑쉬든 용눈이든 이곳에 들르거나 들를 분들은 정상에서 둥글게 원형처럼 이어지는 잔디를 따라 한 바퀴 돌고 내려가시길 꼭 권하고 싶다.

2016년 4월 다랑쉬오름에서 바라본 용눈이오름
 2016년 4월 다랑쉬오름에서 바라본 용눈이오름
ⓒ 이종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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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흔히 '사진'보다 실지가 별로라고도 하는데, 살아 움직이는 풍경과 정지된 사진을 비교할 수는 없다. '아름다움'의 기준이 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리 사진이 좋아도 내가 그 순간 그때 느낀 감동을 재현하진 못한다.

감동과 아름다움이 보기 힘든 천하 비경에만 있는 게 아니라, '일상'의 풍경 속에도 있다.
유네스코 세계 자연유산으로 지정된 '거문오름'보다 용눈이, 새별오름 같은 평범한 오름들이 더 좋은 이유다.

열정과 안정은 함께하지 않는다

제주도에 다녀와서 김영갑의 사진 에세이집 <그 섬에 내가 있었네>를 다시 꺼내 읽었다.그는 안정 대신 자신의 열정을 택했다. 맑고 순수한 열정, 극한의 가난함과 쓸쓸함이 책 페이지마다 넘쳤다. 글은 슬펐지만 사진들은 순수하고 맑은 이미지만 있었다.

어찌 그럴 수 있을까 싶었다. 한평생을 가난과 병, 고독 속에 있던 사람의 사진에 어떤 원망도 분노도 없었다. 모든 감정을 다 걸러낸 '평화로운 아름다움'이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는 지나쳤던, 새로 읽히는 글이 있었다.

관광객들은 섬을 떠나면서 마을의 평화를 한 움큼씩 가슴에 담고 갔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가져왔던 도회지의 스트레스를 몽땅 섬에 남겨놓고 빠져나갔다.

제주는 그런 육지 사람들로 오염되고 전국 땅값 상승률 최고치를 올리는 새로운 투기의 장소가 되고 있다. 치마폭에 흙을 날라 제주의 오름을 만든 설문 할망은 자신의 자식들이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괴발'스럽게 변하는 모습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덧붙이는 글 | 제 블로그(http://blog.naver.com/hin-son/220572449130)에 실은 글에다 최근 다녀온 경험담을 덧붙였습니다.



태그:#용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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